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17
빌라 화단은 세대 모두의 것이지만 실질적 주인은 3층 아주머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아주머니는 꽃의 큐레이터가 되어 매 봄마다 다른 꽃을 선보이신다. 요 몇 년 동안은 노란 수선화를 선보이며 우리에게 선명한 봄을 선물하셨다. 며칠 전 계단에서 만났을 때, 아내는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아주머니는 “아유, 뭐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뭐.”하며 겸연쩍어하셨지만, 좋아하시는 마음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수선화가 주인공으로 봄 무대를 수놓던 몇 해 동안, 그 전의 주인공들은 잊혔다. 아주머니가 다시 부를 때까지 그 꽃들은 이 작은 무대에 설 수 없다. 그런데 가끔, 사람이 부르지 않아도 오는 꽃이 있다. 4월 첫 주말, 아내의 커피를 사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건너편 집 화단 밑에 흔들리는 꽃이 보였다. 화단이 아니다. 그 꽃은 화단의 벽과 이면도로가 직각으로 맞닿은 그 작은 틈을 비집고 나와 흔들리고 있었다.
꽃양귀비다. 어느 해 날린 씨앗이 터를 잡은 모양이다. 네 송이가 그 가는 꽃대에 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한송이는 피어 있었고 세 송이는 아직 웅크리고 있었다. 화요일 아침, 작업실에 가는 길에 보니 네 송이 다 폈다. 꽃은 아침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급히, 대충 사진을 찍었다.
영국에선 11월이 되면 양귀비 배지를 단다. 영국 축구를 보는 팬들이라면 선수들의 가슴에 달린 그 꽃이 익숙할 것이다. 그 꽃엔 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고 전몰 용사를 추모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기원은 이렇다. 캐나다군의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존 매크레이 중령은 1915년 5월, 전사한 친구의 장례식을 치른 후 시 구절에 양귀비꽃이 등장하는 <플랑드르 들판에서 In Flanders Fields>라는 시를 썼다. 이 시에 감동받은 미국의 모이나 마이클 교수가 <우리는 신의를 지키리(We shall keep the faith)>라는 답시로 화답하며 전몰자를 추모하기 위해 양귀비꽃을 가슴에 달자고 제안했다. 그 약속이 백 년이 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양귀비꽃이 있다. 기억되고 기억하는 사람의 꽃이 있다. 결국 모든 꽃은 기억의 도구다. 기억의 단서이자 회상의 방아쇠다. 기억과 추억을 생산하고 저장시킨 뒤 어느 순간 다시 불러내는 도구다. 사람과 꽃이 다를 뿐, 누구에게나 자신을 기억시킬 꽃 하나쯤은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꼭 그래야만 한다. 평범한 인생의, 심지어 지리멸렬한 인생의 가장 사치스러운 소망은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살다가 끝끝내 그런 존재로 기억되며 죽는 것이다. 그 소망의 유일한 가능성은 가족에게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기억의 진술이며 회상의 나열이다. 영화 용어를 빌어 말하면, 아주 긴 플래시백인 것이다. 삶이 강렬했던 사람이라면, 다시 영화 대사를 빌어 와 말하면, 인생에 파도가 많았던 사람이라면 그만큼 기억의 꽃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것이다. 송이가 아닌 다발일 것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그 꽃의 이름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가난한 사람은 꽃과 축제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살기 바쁜 사람에겐 꽃놀이도, 축제도 남에 일이다. 봄에 무슨 꽃이 피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여름과 가을의 꽃을 알 리 없다. 서울이나 내륙 도시의 어느 가난한 이에겐 부산 경남에 흔하디 흔한 겨울 꽃 동백도 낯설 것이다. 제주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마주치는 야자수 나무처럼 그렇게 이국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렇게 가난하고 험한 삶을 산 사람은 살면서 부딪힌 꽃을 자기 꽃으로 삼을 것이다. 아픈 계절에 피었던 꽃을 자기 꽃으로 삼을 것이다. 계절에 맞춰 천지사방에 흔하게 폈던 그 꽃을 특별한 자신의 꽃으로 삼을 것이다.
아내가 집에 꽃을 들인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몇 해 전부터 가끔씩 꽃을 배달시켜 꽂아 두기 시작했다. 산과 들에 피는 꽃, 공원에 지천인 꽃, 이웃집 화단에 핀 꽃은 남에 꽃이다. 집에 들인 꽃만 제 것이다. 아내가 집에 꽃을 들인 건 단순히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만은 아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일 것이다. 그러다 딸의 병과 함께 싸운 지난겨울엔 꽃을 들이지 않았다. 그저 집에 있던 안스리움 화분만 죽지 않게 돌봤다. 딸에게 빨간색이 잘 맞는다는 말에 몇 년 전에 들여놨던 그 화분을 더 정성껏 돌봤을 뿐이다.
3월의 마지막 날을 끌고 들어간 4월의 첫 주, 그 단 한 주 동안 딸은 많은 이야기를 학교에서 가져왔다. 딸은 태어나서 처음 학교에 가 본 꼬마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쉴 새 없이 말했다. 행복해 보였다. 그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딸이 이야기를 하기 전, 혹은 말과 말 사이, 아빠는 “오늘 힘들지 않았어?”, “컨디션은 어때?”라는 질문을 반복해 던졌다.
등교를 한 후 열흘쯤 지나자, 딸은 수학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다. 진도를 따라가기 벅차하지 않고 심지어 약간 앞서 있는 듯했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딸에겐 그 수준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심 끝에 보내주기로 했고, 딸과 같은 영어 학원에 다니는 수학 영재인 친구가 다니는 학원에 보내기로 했다. 딸은 어제, 그러니까 4월 9일, 수요일에 수학 학원이란 곳에 처음 발을 들였다. 그 학원에 가기 전, 과일과 베이글로 간단한 요기를 하는 딸을 보며 난 안절부절못했다.
병실에서도 수학 문제집을 풀고 스마트 폰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딸을 보며 그깟 수학 따위, 그깟 영어 따위는 때려치워라, 하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절대적 자산이었다. 타고난 머리와 끈기와 성실함으로 차곡차곡 쌓아온 그 아이의 실력이었다. 내가 그 나이 때 가져본 적 없는 아주 단단하고 날카로운, 그 아이가 세상과 싸워나갈 무기였다. 혼자 힘으로 오랫동안 그날을 벼려 온 무기였다. 그 무기를 대신할 수 있는, 그 무기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제시할 수 없는 아빠는 딸의 단련을 말릴 수 없었다.
요즘처럼 내가 싫었던 적이 없다. 돈이 없는 것을, 부유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다. 없는 게 워낙 많았던 어린 시절이었고 지금도 다들 내 나이 정도 되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의 대부분이 없다. 차도 없고 집도 내 것이 아니다. 학연도, 지연도 없고 그렇다고 혈연이 끈끈한 것도 아니다. 그 없음을 그저 팔자라 생각하고 능력 있는 아내 등에 업혀 살아왔다.
그러나 처음, 부자가 아닌 것에 대해, 그런 나 자신에 대해 속이 상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주체 못 할 정도로 돈이 많다면 아픈 자식을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 보내 세계 최고의 의료진에게 진료를 받았을 것이다. 딸은 현실과 상황, 형편에 맞게 부산에서 진료를 보고 치료를 받았다. 이것까진 참을 만하다. 오히려 직원인 아내 덕에 수월했던 것도 있으니 서류며 병원 절차 같은 데 무지한 내 입장에서 오히려 반길 만하다.
그러나 다른 건 마음에 걸린다. 정말 주체 못 할 정도로 돈이 많으면 그렇게 힘든 치료를 끝낸 딸을 이렇게 빨리 학교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회복되지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학구열이 다시 불타올랐다면 가정교사를 불렀을 것이다. 공부가 하기 싫다고 하면 그냥 놔뒀을 것이다. 한두 달 더 쉬다가 학교를 가서 적당히 머릿수나 채우다가 졸업하고 고등학교도 적당한데 보내거나 원한다면 과외 같은 걸로 공부시켜 검정고시를 시켰을지도 모른다.
요즘 대학이야, 명문대학, 소위 인 서울 아니면,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 아니면 원서만 내면 들어가니 들어가고 싶다면 아무 데나 들어가서 졸업이나 시켰을 것이다. 어차피 주체 못 할 돈이니 네가 써라. 그거나 관리하면서 건강관리나 하면서 평생 살아라. 그랬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씻고 교복을 입고 커다란 가방을 메고 여덟 시 전에 집을 나서, 그나마 한 달가량 휴직을 낸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교하는 딸을 보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딸은 무슨 꽃으로 날 기억할까. 그 꽃을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바람은, 그래서 사치스럽다. 염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망이다. 어느 꽃이 바람에 흔들리걸랑 아빠를 기억해 다오. 그것은 아빠 없이 더 많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 늦게 본 딸에게 바라는, 참으로 사치스럽고 염치없는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