딸과 함께 꽃을 보네 08
“생명은 신비롭다.”, “신비로운 생명”과 같은 말은 진부하다. 그러나 신비롭다는 단어 외에 생명이 갖고 있는 그 고유의 힘을 더 잘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신비(神秘)는 말 그대로 신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다. 사람이 가 닿을 수 없다. 사람의 손길도 이성도 감성도 그 신비의 겉만 맴돌 수 있을 뿐 그 신비의 정수(精髓)로 육박(肉薄)할 수 없다. 육박은커녕 다가가는 경로조차 모른다. DNA를 알지 않느냐, 우주의 신비와 인체의 신비에도 거의 접근하지 않았느냐, 거의 모든 질병이 정복 직전에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세상에 보이는 현상의 감지, 그 감지를 통한 현상의 이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땅에서 풀 하나 돋게 만들지 못한다. 정자와 난자 없이 사람을 잉태시킬 수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생명이 깃들어 있는 뭔가가 없이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렇다. 말 그대로 아무리 육박해도, 육박이라는 말에 담긴, 그 얇은 막은 사람을 신비의 밖에 머물게 한다. 그 얇은 막은 신과 사람의 경계를 나눈다. 생명을 앞에 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은 감동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그 생명을 최대한 그 생명의 본연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것이다. 다가갈 수 없는 생명은 멀리서 보는 것이다. 멀리서도 볼 수 없는 소중한 생명은 그 존재의 지속을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딸을 본다. 꽃을 본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고 보낸다. 무심히 보낸 계절들은 내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고 갔다. 내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상관없이 그날, 그 햇살, 그 비, 그 바람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 해야만 했던 이야기를 하고 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난해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지난해, 열한 살의 딸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다. 한 살의 딸도, 두 살의 딸도, 세 살의 딸도. 다시 볼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사람은 후회를 남긴다. 바쁘게 사는 부모와 멀리 사는 조부모와 친척들이. 다행히도, 앞서 썼듯이, 난 딸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 순간순간의 모습을 지켜봤다. 생의 마지막까지 기억 속에 넣고 가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의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또, 딸을 본다. 항암 치료를 하며 2,3 킬로그램이 빠진 딸은 그 빠진 몸무게보다 더 여위어 보인다. 길이 약 2미터, 폭 약 1미터 정도 되는 거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곤 한다. TV는 시끄러워서, 요즘엔 잘 틀지 않는다. 뉴스도 안 본다. 그저 딸을 본다. 물론 딸은 날 보지 않는다. 딸은 패드로 그림을 그리거나 휴대폰으로 영어 공부를 한다. 가끔은 오빠들(제로베이스원)의 영상도 본다. 그런 딸을 본다. 맥주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그 잔이 오르내리는 시간 동안 딸을 본다.
턱 선이 날카로워졌다. 콧대가 높아졌다. 피부는 좋아졌다. 원래 컸던 눈이 더 커졌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해 보인다. 내 시선을 눈치챈 딸이 날 본다. 잠시 마주 보다 피식 웃으며 “왜요?”하고 껄렁껄렁 십 대 소녀를 흉내 낸 말투로 그 이유를 묻는다. “보는 게 좋아서 보니 신경 쓰지 마셔.”하고 받아친다. “흥”하고 맞받아친 뒤 씨~익 미소를 지은 뒤, 다시 하던 걸 계속한다. 그런 딸을 계속 본다.
딸이 처음 다닌 어린이집은 집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었다. 외동인 데다가 약간 내성적인 것이 맘에 걸렸던 아내는 세 살, 가을부터 그 어린이집에 보냈다. 난 딸은 유모차에 태우고 갔다. 그 스페인인지 프랑스 브랜드의, 중형 세단 같은 유모차에 말이다. 비가 오거나 추울 때는 레인 커버를 씌워서 같다. 그 어린이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지은 지 30년이 넘은 맨션이 있다. 그 맨션의 도로와 접한 화단엔 철마다 다른 꽃이 피었다. 우리는 그 앞으로 오갈 때마다 한참 꽃을 구경했다.
그 어린이집은 영아, 세 살반, 네 살반 밖에 없어서 다섯 살 때 다른 어린이집을 찾아야 했다. 그때, 난 집과 아주 가까운 어린이집을 아내에게 추천했고 아내가 알아보고 그 추천에 동의했다. 동네 엄마들의 평판이 좋았던 모양이다. 내가 그 어린이집을 고른 이유는 단순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은 물리적인 이유인데, 집과 아주 가까웠다. 아주 오래전(나중에 머릿돌을 보니 나와 나이가 비슷했다.), 2층으로 지어진 교회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
두 번째는 감성적이고 교육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는데, 선생님들의 근속 연수가 길었다. 아이를 낳기 전부터 그 집에 살았기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박물관 뜰이나 공원으로 산책 가는 걸 종종 보곤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선생님들의 면면이 그대로였다. 선생님들이 안 바뀌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돈을 많이 주거나 원장이 인품이 훌륭하거나. 나중에, 딸이 다닌 후에 알게 된 사실은 원장 선생님의 인품이 훌륭하셨다. 월급은, 당연히 알 수 없었고. 아이가 졸업한 지 6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두 명의 선생님이 그대로 다니고 있다. 물론 원장 선생님도 그대로 시고. 덕분에 딸은 길에서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만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많이 컸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 어린이집과 우리 집은 걸어서 2,3분 거리다. 그래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얼른 갈 수 있었고, 아침에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 어린이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독주택이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그 집들은, 당연히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화단을 길에 접하고 있고. 우리는 아침마다, 그리고 하원을 하여 집에 올 때마다 거기 핀 꽃들을 봤다. 그렇게 딸은 계절마다 다른 꽃이 핀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고, 그래서 해마다 때가 되면 피길 기다리는 꽃들이 생겼다.
삼색병꽃과 술붓꽃은 우리 집과 어린이집 사이, 우리 집 화단과 그 세 채의 벽돌집 화단에 피는 봄꽃 중에서 가장 특이한 꽃이다. 전자는 한 나무에서 세 가지 색의 꽃이 피어서 신기하고, 술붓꽃은 그 꽃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아서 우리 부녀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중, 삼색병꽃은 흰색, 분홍색, 그리고 자주색에 가까운 붉은색 꽃이 핀다. 꽃 모양이 병을 닮았다 해서 병꽃이라고 하는데, 삼색병꽃 외에도, 흰색만 피는 것, 붉은색만 피는 것, 자주색만 피는 것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삼색병꽃은 우리 빌라의 화단에 심겨 있다. 나무여서 매해 봄마다 그 꽃을 선보인다. 우리 화단에 심긴 것은 잘해야 1미터 남짓 크기지만 큰 것은 어지간한 소나무나 동백나무만 한 것도 있다. 딸과 종종 가는 우리 동네 평화 공원에는 그렇게 큰 것이 있다.
술붓꽃은 다년생 초본식물이다. 쉽게 말해 나무가 아닌 풀이라는 얘기다. 술붓꽃은 잎은 창포와 붓꽃, 난초를 닮았고 꽃은 난과 붓꽃과 닮았다. 그러나 단연코, 그 모양과 색의 조합으로는 독보적이다. 꽃의 끝은 톱니바퀴 모양처럼 갈라져 있다. 꽃잎은 여러 개로 갈라져 나오는데 흰색의 꽃잎과 흰색 바탕에 노란색 점을 연보라색 테두리가 둘러싸고 있는 무늬를 가진 꽃잎이 교차되어 있다. 열심히 썼지만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사진을 보시라. 정말 신기하지 않나?
하나의 나무에서 세 가지 색의 꽃이 피고 닮은 꼴을 찾을 수 없는 모양의 꽃이 지척에 피어났다. 우리는 봄날의 경이로운 창작물을 보고 또 봤다. 딸과 나는 빌라의 모퉁이 화단에서 삼색병꽃을 보고 건너편 집 화단에 핀 노란색 수선화를 본 후, 어린이집 가다가 잠시 멈춰 술붓꽃을 봤다. 특히 술붓꽃은 잠시 피었다 사라지기에 꼭 챙겨 보고 갔다. 우리는 이 꽃의 모양이 뭘 닮았는지 한참 얘기하곤 했다.
난 영화 <불가사리>에는 나오는 괴물이 입을 벌린 것 같다고 했다. 딸은 그 영화를 안 봐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 딸은 불꽃놀이 같다고도 했고 나팔을 닮았다고도 했다. 우리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술붓꽃을 꼭 빼닮은 다른 뭔가를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다른 꽃인들 그것이 가능할까. 모든 꽃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옆에 핀 꽃과도 다르게 생겼다.
신비는 눈앞에 있다. 앞서 썼듯이, 기적이라 불러 마땅한 것들은 일상 속에 있듯 우리로 하여금 설명할 수 없는 경이감에 빠지게 하는 신비로운 것 또한 일상 속에 있다. 신비와 기적은 반복된다. 다만 그때와 장소를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를 신비의 비밀 밖에 머물게 하며, 육박은 허락하나 침투와 이해는 불허하는, 오로지 그 신비에 경탄만 하게 하는, 신비를 둘러싼 베일은 일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직조되어 있다.
그 실은 나와 내 눈앞에 있는 이로부터 나온다. 그 실이 얼기설기 엮여 신비한 일상을 만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막이 그러하듯 몸이 부딪히거나 시선이 가 닿지 않으면 막은 그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다.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에 나오는 그런 막처럼 말이다. 결국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충돌한 사람에게만 그 존재를 알린다. 신비는 그 베일 뒤에서 우리의 발견을 기다린다.
직조된 것이 다 그렇듯, 그 아름다움은 낱개의 실에 달려 있지 않고 그 실들의 조화로 이뤄졌다. 우리가 마주하는 신비한 것들 또한 그렇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고 어제와 오늘이 포개지며 나와 타자가 한데 어우러지는 그 순간, 그 장면, 그 교감 속에 신비가 찾아온다. 우리는 그렇게 낱개의 것으로는 만들 수 없었고 혼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삶의 신비를 마주하게 된다. 반복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그 신비를.
신비는 인위적이지 않다.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다. 그저 어느 순간 도래하고 느닷없이 발견된다. 늘 존재하던 이로부터 성큼 걸어 나온다. 신이 숨겨 놓은 비밀은 그렇게 일상과 평범 뒤에 숨어 있다.
딸과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대화를 많이 하게 된다. 며칠 전, 딸의 운동을 위해 잠시 산책을 했다. 불쑥 얘기를 꺼냈다. 네가 태어났을 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었다. 책도 내고 교수도 하고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벌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그런 아빠. 요즘엔 그런 생각을 버렸다. 그저 아빠로 오래 네 곁에 있어주고 싶다. 네가 한창 잘 나갈 때,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에서 마흔 사이, 커리어의 전성기를 달릴 때, 아픈 아빠를 데리고 병원 이곳저곳을 전전하지 않도록,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너에게 짐이나 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건강하게 네 곁에 오래 있고 싶구나. 그렇게 말해줬다.
어떤 고통엔 이유가 있지만 모든 고통마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닥쳐오는 대부분의 고통은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명확하지 않은 이유를,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나를 파헤치고 가족을 휘저어 놓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있으면 그 고통을 사랑하는 이와 견뎌 이겨내는 것이 낫다. 그 힘 또한, 그 사랑의 힘 또한 신비로운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곤 하듯, 그것을 이겨낼 힘 또한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다. 봄이 되어 꽃이 피듯.
딸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주기보다, 꼭 있어야 될 존재로 존재하는 것이 존재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이유가 없듯이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의 합목적성 또한 없다. 아빠는 아빠여서, 나를 한없이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장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이기에 아빠라 부르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사랑 뒤에, 존재 뒤에 오는 것들이다. 신비한 것들이 아니어서 설명되는 것들이다.
아빠와 딸은 만날 이유가 있어서 만난 것이 아니다. 서로를 마주 보게 한 운명은 설명할 수 없는 영역 너머에 있다. 결국 우리를 지탱하는 힘은, 우리의 이 평범하며 안온한 일상을 지탱하는 힘은 설명할 수 없는 그 힘, 사랑이라는 신비한 힘에서 오는 것인지도. 설명하려 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지고 마는.
딸에게 물었다.
“기무라 타쿠야 검색해 봤어?”, “아니.”
함께 검색해 봤다. 전성기 모습을 봤다. 딸이 항암 가발을 썼을 때 모습과 비슷했다. 딸도 신기해하며 웃었다. 항암이 끝난 뒤, 머리카락이 자란 뒤에도 계속 그런 스타일을 해볼까,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