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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파랑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1

by 최영훈

눈에 띄는 파랑

스마트 폰에 저장된 꽃 사진 폴더를 넘기다 보면 눈에 띄는 색깔이 있다. 꽃 색깔로는 흔치 않은 파란색이 그러하다. 그 크기와 풍성함과는 상관없다. 다른 글에서 언급한 닭의장풀은 매해 여름마다 찍었는지, 너 댓 번 나온다.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 색 또한 이견의 여지없는 파란색이어서 꽃이 아닌 인공적인 장식 같다.


여름에 피는 꽃들이 어떤 작당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장마가 올 때쯤 피는 수국도 파란색이다. 수국의 대표색을 딱 잘라 말하자면 보라와 파랑인데, 사람의 발길을 붙잡는 역할은 파랑이다. 내가 좋아하는 수국 명소는 황령산 산행 초입에 만나는 작은 사찰, 대연사다. 이곳에 피는 수국들은 색이 제 각각이지만 주요 색은 연보라와 붉은 기운이 감도는 보라다. 그 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파랑이 활기를 불어넣는다.

흔치는 않지만 봄에도 파란 꽃이 있다. 수레국화다. 태화강국가정원이 막 개장을 준비할 때, 우리 팀이 그 론칭 광고를 맡았었고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이곳의 캠페인을 제작했었다. 덕분에 감독과 나는 봄부터 겨울까지, 이곳 구석구석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카메라와 눈에 담아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권하자면, 언제 가도 좋은 곳이지만 꽃의 장관을 보고자 한다면 단연코 늦은 봄과 늦가을이다. 늦은 봄에는 수레국화와 꽃양귀비의 앙상블이, 늦가을에는 반달 모양의 샛노란 국화 정원이 오렌지색 노을과 앙상블을 이룬다.

수레국화는 익숙한 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봤을 때, 그 색에 압도당했다. 넓은 정원을 빨간 꽃양귀비와 정확히 양분하여 군락을 이루고 있기에, 청홍의 대조가 극명해서 더 그리 보였을 것이다. 물론 따로 봐도 매력적이다. 파란 물결을 보고 있자면 꽃이 청량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크로아티아와 독일이 왜 이 꽃을 나라의 꽃으로 여기는지 이해가 간다.


흔한 듯 흔하지 않은 파랑

파란색은 흔하나 파란 꽃은 흔치 않다. 사람들이 아무 데나 파랗다, 푸르다는 표현을 갖다 붙이지만 실제로 그리 말하는 자연의 것 중 정확히 파랑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푸른 숲은 알다시피 초록이고 파란 바다는 그야말로 은유에 불과하다. 부산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았지만 바다가 파랗게 보이는 날은 그야말로 일 년 중 몇 날 안 된다. 물의 색은 물 혼자 내지 못하고 물속과 물 밖, 빛과 바람이 합심하여야 겨우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당신이 제주도나 부산에 여행 가서 본 바다가 파랬다면 여행의 운이 좋은 것이다. 조금 센 바람만 불어도 물색은 변한다. 연한 초록이 되기도 하고 연회색이 되기도 한다. 이 바람과 저 바람이 바다 위에서 수시로 부대끼면 파도도 갈피 없이 나대는 통에, 물마루에서 부서지는 물거품이 바다를 거의 희게 만든다. 태풍에 그 속이 뒤집어진 바다는 스님의 승복보다 더 짙은 먹색으로 변한다. 밤바다는 검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이유로 파란은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색이다. 흔하지 않아서, 어떤 분야에서는 흔하게 쓰이는지도 모른다. 하늘색부터 짙은 남색까지 파랑은 나라와 인종, 세대를 막론하고 두루 쓰인다. 세계 어느 프로 스포츠 종목이든 그 팀들의 유니폼을 모아 보면 파란색이 최소한 두 개 이상이다. 대학의 로고도 모아보면 파란색 계열이 압도적으로 많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흔한 색인데, 일상엔 흔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승용차 중에서 파란색 자동차는 흔치 않고 파란색으로 칠해진 주택이나 빌딩도 보기 어렵다. 파란색은 흰색을 돋보이게 하기에 사람들에게 글자와 로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되는 색이기에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색이 됐는지도 모른다. 빨강과 파랑은 이런 맥락에서 같은 운명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국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두 색을 고르라면 이 두 색 아닐까. 이슬람권을 제외하면 더 압도적일 테고. 건국의 메시지와 영토와 민족의 전설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난 색이 빨강과 파랑인 것이다.


파란, 파랑, 파동

파랑과 파란은 각기 동음이의어를 갖고 있다. 파랑은 파랑(波浪), 파란은 파란(波瀾)이 있다. 파랑은 파도인데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를 통상적으로 파랑이라 한다. 바람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고 멀리서 밀려오는 파랑의 에너지를 받아 일어나는 근해의 파도는 너울이라고도 한다. 파란은 사건이다. 인생에 일어난 고난과 굴곡을 만든 사건이다. 혹은 평온하던 세계와 굳어진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 혹은 존재를 지칭하기도 한다. 예전엔 폴란드를 파란(波蘭)이라고도 불렀다. 프랑스를 불란서로, 남부 캘리포니아를 남가주라고 불렀던 것처럼.


파란은 파랑이 일으키는 사건이다. 두 한자 모두 물결을 뜻하고 있다. 물결 두 개가 겹쳤으니 무시할 수 없는 물결이다. 앞의 파(波)는 물과 가죽이 만나 글자를 이루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잔혹한데, 물가에서 잡은 짐승을 매달아 놓고 가죽을 벗길 때, 그 벗겨지는 가죽의 주름이 물결을 닮아서 글자를 이리 구성했다고 한다. 반면 란(瀾)은 물과 막는 난간이 만나 이뤄진 글자다. 사전에 따라선 뒤에 붙은 난은 그저 음을 담당하는 것이라고들 하는 데, 생각해 보면 높은 물결이 사람이나 짐승의 나아감을 막을 수도 있으니, 란은 소리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싶다.


사람도 물결이다. 파랑과 파란을 일으키는 파동(波動)의 중심이다. 어딘가에서 자기의 무게에 맞는 고유의 동심원을 만들고 있는 존재다. 움직일 때마다, 그 움직임의 반복 속에서 존재의 파동은 그 무게 이상의 파동을 만든다. 힘껏 살아내면 낼수록 존재의 물마루는 더 높아진다. 물이 그러하듯, 파도가 그러하듯 때로는 사람도 다른 파동을 만나 더 큰 파동이 되기도 한다.


테트라포드와 방파제, 해안과 안벽, 섬과 암초를 만나기 전까지 파동은 파랑을 밀고 간다. 고요한 곳에 파란을 일으키며 그 힘이 사라질 때까지 퍼진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막힘이 없는 인생은 한계가 없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그런가. 당연하게도 우리에겐 막아서는 뭔가가 있기에 멈춰 선다. 그 막아서는 것이 자신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다. 세상일 수도 구조일 수도 있다. 그 막아서는 것을 만나면 해안에 다다른 파도가 물러나듯, 사람 또한 부서져 물러난다.


파도는 쉬지 않는다. 해수욕장에서 파도를 막겠다고 세운 콘크리트 구조물로 인해 해변의 모래는 유실된다. 친구한테 맞은 동생이 형을 불러오는 것처럼, 물러난 파도는 다른 파도와 함께 와 사람이 만든 벽을 때린다. 그 밑으로 파고들어 모래를 가져간다. 그 위에 세운 견고한 것들은 결국 쉬지 않는 파도에 흔들린다. 사람은 반복하여 세우고 메우지만 파도는 지치지 않고 온다. 파도가 그런 것처럼 사람 또한 그렇다. 물러서되 나아감을 멈추지 않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간다. 인생은 속도와 거리가 아니라 반복에 있다. 지치지 않는 반복, 그 반복으로 인해 쌓아 지는 숙련, 그 숙련으로 만들어가는 달라지는 자신.


함께 가는 우리

딸은 자기만의 무게로 그 나름의 파동을 일으키며 살아왔다. 그러다 병이라는 암초를 만나 인생 처음으로 멈춤과 물러섬을 경험했다. 그러나 물러난 파도에 여전히 그 파동이 잠재되어 있듯, 딸 또한 그 의지를 잃지 않았다. 치료가 끝나고 회복을 한 뒤 가발을 쓰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 체력과 근력을 회복하기 위해 집에서 틈나는 대로 가벼운 근육 운동을 하고 있다. 삼촌이 사준 영어 앱은 그 이후 매일 하고 있다. 몇 백일 연속인지 모르겠다.


인생의 파동 안엔 타고난 것과 부모가 마련해 준 것, 그리고 스스로 만드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딸은 세 번째 것의 중요성을 일찍 알아챈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맥락에서 두려운 마음이 들곤 한다. “아빠 때문에 내 꿈을 이루지 못했어.”라는 말을 들을까 걱정이다. 딸이 가진 힘 중에서 가장 작은 힘이 아빠의 힘인 건 아니지 걱정이다. 뭔가 더 줘야 하는 건 아닌지, 더 많은 걸 마련해줘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그게 뭔지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을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올릴 즈음, 우리 가족은 남원에 있을 것이다. 화요일부터, 전주와 남원을 여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딸의 회복과 등교를 기념하기 위해, 함께 이겨낸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체험학습에 포함된 놀이공원을 마음껏 즐길만한 체력이 안 되는 딸에게 다른 체험을 선사하기 위해 학교의 양해를 구하고 떠나기로 했다.


우린 이 여행길에서 더 많은 꽃을 볼 것이다. 전주를 처음 가보는 딸은 더 많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남원이 처음인 나는 딸과 함께 많은 걸 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어느 밤엔,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며 약간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함께 넘어온 그 파란의 시간을 돌아보며, 더 강해진 우리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며.


커버는 2023년 6월,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거제도에서 찍힌 사진이다. 딸은 이르게 핀 수국과 함께 자신의 그림자를 찍으려 했다. 바다의 사진은 부산, 울산, 여수, 거제 등지에서 찍은 것이다. 수레국화는 여행 중, 전주 한옥마을 어느 골목 한귀퉁이에 삐죽 올라온 것을 찍었다. 아래의 사진은 전주 팔복예술공장에서 우연히 만난 앙리 마티스와 라울 뒤피의 전시회에서 딸이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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