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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처럼 봄은 온다.

딸과 함께 꽃을 보내 12 - 매화

by 최영훈

계절의 돌이킬 수 없는 경계

3월과 12월은 소속이 분명하다. 반면 2월과 11월은 개와 늑대의 시간을 닮았다. 이 달을 내 것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계절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두 달을 좋아했다. 평택에 살던 시절, 텅 빈 논을 볼 수 있을 때는 이때뿐이었다. 2월엔 다가올 계절동안 겪을 모든 변화와 사건을 땅 밑에 결연히 감추고 있는 비장함이, 11월엔 그 변화와 사건 끝에 수확한 모든 것을 털어낸 뒤의 미련 없는 쓸쓸함이, 그 두 달의 벌판에 각각 있었다.


일 년 중 대부분 달의 분명한 소속감에도 불구하고, 계절과 계절은 영화의 오버랩처럼 맞물린다. 봄의 열기는 여름과, 여름의 물러감은 가을과, 가을의 물러감은 겨울과 겹친다. 반면 겨울과 봄은 그렇지 않다. 꽃이 피어버리면 겨울은 더 버틸 재간이 없다. 어제까지의 겨울은 느닷없이 봄에게 밀려난다. 꽃샘추위라는 말은 맞다. 예고 없이 가차 없이 몰아내기에 겨울은 샘을 부릴 수밖에 없다. 십여 년에 한 번씩 울산과 부산에도 3월에 눈이 내리고 다른 지역에선 이런 일이 더 흔하지만, 그런 눈 따위로 겨울이 버틸 수는 없다. 이미 꽃이 핀 이상 계절은 돌이킬 수 없다.


다들 기준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봄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는 그런 기준이 저마다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의정부에 살 때는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가 더 이상 얼지 않을 때, 그때부터 봄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평택에 살던 이십 대 시절에는 한 해 농사를 위해 말라 있던 논을 트랙터가 갈아엎는 풍경이 보이면, 그때부터 봄이었다. 벼를 다 베어낸 휑한 벌판을 무대 삼아 겨울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교회 후배네 집의 너른 마당에 고추를 널어 말리기 시작하면 가을이었고 감나무에 달린 마지막 감마저 사라지면 겨울이 도착했다.

부산의,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계절이 더 극적이고 화려하게 온다. 겨울에도 동백꽃이 찬연하게 빛나는 곳 아닌가. 2월 말, 매화가 스타트를 끊으면 3,4월은 목련과 벚꽃, 수선화와 철쭉, 개나리, 라일락이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박물관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딸의 표현을 빌리면, 스노윙 치즈를 닮은 이팝나무의 흰 꽃과 뒷산의 연보라색 오동나무 꽃, 그리고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담장을 빨갛게 물들이는 장미가 5월과 6월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봄과 여름의 손을 슬며시 맞잡게 하면, 장마가 다가올 때쯤엔 앞집의 능소화가 여름을 무대 전면으로 올려 세우고 차분한 수국이 장마철의 비를 맞으며 그 곁에 선다. 그 뒤를 무궁화과 접시꽃, 박물관 뜰의 배롱나무가 이어받는다. 가을 내내 백접초와 홍접초가 버티고 10월 말이면 딸의 통학로와 내가 자주 가는 슈퍼마켓 앞에 큼직하게 서 있는 은목서와 금목서가 묘하게 다른 매력을 가진 향으로 가던 사람을 붙잡는다.


봄의 신호탄

계절은 이렇게 이 꽃과 저 꽃을 줄지어 세우며 파도처럼 몰려왔다 물러간다. 그렇게 계절이 쉴 새 없이 바뀌는 동안 꽃도 피고 지고 사라지기에 어떤 꽃이 피면 이 계절이라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겐 확실한 봄의 신호탄이 있다.

앞서 다른 글에 소개했던 바다채송화가 피어 있던 빨간 벽돌집은 같은 모양의 세 채의 집 중 가운데 집이다. 첫 번째 집은 특이하게도 작은 마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아치형의 지지대를 설치해서 샤인 머스캣과 색깔이 똑같은 포도를 키운다. 두 번째 집 화단엔 바다 채송화와 술붓꽃을 키웠지만 요즘엔 수선화를 키운다. 세 번째 집은 커다란 김장용 고무 들통에 빼빼 마른나무 하나를, 그야말로 꽂아놓고 있다. 처음 이사 왔을 땐 죽은 나무인 줄 알았다. 영락없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나무에 꽃이 폈다. 아직 2월 말인데, 여전히 추운데, 하얀 꽃이 듬성듬성 폈다. 매화다.


확언컨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빨리 피는 매화다. 우리 동네 최고의 매화는 유엔 묘지 후문에 있는 것인데, 딸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 거의 매년 봄,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그 바로 옆에 있는 은은한 분홍색의 모과꽃과 함께 푸짐하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매화나무는 이른 봄의 전령사 역할을 자처한다. 이 동네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말이다. 그러나 최소한 나에겐 이 빼빼 마른, 고무 들통 밖으로 그 뿌리를 더 뻗어나가지도 못하는 작은 매화나무가 봄의 전령사다.

마라톤 전쟁의 그 고독한 전령처럼, 그 나무는 겨울을 혼자 가로지른다. 이웃한 나무도, 풀도, 바람을 막아줄 언덕도 없다. 고무 들통이 서 있는 좁은 골목을 오가는 수십 대의 자동차도, 맥주를 사기 위해 점퍼를 대충 입고 종종걸음으로 편의점으로 향하는 나같은 이웃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 같이, 봄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걸 아는 사람조차 그 존재를 잊을 때가 가끔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가끔은, 올 겨울엔 죽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겨울을 버티는 매실나무는 생명의 징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관청이 관리하는 가로수들이 짚과 천으로 만든 담요로 보호받으며 간신히, 근근이 겨울을 버티는 동안에도 살려 달라고 외치지 않는다. SOS, 구조신호를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는다. 그렇게 버티다, 아직 봄은 멀었지, 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겨울 외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2월의 끝, 어느 날, 팝콘을 터뜨리듯 툭하고 꽃을 터뜨린다.

올해는 2월 중순부터, 이 나무 앞을 오가며 꽃눈을 지켜봤다. 조금씩 꽃을 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야, 너 죽은 줄 알았다. 한마디 건넸다.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가지와 그 색이 구분이 안 가던 꽃눈은 점점 흰색에 가까워졌다. 그러다 며칠 전 가보니 한송이가 터져 나왔다. 저 작은 곳에 나왔다면 “펑”이나 “팡” 같은, 전자레인지에서 팝콘이 터질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게 정상 아닐까?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

일요일 오전이었다. 오후엔 마지막 4차 항암치료의 입원 주간을 위한 입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까지 느긋한 오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가 바닐라 라테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너도 뭐 마실래, 하고 물으니 딸은 로열 밀크티를 사다 달라고 했다. 집을 나서자 매화 생각이 났다. 가서 보니 그렇게 한송이 터져 나와 있었다. 하얗고 건강하게 “폭”하고. “올해는 지각이다.”하고 한마디 해줬다. 다른 아이들도 힘껏 용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병원에서 밤을 보내고 집에 잠시 쉬러 오면, 화요일이나 수요일이면 너희들도 다들 피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을 보냈다.


광안대교의 이쪽과 저쪽

그렇게 봄은 매화와 함께 거짓말처럼 왔다. 그 한송이가 피어난 날, 오후, 우리 식구는 부경대학교 앞에서 꽤 오랫동안 버티며 영업을 하고 있는 <하코네>라는 라멘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세시쯤, 부경대학교 주차장을 빠져나와 병원을 향했다. 흐린 날씨에 상관없이, 연휴를 맞아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광안대교의 양방향의 차들은 느리게 움직였다. 광안대교 하층부의 왼쪽으로 광안리 해수욕장이, 오른쪽으로 수평선을 경계 삼아 잔잔히 흔들리는 부산 앞바다가 보였다.


광안대교 상층부의 차량은 울산이나 해운대 쪽에서 부산의 도심, 더 나아가 서부산, 멀게는 경남의 서부로 향하는 이들이다. 이때라면, 어쩌면 양산의 원동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우리 동네 매화가 이제 겨우 한송이를 밀어냈다면 그곳의 매화 군락지에서도 꽃구경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그런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흐린 날씨까지 무릅쓰고 사람들은 일단 차에 올라탄 모양이다. 하층부의 차들은 부산의 도심과 서부, 서부 경남 방향에서 와서 부산의 남동쪽, 멀게는 울산이나 경주, 더 멀게는 강원도로 간다. 우린 그 하층부의 대열 속에서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꽃과의 실랑이

어느 해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사진도 없다. 딸이 네 살인가 다섯 살 때였나, 딸과 함께 기차를 타고 양산 원동에 간 적이 있다. 매화가 물러가기 직전이었지 아마. 기차를 타보고 싶다는 딸과 함께 단 둘이 당일치기 나들이를 갔었다. 아내는 그 주말에 학회인가 세미나인가가 있었다. 우리는 부전역에서 기차를 탔다. 타기 전, 부전 시장 앞에 있는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음료수와 군것질 거리를 샀다. 기차는 낙동강 하류를 끼고 갔기에, 딸은 산과 강을 정신없이 봤다. 꽃을 보고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고 그게 다였다. 매화 축제에 간 건 나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해 매화축제는 매화 없이 시작됐다. 앞서 말했듯이 늦은 추위에 매화가 조금 지각했기 때문이다. 지각도 사람의 입장일 뿐이고, 매화의 시간은 자연에 맞춰져 있다. 사람들이 이런 매화의 사정을 알 리 없고 매화 또한 사람들의 사정엔 관심이 없다. 계절의 밀고 당김에 몸을 맡긴 채 피고 질뿐이다. 그 나아감과 물러섬을, 그 오름과 내림을 안으로 느끼고 밖으로 꽃을 피울 뿐이다. 당연히 꽃에겐 기다리는 초조함도 물러가는 아쉬움도 없다. 언제나 사람만 난리다.


다들 정확하게 예측한다고들 수선을 피웠을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깜냥, 딱 그 수준에서 행한 것이어서 그 예측은 언제나 어긋남과 빗나감의 위험을 껴안고 있다. 그 어긋남과 빗나감의 폭이 하루나 이틀이면 괜찮은데 일주일, 열흘 씩 되곤 하다 보니 축제를 주최하는 지역이나 그 축제에 생계를 기대는 사람이나 매 계절마다 곤욕을 치른다. 이상기온이니, 해수 온도 상승이니 해서 잡히던 물고기가 안 잡히거나 나던 과일이 안 나는 건 그나마 낫다. 아예 축제를 포기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키우거나 다른 곳에서 가져오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나 꽃은 다르다. 매번 그 자리에서 피긴 피는데 날짜만 당겼다 늦췄다 하니 그야말로 사람 속을 태우는 것이다.


꽃과 봄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

꽃이 피는 그 순간은, 반복해 말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그 “펑”하고 터지는 순간을. 계절마다 그 시간의 선형적인 패턴이 있을 뿐, 그 시기와 찰나는 오롯이 꽃의 몫이다. 결국 사람의 예측은 예측에 불과하고 경험은 경험에 불과하다. 결국 오랜 기다림 끝에 꽃을 마주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최선의 행동은 만끽이다. 기다림보다도, 아쉬움보다도, 꽃이 사람에게 바라는 가장 큰 마음 역시 만끽이리라.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광안대교의 위, 아래를 꽉 채운 그 차량의 행렬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왜 그날, 딸의 첫 기차 여행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 찍었다면, 그 사진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그 소중한 순간들은 도대체....... 딸은 그날 즐거웠을까. 어쩌면 엄마가 없어서 서운했을지도. 이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했다.


항암치료를 위한 입원을 앞두고, 딸과 함께 라멘을 먹는 가족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딸은 심지어 그 전날, 그러니까 3월 1일엔, 초등학교 동창 남자 친구와 <미키 17>도 보고 왔다. 행여나 피곤하여 컨디션이 나빠질까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날부터 입고 갈 옷을 미리 코디네이션 해 놓고 다음 날 아침엔 엄마와 열심히 예매를 한 뒤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가서 보고 왔다. 이미 세 번을 겪어서인지, 아니면 원체 대범한 녀석인지 그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딸은 담담하게, 오히려 누구보다 더 신나게, 항암 치료를 위한 입원이 예정된 일요일을 코앞에 둔, 3월의 첫 토요일을 재미있게 보내고 왔다.


딸에 봄은 좀 늦게 올 것이라고 썼었다. 그러나 그건 어른의 생각이었다. 아이들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삶을 만끽하는 법을 알고 있다. 가진 에너지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을 누리는 법을 알고 있다. 웃고 싶을 때 웃고, 울어야 할 때 운다. 결국 사람의 예측은 예측에 불과하고 경험은 경험에 불과하다. 어른의 예측과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봄을 제대로 맞이하는 법을 아는 존재는 꽃과 아이뿐인지도. 터져 나오는 순간을 만끽하는 두 존재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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