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16
벚꽃을 처음 본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기숙사와 운동장은 강의동과 본관 건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 경사로는 7,80미터쯤, 1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한 채 오르다 왼쪽으로 90도 꺾이며 운동장의 가로 면을 끼고 다시 올라갔다. 그 오름 새를 4,50미터 유지하던 길은 다시 왼쪽으로 꺾여 운동장 반대편의 세로 면을 따라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운동장은 마치 쓰레받기처럼 움푹 들어간 모양새로 낮은 쪽은 입구를 향하여, 높은 쪽은 캠퍼스를 등지고 있었다.
이 운동장을 둘러싼 길 양쪽으로 벚나무가 심겼고, 벚나무와 운동장 사이의 빈 터에는 소나무가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소나무가 소나무인지는 기숙사에 짐을 갖다 놓던 2월 말에 단박에 알았지만, 벚나무가 벚나무인지는 4월이 돼서야 알았다. 꽃을 보고 알았다. 아, 이 꽃이 벚꽃이구나.
꽃이 날렸다. 꽃잎이 날렸다. 나를 비롯한 학우들은 그 꽃비를 맞으며 걸어 올라갔다. 꽃잎은 소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연분홍 웅덩이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 웅덩이에 빠지는 대신 종종 서툰 사랑에 빠지곤 했다. 봄이어서 그랬는지, 벚꽃 때문이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게 4월이면 다들 마음들이 설레곤 했었다. 그 설레는 마음을 유지시키려 했는지 5월의 축제가 우리를 기다렸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그 날리는 벚꽃을 보면서, 비 몇 번에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던 그 분홍꽃잎들을 보면서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꽃 같은 청춘이 꽃이 가는 걸 아쉬워할 리가 있나. 그 꽃에 눈길 줄 새도 없이 자신의 꽃을 피우기 위해 바쁘고 뜨겁게 살았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꽃이 지는 것도, 그 잎이 가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았겠지.
다시 벚꽃을 만난 건 20여 년 전, 부산에 와서다. 그렇게 몇 년을 봤는데, 벚꽃과 찍힌 사진은 딸과 함께 찍힌 사진부터다. 그전엔, 아내와 연애할 때는 꽃과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연애를 하는 사람이 한가롭게 꽃구경할 짬이 있나. 사랑엔 계절감이 없다. 계절과 상관없이 사랑은 마음에 꽃을 피운다. 꽃은 그저 지나갈 뿐이다.
결혼하고 나서도 벚꽃과 찍은 사진은 없다. 몇 년 후, 딸이 태어나고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딸을 데리고 함께 꽃을 보러 다녔다. 그 유명한 남천동의 벚꽃도, 원동의 매화도, 유엔묘지의 겹벚꽃도, 예술회관 앞의 별목련도, 다 딸이 태어난 이후에 발견됐고 봤다. 그전부터 살았던 동네였는데, 딸이 태어난 이후, 딸과 함께 꽃도 왔다.
봄꽃은 빨리 진다. 꽃들은 릴레이 하듯 자신의 짐을 다른 꽃의 피움과 연결하며 사라진다. 빨리 지는 꽃이 유독 사랑을 받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법 오래 버티는 장미와 능소화의 끈기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어쩌면 봄꽃만 편애를 받는 건지도. 겨울 내내 기다렸는데 오자마자 가려는 봄꽃을 보며 사람만 애가 탄다. 어르고 달래도 오자마자 갈 채비를 하고 앉자마자 엉덩이를 들썩이는 봄꽃을 보며 사람만 애가 탄다.
꽃놀이는 녹아가는 애간장을 달래기 위해 사람이 겨우 발명해 낸 궁여지책인지도 모른다. 눈에 담자. 인생의 이야기에 담자. 우리의 추억에 담자. 그리고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 사진에 담자. 올해 간 꽃이 내년에도 오는 걸 모를 리 없는 이들도 봄꽃 앞에서는 여유로울 수가 없다. 봄마다 애간장이 녹아 더 많이, 더 오래 꽃과 부대끼기 위해 살아 있을 때까지 꽃놀이를 간다.
목련은 그 꽃잎을 툭, 하고 자신의 발밑에 떨어트린다. 멈출 줄 모르는 봄바람도 그 무겁게 떨어지는 목련의 잎을 멀리 가져가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목련의 주검을 준비 없이 목격하여 그 죽음과 주검이 어디서부터 추락하여 여기에 이르게 됐는지, 그 기원을 쉽게 찾는다. 목련은 죽어서도 자신의 고향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동백도, 내가 좋아하는 능소화도 그런 꽃이다.
벚꽃은 날린다. 가벼운 잎은 아기의 연한 피부로도 감지할 수 없는 바람에도 쉽게 떨어져 날린다. 요란하게 온 동네 사람을 불러 모으며 난리를 치며 만개한 벚꽃은 질 때도 사람의 아쉬움을 밑천 삼아 멀리 간다. 사람은 머리에 떨어지는 꽃잎과 발에 밟히는 꽃잎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나무가 꽃잎을 떨어트리는지 멀리 있는 나무가 그러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까움을 정박시킬 수가 없다.
어느 한 대상에게 머무를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봄날의 풍경에 대한 마음으로 전이된다. 물리적으로 짧은 봄날은 이 마음으로 인해 더 찰나 같이 느껴진다. 물리적으로도 빨리 지는 봄꽃은 짧은 봄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듯하다. 그 사라짐을 견딜 수 없는 사람만 그저 안달이 나서 이 꽃으로 저 꽃으로 부잡스럽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다. 벚꽃 축제는 그 부잡스러움이 만들어내는 한바탕 소동, 봄날의 절정을 만드는 대소동에 불과하다.
일본인이 벚꽃을 좋아하는 것은 그 특유의 덧없음 때문이다. 꽤 오래전,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책 <도올 세설>에 등장하는 박경리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박경리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그들에겐 끈적거리는 신파와 순애보가 없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폭싹 속았수다>와 같은 드라마는 절대로 만들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시,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에게 있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감정이란 고작 “가냘픈 로맨티시즘”뿐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센티멘털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파서” 출구를 못 찾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문인들이 숱하다. 선생님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알만한 과거의 일본 작가들 중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꽤 있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이 대표적이다.
여하간, 일본인은 이런 가냘픈 정서를 여러 사물에 투사했고 식물로는 단연 벚꽃이었다. 삶의 찬란한 순간과 피할 수 없는 죽음, 사랑이 필 때의 화려함과 질 때의 속절없음의 대조는 벚꽃의 그 화려함과 흩날려지는 속성과 맞아떨어진다. 그래서일까, 가미가제 특공대는 벚꽃을 흔드는 이들에게 환송을 받고 그 벚꽃을 꽂고 출격했다. 일왕을 위해 비행기와 함께 청춘을 바지는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벚꽃의 최후와 닮았기 때문이다.
일본 영화를 봐도 그렇고 그들의 전쟁과 전투 행태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들에게 생명의 무게는 벚꽃잎처럼 가볍다. 대의가 있다면, 군주가 있다면 생명“쯤”은 언제든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나가 이기는 것 이상으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걸 명예롭게 생각했다. <남자들의 야마토>라는 영화 후반부를 보면, 살아 돌아온 병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 당한다. 당연히, 살아 돌아온 병사도 자신만 살아남은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꽃은 덧없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오늘 피었다 내일 지는 꽃이라도 속 깊이 아쉬울 필요도,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내년 이맘때면 다시 핀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표현을 쉽고 가볍게 쓰는지도. 다시 피는 꽃이기에 그렇게 무심히 그 덧없다는 표현을 쉽게 입에 올리는지도.
사람은 다르다. 오늘 본 사람을 내일 또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재회의 기쁨은 당연하지 않으며 가족으로 함께 사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않다. 생명은 유한하고 인연엔 기약이 없으며 인생은 모퉁이마다 괴물을 숨겨 놨다.
그 시절, 벚꽃의 바람비를 처음 맞던 시절, 그 분홍 가랑비에 젖으며 걷던 청춘 중 어느 누구도 이 청춘이 한 번 뿐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꽃이 지는 걸 아쉬워하면서도 우리의 청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올봄에 핀 꽃은 내년 봄에도 어김없이 그 자리, 그 나무에 핀다는 걸 알면서도 꽃이 지는 걸 아쉬워하던 우리는 청춘이라는 오직 한 번 피는 꽃이 다시 피지 못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난, 사람도 순순히 보내준 사람이었다. 응당 있어야 할 사람도 떠나고 돌아와야 할 사람도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십 대 시절 알았다. 떠남이 꼭 죽음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말 그대로 가족을 등지고 나간 사람이 몇 있었다. 그래서 훗날 연애를 할 때도 간다는 사람을 붙잡아 본 적이 없다. 혈육도 잡히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데 나와 연애를 하기 전까지 아무 인연이 없던 사람이 나와 새로 맺은, 인생 전체로 보면 한 줌 밖에 안 될 시간을 함께 한 그 인연을 버리고 간다는, 사람이 떠나는 걸 말릴 수도 잡을 수도 없었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됐다.
나이를 먹고 나서도, 더 훗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옆에 있는 사람의 부재함을 상상하곤 했다. 그 부재 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곤 했다. 그 상상 속엔, 그 질문 뒤엔 혼자된 내가 있었다. 사람의 공백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다. 그러나 딱 한 명, 그 사람의 부재를 상상한 적이 없던 사람이 있다. 딸이다. 딸이 태어난 후, 지금까지 딸의 “없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딸의 진단명이 나온 후, 어느 날 아내가 내게 했던 말도 같은 맥락이었다. “딸이 없이는 살 수 없으니 어떻게 하든 살려냅시다.”
딸의 종양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장기에 기생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전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말의 가능성 제거를 위해 항암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말의 가능성 안엔 존재의 부재함, 그 가능성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가 두려워했던 건 그 돌이킬 수 없는 부재함이었다. 사람은 죽으면 돌아오지 않는다.
벚꽃을 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청춘과 사랑의 덧없음을 떠올리지 마라. 그건 사치다. 잘못된 상징이고 그릇된 비유다. 삶의 숙명과 거룩함의 무게와, 또 신형철이 말했듯, 한 사람의 존재함을 위해 타자가 발명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인, 그 위대한 사랑을, 그것들의 그 숭고한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나 그것들을 벚꽃에 비유한다. 미처 그런 것을 생각해보지 못한 철없는 이들이나 그런 실수를 한다. 그 무게를, 그 가치를 견디지 못하는 민족이나 죽으러 가는 조종사에 벚꽃을 흔들어 배웅하고 그 꽃을 꽂아준다. 휴머니즘이 부재하는 그런 민족과 국민이나.
부산엔 이제 벚꽃이 한창이다. 경주는 며칠 더 기다려야 만개할 듯하다. 벚꽃의 개화를 앞두고 큰 산불이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사람의 죽음 앞에, 이웃의 죽음 앞에 축제는 취소되고 축소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산청의 이웃 동네인 합천은 벚꽃 마라톤 행사를 강행했는데, 원래 그런 곳이니 그러려니 이해해야 한다. 전두환을 기념하는 공원이 있는 동네 아닌가. 그가 앗아간 수많은 생명의 무게를 양심과 윤리의 저울로 달아본 적 없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시라. 벚꽃을 흔드는 일본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니.
지난주, 촬영 답사 차 경주에 갔을 때, 많은 청춘들이 <더 K 호텔> 앞 인도에서 <황룡원>을 배경 삼아 벚꽃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직 만개하기 전인데도 벚꽃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그 밑에서 사진을 찍는 청춘남녀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벚꽃의 만개를 앞두고 부산을 비롯한 진해, 경주 등 경남, 경북 각지의 벚꽃 축제는 취소되거나 축소됐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축제가 축소되고 취소됐다고 아쉬워 마시라. 벚꽃은 그저 봄날의 불꽃놀이일 뿐이다. 꽃은 내년에도 핀다. 계절은 가면 온다. 다만 지나간 청춘만 다시 오지 않을 뿐이다. 그저 사람만 가서 오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오늘 눈에, 마음에 담을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나와 가장 가까운 그 사람뿐이다. 나에 존재함을 위해, 나에 생명을 위해, 내 삶의 의미를 위해, 오직 날 위해 사랑을 발명해 준 그 사람뿐이다.
커버 사진은 2022년 4월 4일,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박경리 선생님은 저 인터뷰에서 나쯔메 소세키를 표절 작가라고 평가절하하셨다. 찾아보니, 대표적인 표절 의심작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있다. 이 소설은 에른스트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르의 인생관>과 유사하다고 한다. 두 작가와 소설, 모두 관심 밖이라 난 그 표절 유무를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런 논쟁이 있다는 사실만 알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