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18
노랑처럼 분홍도 봄의 색이다. 흰색으로 보이는 꽃도 다가가 들여다보면 연한 분홍이다. 연분홍의 벚꽃에서 진분홍의 철쭉까지, 분홍은 노랑과 함께 봄의 주인공이다. 이 분홍들이 오는 순서는 제 각각이다. 매화와 모과꽃이 먼저 오고 뒤를 따라 벚꽃이 온다. 벚꽃이 질 때쯤이면 분홍의 채도와 명도를 한껏 올린 철쭉이 뒤를 따른다. 수줍은 진달래는 야트막한 야산에 길쭉한 가지에 매달려, 몰려 있는 개나리 사이에서 흔들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여러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 고유의 봄꽃은 진달래라는 주장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김소월의 시도 있지 않나. 그러나 실제로 진달래를 만나는 건 쉽지 않다. 가로수며 건물 화단이며 장소를 가리지 않고 웅성대며 모여 있는 철쭉처럼 쉽게 볼 수 없다. 중요한 곳마다 무더기로 심겨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인기 스타도 아니다. 진달래를 보려면 약간의 관심과 수고가 필요하다.
우선, 산에 가면 볼 수 있다. 높은 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동네 뒷산을 마실 가듯 슬슬 오르다 보면 철쭉과 비슷하지만 뭔가 약간, 친구들보다 머리통 하나쯤 키가 큰 수줍은 소녀가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것만 같은 소박한 분홍꽃이 보인다. 진달래다.
또, 국도변에 노란 폭포를 만들며 운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개나리 군락 사이에, 혹은 그 뒤편에 무리도 짓지 않고 그저 홀로 가만히, 삐쭉 솟아 있는 분홍꽃이 있다. 역시 진달래다. 얼마 전, 경주시 홍보 담당자의 제안으로 유명한 벚꽃 명소인 암곡이라는 동네로 가는 데, 그 길 양쪽으로, 만개한 개나리 군락 틈바구니에, 그렇게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가장 탐스런 분홍 주인공은 겹벚꽃이다. 벚꽃이 지고 좀 있으면 큼직한 나무에 카네이션을 닮은 소담스러운 분홍꽃이 피는데, 그게 겹벚꽃이다. 겹벚꽃도 흔히 보이지 않는다. 어지간한 꽃은 다 볼 수 있는 필자의 동네에서도 겹벚꽃은 어느 담장 안에 숨어 있다. 흔히들 유엔묘지로 부르곤 하는 유엔기념공원 안이다.
그곳의 후문(정문보다 후문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 가깝다)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면 검은 대리석으로 만든 미로가 보이는데, 이 미로의 공식 명칭은 추모명비로, 여기에는 40,896명의 전사자와 실종자의 명단이 국가별, 알파벳순으로 새겨져 있다. 겹벚꽃은 이 추모명비의 진입로와 그 양쪽의 화단에 심겨 있다.
지역민과 몇몇 관광객 사이에선 제법 유명세가 있어서 4월 중순쯤, 만개할 때면 그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유명세도, 이곳에 겹벚꽃이 있다는 것도 이 동네에 산 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칼럼에 사용하기 위해 추모명비를 촬영하러 간 날, 우연히 알게 됐다.
그 꽃이 너무 탐스럽고 예뻐서, 그 색이 너무 고와서 며칠 후 딸을 데리고 또 갔다. 그 나무 아래에 딸을 세워놓고 관광객처럼 사진을 많이 찍어줬다. 어느 사진도 맘에 들어하지 않던 딸에게, 또다시, 아빠는 참 사진을 못 찍는다고 타박을 들었지만 말이다.
그 뒤로 봄이 가기 전, 추모명비를 찾곤 한다. 갈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이 세상에 없는 4만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검은색 미로 앞에 흐드러지게 핀 겹벚꽃과 그 꽃에 취하여 사진을 찍는 청춘들을 하나의 앵글 안에 담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이토록 가까운 것인가. 인생의 비극과 희극은 이토록 가까운 이웃이었던가.
그야말로 꽃다운 청춘의 이름이 새겨진 이곳에서, 저 먼저 간 청춘의 영혼들은 자신들 앞에서 청춘의 한 날을 기록하는 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했다. 더 생각해 보면 심오한 것이다. 유엔기념공원은 딸이 다녔던 초등학교와 다니고 있는 중학교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들에게 들릴까. 위로가 되려나. 아니면 그들의 영혼이 여전히 이 땅의 이 아이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인가. 긴 생각에 잠기곤 했다.
혈색이 사라진다. 항암 치료 병동에 가면 혈색을 잃은 사람들만 있다. 독한 약이 몸의 생기를 가져간다. 몸이 약을 버텨내느라 미처 몸의 가장 밖에 있는 피부에까지 줄 기운이 없어서다. 하여, 안색이 어두워진다. 손과 발의 색이 탁해진다. 더 지나면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이 검게 변한다. 눈 밑의 그늘은 더 짙어질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진다. 입술에만 간신히 연한 분홍빛이 떠돈다. 딸도 그랬다.
아내의 지인 중 먼저 항암치료 경험이 있는 사람이 비타민 주사를 추천했다. 딸이 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가 일하고 있는 병원이 아닌 다른 대학 병원 의사의 주력 상품이었다. 조금이라도 항암치료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던 아내는 그 주사를 맞히기로 결정했다. 딸은 항암치료 주간이 끝나면 그다음 주에 그곳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고농도 비타민을 비롯한 다양한 영양제가 포함됐다. 그런 주사를 몇 차례 맞았다. 내가 보기에 별 효과가 없어 보였지만 말리지 않았다. 자식이 아프면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려 한다. 그 열성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사랑의 영역이다. 모성애의 본능이다. 아버지는, 남자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이다.
항암치료가 다 끝난 주의 다음 주에도 맞으러 갔다. 치료는 끝났지만 손가락, 발가락 끝에서 혈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딸은 혼잡한 주사실의 맨 안쪽 침대에 자리 잡고 주사를 맞았다. 비타민과 함께 글루타티온이 섞인 영양제도 함께 맞았다. 마침 이날, 아내가 전화로 업무를 보는 동안 내가 보호자로 침대 곁에 앉아 딸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딸의 볼에 붉은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위로 분명히 보였다. 손등을 봤다. 살짝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혈색이 돌아오는 걸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손바닥을 보여 달라고 했다. 말라비틀어진 찰흙 색이었던 손바닥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양말을 벗겨 발도 봤다. 거기에도 연한 붉은 기운이 돌았다. 혈색이 돌아와 딸의 뺨과 손과 발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날이 시작이었다. 항암치료가 완전히 끝난 며칠 후부터, 혈색이 분홍을 몰고 딸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무게도 돌아왔다. 매일 아침마다 혈색이 돌아온 딸의 얼굴을 살폈다. 발그레한 딸의 얼굴을 매일 아침마다 확인했다. 손과 발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머리카락이 나기까진 더 시간이 필요해서 여전히 머리통은 민머리지만 다른 곳에 회복의 징후가 뚜렷했다. 그렇게 좀 더 지켜본 후, 등교를 하기로 했다. 3월 31일, 월요일, 딸의 중학교 생활이 시작됐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야무지게 아침을 챙겨 먹고 씻은 뒤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딸은 제법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교복을 입고 나왔다. 그리고 가발을 조심스럽게 썼다. 영락없는 여중생이었다. 텀블러에 물을 채우고 지난겨울에 산 연한 고추냉이색의 큼직한 가방을 메었다. 가방엔 교실 사물함에 다시 가져다 놓을 몇 권의 교과서가 그날의 시간표에 맞게 들어 있었다. 휴직 기간, 딸을 자동차로 등하교시켜 주기로 계획을 세웠던 아내도 출근할 때처럼 일찍 아침을 시작하여 준비를 끝내고 딸과 함께 집을 나섰다.
딸은 등교하기 훨씬 전부터, 딸의 표현을 빌리면, “찐따” 콘셉트로 중학교 생활을 할 거라고 확언했었다. 그게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냐 물으니,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박하면서 쉬는 시간에도 공부만 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라고 설명해 줬다. 아내와 나는 코웃음을 쳤다. 며칠 못 갈 거라고 장담을 했다. 우리의 장담이 맞았다.
등교 이후, 매일 저녁, 딸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줬다. 오랜만에 다시 본 초등학교 동창 얘기,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학교생활을 안내해 준 부반장 이야기, 생일을 물어보고 2월 달임을 안 아이들이 둘러싸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 이야기, 수학 시간과 영어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매일 저녁마다 해줬다.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 선배들이 말을 걸어준 일, 수학 시간에 문제를 잘 풀어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일, 국어 시간에 시를 써서 칭찬받은 일을 쉬지 않고 말해 줬다.
며칠 전, 딸을 데리러 가는 아내와 동행했다. 학교가 가까워지자 도로에 딸과 같은 교복을 입을 아이들이 넘쳐 났다. 길이 복잡한 탓에 등하교 안전을 위해 자원봉사하시는 어르신들이 보행자 신호에 맞춰 아이들을 길의 이쪽과 저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딸의 학교는 그 차도로부터 더 들어간, 완만한 경사도를 가진 이면도로 안쪽,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정문을 지나서도 가파른 경사의 진입로를 좀 올라야 비로소 운동장과 교사가 보인다. 딸은 그 진입로의 끝과 맞닿은 운동장 한 편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차를 발견하고 친구들을 뒤로하고 돌아서면서 큰 소리로 자신의 전화번호를 불러줬다. 친구들은 그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라고 했다.
그렇게 딱,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보름이 흘렀다. 그 사이, 딸이 조르고 졸라 결국 수학 학원을 보내줬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찐따” 콘셉트는 진즉에 종료 됐다. 그 사이, 이주 만에 병원을 갔다 왔고, 두 달 뒤에 오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제 깐에 살만해졌는지, 공부에 조바심을 낸다. 딸은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아무 학원에도 안 가고 집에 있는데, 그때 뭘 하면서도 초조해지는 모양이다. 그러지 말라고 했다. 갈 길이 멀다. 인생도, 공부도 평생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해야 될 걸 차근차근해나가면서 차곡차곡 쌓아가라고 했다. 수학 선행을 몇 회독을 했네, 과학 영재 친구는 미분을 만지작거린다는 말에 흔들리지 말라고 했다. 하나하나 천천히 네 것으로 단단히 붙들어 매서 실력으로 만들어 가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건강이 우선이라고 했다. 그러니 조바심 내지 말라고.
4월이 끝나기 전, 아내와 나는 평일 대낮에, 불륜 커플처럼 백양산으로 철쭉을 보러 가기로 했다. 간 김에 선암사도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그렇지. 진분홍은 우리 또래에 어울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