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14
노랑은 분열적이다. 만날 수 없는 간극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노랑은 용접공의 불꽃이다. 녹아내리는 쇳물이다. 가벼운 풍선이고 노을의 끝자락이다. 노랑은 이미지의 선두이며 끝이다. 덮쳐오는 강렬함이며 떠나가는 아쉬움이다.
생각보다 수선화는 일찍 핀다. 수선화를 좋아하시는 우리 빌라의 3층 아주머니 덕분에 봄마다 수선화를 본다. 시골에 전원주택이 한 채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가져오시는 모양이다. 아주머니가 심기 전에는 앞집의 화단에서 수선화를 봤다. 주인 어른이 아마 팔순은 넘지 않을까. 95 사이즈 남자 재킷의 등판만 한 작은 화단에 수선화를 옹기종기 심으신다. 몇 해 전부터, 이 두 어른이 봄의 조짐을 알리고 있다. 봄이 올라치면 녹색 줄기 몇 개를 창끝처럼 툭툭 심어 놓는다. 그 창끝에서 노란색 수선화가 핀다. 어느 해는 그냥 수선화, 어느 해는 나팔수선화. 색은 언제나 노랑.
어르신들이 노란색 수선화를 심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선명한 용트림, 봄날의 하늘을 향한 거침없는 노랑, 그 한 획의 힘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노랑은 그 자체로 생명력인 것이다. 봄날, 수선화의 노랑은 유치원생의 원복 색을 닮았다. 막 나온 통학버스의 노란색도 닮았다. 그 노란색은 세상과의 다름을 웅변하며 구별되어 존재한다. 아니, 구별되어 존재하고픈 이들에게 선택되는 색이 노란색일지도.
노랑은 부드럽고 강하다. 같은 색 유니폼을 입는 스웨덴과 브라질의 축구처럼. 두 나라는 같은 색 유니폼을 입지만, 요즘말로 하면, 축구의 “추구미”는 다르다. 스웨덴은 힘과 높이, 탄탄함으로 승부한다. 브라질은 유연함과 창의력, 부드러움으로 승부한다. 두 스타일은 하나의 노랑과 어울린다. 노랑은 힘이자 부드러움이며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이다. 단단하면서 연약하며, 육중하면서 가벼우며, 파괴적이면서 날카롭다.
이런 이유로 노랑은 전의를 불태우는 색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산 윈드브레이커는 노트르담 대학교의, 네이비와 진한 노란색이 어우러진 것이었다. LA 레이커스의 유니폼도 노란색이며 분데스리가의 도르트문트도 노란색이다. 오레곤 대학교와 텍사스의 베일러 대학교, 노스다코타 주립대학교의 미식축구 팀과 피츠버스 스틸러스의 유니폼 색도 노란색이다. 미식축구 팀 중에선 부분적으로 노란색을 사용한 팀은 대학교와 프로를 막론하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십 개는 될 것이다. 한국의 팀 중 가장 핫한 노란색 팀은 광주 FC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소속됐던 축구 동호회의 유니폼도 노란색의 검은색 줄무늬였다. 당연히 양말도 노란색이었고.
노란색의 강렬함은 화가들에게 사랑받았다. 고흐의 노란색 사랑은 유명하다. <해바라기> 시리즈부터 <밤의 카페테라스>, <의자>, <아를의 방>, <밀밭> 시리즈까지. 그는 노란색의 경계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노란색도 강렬하다. 그의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에서는 교황의 울부짖는 얼굴 위로, 그리고 그의 의자로부터 노란색이 서치라이트처럼 뿜어져 나온다. 이와 비슷하게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있는 사람 연구>에서도 육체와 그를 둘러싼 설명할 수 없는 테두리에서 노란빛이 솟아나고 진한 노란색 바탕이 그 무대를 받쳐준다. <투우연구> 시리즈에서의 노란색은 흐트러짐 없이 침잠되어 있다.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랑은, 다시 말하지만, 분열적이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끝 모를 침잠을 동시에 표현한다. 수면의 윤슬과 심해의 막막함을 하나의 색이 다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노랑은 전자에 치우친다. 봄날의 노랑은 우리에게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웅변한다. 그래서 노랑은 봄의 것으로 보인다. 민들레가 소박하게 얼굴을 내밀면 서로의 모양과 색을 닮은 개나리, 영춘화는 담을 따라, 때론 담을 넘어 봄의 성벽을 만든다. 앞서 말한 수선화는 매화의 뒤를 이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골목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찬바람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황매화는 봄의 절정인 4월을 물들인다.
봄날의 노랑은 경쾌하다. 브라질의 축구처럼, 호나우딩요의 경쾌한 드리블과 카를로스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아한 곡선의 프리킥처럼 겨울에 주눅 들어 있는 인간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깨운다. 지금은 춤을 출 시간이다. 지금은 노래할 시간이다. 지금은 유재석의 어설픈 삼바 스텝을 밟으며 걸어도 용서가 되는 시간이다. 내가 점령한 거리에 봄이라는 해방의 물결이 너를 녹이러 몰아닥칠 것이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저 노란 물결에 휩쓸리어 가라. 얼고 굳은 근육과 뼈마디에 노란 기운을 불어넣어라. 그제야 너에 겨울잠은 끝날 것이다. 그렇게 노랑은 겨울에 잠들었던 세상과 사람을 흔들어 깨운 뒤, 도시와 집과 산의 봄을 한껏 장식한 뒤 다른 색에게 다음 계절을 양보하고 떠난다.
그러나 가을에도 노랑은 온다. 여전히 같은 느낌인가. 가을의 노랑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봤자 흔하디 흔한 국화 아닌가. 어느 축제에 가도 볼 수 있는, 히트곡이 두세 곡 밖에 없는 그렇고 그런 트로트 가수 같은, 장미와 함께 여기저기 축제에 불려 다니는 그런 노랑이고 그런 국화 아니던가. 가을의 노랑에게 무슨 감흥이 있던가. 그렇게 생각했다.
몇 해 전이었다. 11월이었던가, 감독과 난 태화강국가정원의 가을 캠페인 촬영을 하고 있었다. 해는 이미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간 지 한참 됐다. 네 시쯤이면 해는 영남알프스 정상을 넘어갈 것이다. 우리는 조바심을 내며 마지막 컷 촬영을 위해 넓디넓은 국화 정원으로 이동했다. 초승달 모양으로 조성된 국화 정원에서 촬영을 하는 동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의 빛 대신, 그 빛의 기운이 노란 국화 정원에 머무는 동안 노랑은 홀로 서 있는 느티나무와, 막 물들기 시작한 노을과 만나 우울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노랑은 프랜시스 베이컨과 고흐의 노랑이었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가을의 노랑은 노을의 끝자락이었다. 산도, 강도 그 색을 막 잃어가는 순간, 노랑은 낮과 저녁의 경계에서 어둠과 투쟁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환희와 우울을, 삶의 희망과 절망을, 삶의 애착과 덧없음을 몇 번이나 반복되는 그 심리적 경계에 노랑이 버티고 서 있었다. 더 밝은 쪽으로 밀어붙이면 봄이고 조금 더 물러나면 늦가을이다. 더 밀어붙이면 낮이고 물러나면 밤이다. 노랑은 사람이 키는 인공의 불빛과는 달리, 밤이 오는 것이 두려워 어스름해져 사물의 경계와 윤곽이 흐려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황급히 켜곤 하는 그 잡스런 불빛과는 달리, 묵묵히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보이는 색으로서, 그 맡은 바 일을 하고 있었다.
노랑은 그렇게 스스로 경계가 되어 이쪽과 저쪽을 나눈다. 이 길과 저 길, 진행과 멈춤, 밝음과 어둠, 낮과 밤, 희망과 절망, 질서와 분열, 우울과 환희, 침잠과 분출, 그 양극단의 중간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노랑의 해석은 각자에게 있다.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산뜻하고 날아갈 듯 한 기분이라면 당신의 노랑은 이쪽에 있다. 반면 노란색 쓴 물이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라면 노랑은 저쪽에 있다. 베이컨의 형상이 그러하듯, 그 형상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이 그러하듯,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찰나의 순간 경계를 넘는다. 우리가 어디에 머물렀었는지 아는 것은 훨씬 뒤의 일이리라. 머무르는 동안 우리가 세계에 어떤 빛을 발광(發光)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것 또한.
계획됐던 딸의 항암치료는 끝났다. 앞으로의 치료 계획은 아직 듣기 전이다. 월요일, 마지막 항암주사를 맞았다. 이날, 혹시 몰라 방사선 촬영도 했다. 난 울산에 있었다. 일찍 미팅이 끝나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집에 오니 딸이 울고 있었다. 먹던 저녁은 멈춰 있었다. 아내가 말하길 딸의 팔다리가 저려 온다고 했다. 딸은 처음 겪는 느낌에 놀라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들고 다니는 가방과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놓고, 거실에 깔아 놓은 두툼한 요가 매트에 딸을 앉히고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이 곧게 펴지지가 않았다. 계속 주물렀다. 딸은 놀라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내게 안아달라고 했다. 안아줬다. 구토 같은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치밀어 올랐다. 꾹 참아 내렸다.
딸을 좀 진정시킨 후, 콜라라도 마실래, 하고 물었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가까운 편의점으로 뛰어가 콜라를 사 왔다. 여러 번 나갔던 마라톤 대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프나 풀코스를 뛴 사람이 결승선을 통과해 기력을 못 찾을 때, 콜라와 같은 음료를 마셨다. 실제로 사막에서 진행되는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서도 콜라는 구급약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기억을 바탕으로, 딸도 기력이 없으니 콜라라도 마시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것이다.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사이 아내는 응급실에 전화해 PA와 통화를 했다. PA는 결정 권한이 없었다. 항암주사의 후유증으로 팔다리가 저린 소녀를 입원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부모들이 열심히 주무르고 달래서 회복시켜야 하는지, 그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렇게 환자 보호자와 PA 간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딸은 서서히 진정되어 갔다. 혈압이 올라갔고 심박 수가 높아졌다. 다들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코파이 먹을래, 하고 물었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코파이를 까서 줬다. 딸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뭐가 좀 들어가자 몸이 활발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딸의 볼에 연한 홍조가 돌아왔다. 자신의 떨리는 손을 두고 농담도 했다.
딸이 진정되어 두 개의 초코파이를 먹고 잠시 스마트 폰으로 영어 공부를 하는 동안 아내는 늦은 저녁을, 난 사 갖고 온 맥주를 마셨다. 아내가 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당신이 평소보다 일찍 와서 다행이야. 제가 저러면, 어떻게 될까 봐, 사실 나 너무 무서워.”하고 말했다. 난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나도 겁이 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터져 나오는 눈물도, 할 수 없는 말도 맥주에 쓸려 내려 보냈다.
열두 살의 나이에 희망과 절망, 고통과 치유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면서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왔다. 올봄, 꽃은 늦다. 수선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울산 시청 앞, 산수유는 겨우 고개를 내밀었던데, 수선화는 아직이다. 2022년, 수선화는 3월 20일쯤 만개했다. 그 전해에는 더 빨라서 2월 말에 볼 수 있었다. 올봄은 유독 꽃이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