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19
향을 가진 식물이 보라를 선택한 것인지, 인간이 좋아하는 향이 유독 보라색 꽃을 가진 식물에게 있는 것인지, 난 모른다. 봄꽃의 색깔 지분율을 내가 가진 꽃 사진들로 가늠해 보면 보라는 분홍, 노랑, 하양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지금 바로 거리로 나가 보라색 옷을 입을 사람을 오 분 안에 찾아보라는 미션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감안하면 자연의 취향은 의외로 과감하다 할 수 있지 않나. 여름으로 넘어가면 그 크기와 색도 봄의 그것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것이 있지만, 그 꽃은 여름에 맡기고 봄의 보라로 돌아가자.
향이 있는 보라는 흔하다. 연보라의 라일락, 진보라의 로즈메리와 라벤더가 가장 익숙하다. 우선 이 세 주인공 이야기부터 해보자. 라일락과 라벤더는 꽃에 그 향기가 있다. 라일락은 주변에 흔하다. 딸의 초등학교 등굣길에 있는 조각 공원에도 몇 그루 있다. 알다시피 라벤더는 세제 등에 많이 사용되는 향기고 라일락은 그 유명한 껌의 향기로 사용됐을 정도로 상쾌하다.
로즈메리는 잎에 청량한 향을 머금고 있다. 잎은 가늘고 꽃도 작은 데 향은 강하다. 로즈메리는 세이지처럼, 살짝 스쳐 만진 후 손바닥에 코를 대면 향을 맡을 수 있다. 로즈메리의 향은 앞서 말했듯 상쾌하고 세이지는 레몬 향 비슷하다. 이들 허브 모두, 우리 동네 화단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향이 없는 보라도 충분히 멀리서 눈에 띈다. 그 때문일까. 팬지는 보라를 편애한다. 진보라의 팬지도 있지만 연보라와 흰색이 조화를 이룬 팬지도 쉽게 볼 수 있다. 진보라를 말할 때 철쭉이 빠질 수 없고 바이올렛도 그에 뒤지지 않으며 인근의 잘 관리된 정원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바로니아 피나타와 로벨리아 또한 이 무리에서 빠질 수 없다.
특이하게 생긴 보라색 봄꽃도 있다. 향이 머스크 향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무스카리는 종을 닮은 작은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다양한 꽃이 심긴 화단을 자랑하는 세 채의 빨간 벽돌집 중 마지막 집 화단에는 그 벽에 딱 붙은 채 아주가랩탄스가 피어 있다. 보면 알 수 있듯 이 두 꽃이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아주가 랩턴스의 작은 꽃은 눈사람 모양의 크리스마스 쿠키를 닮기도 했다.
자잘한 보라색 꽃으로는 봄의 첫 장을 여는 제비꽃을 빼놓을 수 없다. 올봄, 아내와 함께 오른 백양산에서 붓꽃을 닮은 들꽃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알아보니 각시붓꽃이었다. 꽃의 모양은 술붓꽃과 비슷하고 잎은 난이나 창포 하고도 닮았다. 진보라의 작은 꽃으로는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꽃잔디를 빼놓을 수 없고 진하다 못해 파랗게까지 보이는, 아직 추위가 여전한 날에도 꿋꿋이 땅에 붙어 봄의 시작을 알리는 봄까치꽃도 있다. 이 모든 보라가 흔하게 선을 보이니, 다시 말하건대, 자연의 취향은 사람의 취향보다 훨씬 강렬하다.
보라는 물결로 볼 때 더 강렬하다. 색도 흔치 않은데 그 물결은 오죽할까. 딸이 서너 살일 무렵 북해도의 후라노로 여행을 갔었다. 라벤더의 보라색 물결과 만났다. 보라색은 흰색과 노란색의 다른 꽃과 어우러져 자유를 갈망하며 이제 막 독립한 어느 신생국가의 깃발처럼 지면에서 펄럭였다. 그 반대편엔 보리의 황금물결이 조용히 그 역동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딸과 나와 아내는 그 물결을 꽤 오랫동안 봤다.
꽃을 보면 마냥 신나 할 나이였던 딸은 그 한없이 이어지는 듯 한 보라색 물결 앞에서 연신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 짧은 다리로 종종 거리듯 뛰어다니며 팔을 쭉 뻗어 보이는 꽃마다 가리키며 아빠를 불렀다. 자기가 보는 걸 아빠도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불러댔다. 안 보고 있어서 부른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와 같은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불렀으리라.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이 풍경에 아빠도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지 묻기 위해 불렀으리라. 난생처음 보는 보라색 물결 앞에서 제어할 수 없이 솟아오른 이 경이로운 감정이 아빠에게도 있는지, 알고 싶어 불렀던 것이리라. 그런 마음으로 아사히카와의 동물원에서도, 도쿄의 디즈니랜드에서도 아빠를 그렇게 자주 불렀으리라. 그때의 딸에게 지금의 생각을 보낸다.
'네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아빠는 네가 좋으면 아빠도 좋았다. 네가 감동하면 아빠도 감동했고 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아빠의 시선도 머물렀다. 너의 시선이 꽃과 동물과 파란 하늘과 드넓은 바다에 고정되어 있는 동안, 곁에 있는 아빠를 잠시 잊고 너에게 감동을 주는 그 무엇에 너의 시선이 뺏겨 있는 동안, 아빠는 그런 너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너를 보라고 아빠를 부르지 않아도 너를 보고 있었다.'
보라는 시선을 요구할 때 쓰는 명령어로도 쓰인다. 또, 물이 사물에 부딪혀 작게 부서져 흩어지는 모습과 현상은 물보라다. “보라”와 “물보라”는 시선과 그 외부의 조우, 물과 사물의 조우로 인해 발생한다. 주체에게 강력히 요구되는 시선, 주체의 파열을 담보로 하여 발생하는 물보라. 사람이 그렇게 시선을 타자에게 끌어당김을 당할 때, 그 주체는 시선과 함께 마음을 뺏긴다. 어쩌면, <인어공주>의 마지막 장면은 시선으로 시작하여 결국엔 모든 걸 뺏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에게 자신의 모든 걸 내어준 이의 최후의 피어남일 지도.
주체는 그 종국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를 지키는 법을 고민하고 세상에 살면서도 그 세상에 주체가 쓸려가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 방법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장하면서 알아간다. 딸도 그랬다. 친구에게 배신도, 모함도 당해봤다. 그 고통을 통과하며 딸의 마음은 더 깊고 커졌다.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세기와 깊이가 있는, 어떤 단호한 다짐을 했다. 최근에 겪은 투병 생활 끝에 딸은 더, 더 깊은 뭔가를 깨달은 것도 같다. 사람과 시선에, 세상에 너무 휩쓸려 살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한 것만 같다.
물론 나와 아내가 그렇게 키웠던 부분도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딸의 옷과 가방색은 친구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나와 아내는 유행하는 브랜드나 색이 뭔지를 살피기보단 딸이 좋아하고 원하는 옷과 색을 입혔다. 미국에서 친할머니와 이모가 보내오는 옷도 다 그런 옷이었다. 네가 입으면 예쁠 것 같아서. 이유는 오직 그거 하나였다. 재미있는 건, 계속 이러고 다니면 친구들이 그러려니 한다는 것이다. 너무 튀어서 친구들과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그야말로 기우였다.
중학교 등교를 시작한 지 아직 채 한 달이 안 됐다. 그 사이 체육복이 나왔고 하복이 나오기 직전이다. 선배들은 매일 체육복을 입고 다니지만 1학년은 교복 등교가 원칙이다. 그런데 체육복이 나온 이후 하교를 하는 아이들 중 교복을 입은 이는 딸뿐이다.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다들 등교 후 교실에서 바로 체육복으로 갈아입는다고 한다.
엊그제 딸에게 들은 바로는 현재 1학년 학생 중에서 교복을 입은 채 하교는 물론이고, 학교 생활까지 하는 학생은 딱 두 명 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과 다른 한 명. 어느 날, 한 선생님이 궁금해서 물었다고 했다. “아직 체육복이 안 나왔니?”, “아뇨.”, “그럼 까먹고 안 가져온 거야?”, “아뇨.”, “아, 그럼 그냥 교복이 편한 거구나.”, “네.”, 다시 말한다.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런데 딸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교우 관계도 크게 메이지 않는다. 딸이 투병을 하는 지난 몇 달 동안 딸에게 꾸준히 연락하고 병문안을 오고 그 이후에도 관계를 이어가는 친구는 세 살때부터 영혼의 단짝이었던 지유와 해리포터와 수학에 빠져 사는 온유, 딱 두 명뿐이다. 반면 딸이 입원하기 전까지 친한 친구를 자처하면서 딸에게 거의 집착에 가까운 연락을 하던 한 아이는 이 기간 동안 단 한 번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입원해 있는 동안 단 한 통의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던 그 친구를 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엄청 친한 사이였던 것 마냥 다가왔다고 한다. 딸의 반응은 당연히 데면데면했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과도 다시 안면을 트고 인사를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둘씩, 셋씩 붙어 다니는 애들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딸은 그 관계에 메이지 않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교복을 입고 다니는 두 명 중 한 명인 것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소녀가 되어 버렸다.
향이 있는 보라는 흔하다. 향이 없어도 보라는 충분히 눈에 띈다. 그러나 보라색 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다. 딸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저 자기가 갈 인생과 그 방향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이 바다 위를 떠가는 항해와 같다면 흔들리며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잠시 흔들려도 당황하지 말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며 방향을 잃지 말고 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관건이다. 고개를 들고 앞을 보며 수영하는 건 어렵다. 파도가 없는, 정해진 규격과 레인마다 줄이 쳐져 있는 수영장에서도 힘든 것이 헤드 업 자유형이다. 오죽하면 회원들의 체력 향상을 위해 강사들이 즐겨 시키는 수영이겠나. 이 수영을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한다고 상상해 봐라. 얼마나 힘들겠나.
이렇게 고통스럽게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라면, 우선은 홀로 헤쳐 가는 힘을 키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 헤쳐 가는 힘을 가진 자만이, 그러면서도 힘이 남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자 힘으로 헤쳐 가 본 사람만이 그 힘이 금방 떨어져, 언젠간 다른 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홀로, 어울리지 않는 색으로, 그런 존재로 서 있어 본 자만이 누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나를 지키며 너를 도울 수 있는, 나를 지키며 너를 사랑할 수 있는, 나를 지키며 너도 온전히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보라와 같은 존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