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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다른, 꽃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0

by 최영훈

“사랑의 객관화는 사랑의 박제화의 길목이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들을 넘어서 존재한다.”, 이성복,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P.91


이팝나무, 그 길 너머

이팝나무에 쑥버무리처럼 꽃이 폈다. 더 멀리서 보면 딸이 좋아하는 톳두부무침과도 닮았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딸은 이 꽃을 볼 때마다 다른 걸 생각한다. 많은 걸 떠올리게 하는 흰 꽃을 얹은 이팝나무는 부산시립박물관 주차장을 둘러싸고 있다. 이 이팝나무의 대열을 왼쪽에 끼고 조금 더 가면 터널이 나오는데, 이 터널이 이고 있는 작은 공원은 부산문화예술회관과 부산시립박물관 사이에 비무장지대처럼 초록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터널을 막 나오면 유엔기념공원 정문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딸이 다니는 중학교가,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동명대학교가, 그 학교 옆으로 난 고갯길을 넘으면 이기대의 바다가 보인다.

봄에서 여름으로의 전환이 실력 좋은 DJ의 절묘한 두 곡의 맞물림처럼 이음새 없이 이뤄지듯, 부산의 풍경 또한 그렇다. 도시의 끝은 산과 맞물리고 산자락의 끝과 고개 너머엔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낙동강은 다대포로 무리 없이 이어지고 수영강은 광안리로 경계 없이 흐른다. 해운대를 지나 7번 국도를 타고 북상을 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송정, 일광, 진하 등의 해수욕장들도 작은 하천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지점을 한 곳씩 갖고 있다. 동남해에서 태화강을 거쳐 울산의 중심부로도 들어갈 수 있다.


사람만 도시와 숲, 도로와 산, 강과 바다의 경계를 애써 구분하려 한다. 땅에 선을 그어 내 땅과 네 땅을 구분하듯이 자연에도 그리해야 속이 편한 것이다. 자연은 그 경계를 모른다. 그야말로 물이 흐르듯 바람의 세기와 온도와 비와 달과 태양의 가까움과 멂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며 성장할 뿐이다. 사람만 그 변화와 멂과 가까움에 이름을 붙이려 한다. 그리해야 속이 편한 것이다. 그리해야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사람의 속내에 관심이 없다.


다른 꽃들

꽃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저마다의 다름이 보였다. 딸과 함께 낮게 핀 꽃부터 높게 핀 꽃까지, 봄에서 겨울까지, 들과 바다와 산과 동네를 다니며, 여러 때 여러 곳에서 다양한 꽃과 만나면서 그 꽃의 다름에 놀라곤 했다. 우린 그 꽃을 때론 멀리서 때론 가깝게 보면서 그 보는 거리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꽃의 모습에도 놀랐다.

특이하게 생겼거나 범상치 않게 피는 꽃들이 있다. 이맘때 피는 흰금강초롱은 그야말로 초롱을 닮았다. 딸이 그 이름을 들은 뒤 초롱이 뭔지 물어서 설명해 준 적이 있다. 나중에 박물관에서 실제로 초롱을 본 딸은 그 닮음에 놀랐다.


오동나무꽃은 특이하게 핀다. 멀리서 보면 꽃이 나무에 우연히 달라붙은 것 같다. 샹들리에의 작은 잔을 닮은 유리등처럼 가지 끝에 붙어 있다. 마로니에꽃은 거꾸로 피어 있는 것 같다. 뭔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듯 보인다. 포도와 같은, 꽃과 열매가 무리 지어 붙어 있는 송이들의 꼭짓점이 지면을 향하는데 반해, 마로니에꽃은 그 점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


뜨거운 여름의 말미에 선을 보이는 꽃무릇도 모양이 범상치 않다. 이 꽃을 모르는 사람도 보는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게 꽃인가. 잎은 어디 있나. 다가가서 보면 해파리 같기도 하고 인공조명 시설 같기도 하다. 밤이 되면 어쩐이 그 꽃의 끝에서 작은 불이 들어올 것 같다. 사람이 보지 않을 때면 말미잘처럼 꽃의 끝이 꿈틀거리며 공중에 떠다니는 벌레를 잡아먹을 것만 같다.


딸은 이런 꽃들을 나와 함께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이팝나무를 보곤 잘게 썰린 치즈 같다고도 했고 술붓꽃을 보곤 괴물의 입 같다고도 했다. 평화공원에 있는, 작은 진보라색 꽃이 나무에 달라붙어 있는 캐나다박태기나무의 꽃을 보곤 멍게 같다고도 했다. 배롱나무를 볼 때마다 우리 부녀는 혹시 죽지는 않은 건지 걱정하곤 했다. 딸은 도사의 지팡이 같다고도 했다. 입도 나무껍질도 없이 봄과 겨울을 나는 그 모양새를 보면 우리의 걱정과 딸의 상상이 무리도 아니다.


이름 붙이기

특이하게 생긴 꽃과 나무를 보면 누가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해진다. 학술명이야 그걸 발견한 학자가 지었을 테지만 금강초롱을 처음 보고 그 꽃의 이름을 그리 지은 사람은 누굴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아마 꽃이 먼저 있고 그 꽃의 모양을 따라 불을 담아 길을 밝히는 휴대용 조명 기구를 만든 뒤, 그 사물에 초롱이라 이름을 먼저 붙였을 것이다. 그다음에 그 사물의 이름을 역으로 꽃에 갖다 붙이지 않았을까. 대부분의 동물과 식물은, 그리고 산과 강과 바다는 사람이 지구에 오기 전부터 있었고, 이곳에 살기 전부터 있던 것이니 이러한 상상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말했듯이, 범주는 상상력의 소관이고, 상상력은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주어진 언어와 이미지로부터 발현한다. 스티브 잡스가 30여 년 전 한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상상력이라는 것은 개념과 개념, 이미지와 이미지, 사물과 사물의 연결 속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붙인 나무와 꽃의 이름, 그 모든 작명은 이성의 소관에 불과하다. 꽃의 이름 또한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다. 개는 자신의 이름이 개인 줄 모른다.


꽃들은 저마다 다르게 생겼다. 이 다름을 감지하는 능력은 앎에서 나온다. 범주화의 능력이, 상상력의 근원이 이성인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꽃을 모르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꽃을 좋아하는 사람, 꽃을 재배하는 사람과 식물 학자의 이 다름을 보는 능력은 차이가 있다. 관심의 차이, 지식의 차이, 꽃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꽃의 다름의 판별 능력은, 그 능력을 통해 보이는 다름의 차이, 그 차이의 간격은 미세해진다. 결국 이 차이의 미세함을 간파하는 능력은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 지식에 근거한다.


같은 글, 다른 판단

중학생이 된 딸은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독서량이 너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며 독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와 다 읽지 못한 채 반납한 딸에게 집에 있는 걸 건네며 꾹 참고 150페이지까지 읽으면 극적인 반전에 깜짝 놀랄 것이라며 완독을 독려했다. 독려를 하면서도 내심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 아닌 의심을 했다. 그러나 딸은 며칠 만에 다 읽었고 다 읽어낸 딸과 함께 그 책에 담긴 삶과 사람의 의미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후, 딸은 이 책의 독서록을 썼다. 학교에선 독서와 독서록 제출을 장려했고 독서록을 제출하면 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고교 입시에 도움이 되기에 잘 쓰려고 작심한 듯했다. A4 용지 한 장 정도의 분량으로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나한텐 선뜻 보여주는 걸 망설였던 딸은 엄마에겐 흔쾌히 보여줬다. 아내는 제법 긴 시간, 진지하게 읽어나갔다. 이후 서평의 평을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른이 쓴 서평을 여기저기서 가져와 짜깁기한 것 같다.
학교에서 배우고 제시한 독서록의 틀이 있을 텐데, 그걸 지키지 않은 것 같다.


딸의 반박은 이랬다.

난 평범하게 쓰고 싶지 않다.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 쓰는 건 더 싫다.
내가 진학을 원하는 국제고나 외고에 가기 위해선 “평범” 이상의 글쓰기 실력이 필요하다.
지금부터 그걸 연습해야만 한다.


아내는 딸의 말에도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고, 엄마의 말에 서운함과 억울함을 동시에 느낀 딸의 눈엔 눈물이 그렁거렸다. 줘보라고 했다. 딸에게 받아 읽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쓴 것이라고 보기엔 수준이 높았다. 단어의 선택도 문장의 구성도 글의 구성도 그랬다. 상투적이지 않았고 전형적이지 않았다. 아내의 평이 이해가 갔다.


내 의견을 말할 차례였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개했다. 아빠는 요즘 가장 쉬운 단어로 간결한 문장을 구성하여 내 생각과 감정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사람마다 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난이도가 상이한 단어들의 모음을 갖고 있는데 네가 쓰려는 글을 누가 읽을지 염두에 두고 그 단어를 잘 골라야 한다. 그런 연습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약간은 일부러 어려운 단어를 골라, 어려운 문장을 구성하여 글을 전개한 독서록의 감상평 아닌 감상평을 전했다.


함께 본 글

그 후 맞은 주말, 아내는 문화센터에 발레를 하러 갔고 딸과 난 집에 있었던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 오전, 딸에게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에 실린 글 하나를 보여줬다. <동숭동 시절의 추억>이라는 글이었다. 그중 한 문장과 한 단락을 연이어 읽게 했다.


“그런 것들은 이제 없다. 그때 내가 그러리라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지금 거기로부터 너무 떠나와 어느새 사십 대 중반에 와 있는 나는 그때의 나를 찾을 수가 없다.(P.46)”


“지금부터 20여 년 전 나는 거기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선생님들과 직장에서 중견이 된 친구들과 사십 대 아주머니가 된 여학생들과....... 그때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만나면 알아볼까. 그때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 같은 사람일까.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사이 죽음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우리가 죽어갔던가. 그토록 많은 죽음에 우리는 잠시라도 애도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 새하얀 죽음의 눈밭에 묻혀 가는가. 그때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애도하지 못한다면, 지금이라도 애도해야 할 것인가.(P.51)”


딸은 이 뒤로도 더 이어진 마지막 문단의 끝까지 읽었다. 읽은 후 이 문장과 문단을 왜 읽게 했는지 이해한다는 얼굴로 날 봤다. 어려운 단어도 없다. 사십 대 중반이 된 시인이 스무 살의 자신과 일 년의 시간을 보낸 서울대학교 문리대가 있었던 동숭동 캠퍼스와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문학을 논하고 온갖 객기를 함께 부렸던 선후배와 자신의 문학의 세계로 인도해 줬던 스승을 회상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돌이켜보니 놀랍기만 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달라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차이와 간극의 발견 속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 모든 것들이 저 담담한 표현에, 그리고 같은 운율의 문장 반복을 통한 연쇄법으로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딸도 그걸 읽어냈다.


파인딩 포레스터, 다름을 알아보는 능력

사람이 가진 재능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재주만 있지만 어떤 사람은 여러 재주가 있다. 가진 재주를 표현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다. 재능 또한 타인과의 다름이지만 그 표현 또한 다름이다. 딸은 자신에게 여러 다른 재능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인지를 통해 자신의 다름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다름을 바탕으로 다른 미래를 그리고 있다. 관건은 그 다름을 세상에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다. 어떤 표현은 또래와 학교의 통념과 상식을 벗어날 수도 있고 아내와 같이 보수적인 사람에겐 예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어쩌면 딸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의 주인공 소년이 감내해야만 했던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 농구 특기생으로 유명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작문 실력도 수준급이었던 한 흑인 소년이 감내해야만 했던 편견과 오해와 비슷한 일을 말이다. 독서록을 두고 엄마와 벌였던 작은 실랑이처럼 수준 이상의 것을 학교와 세상에 내놓은 뒤 그것이 자신의 재능에 기인한 결과물임을, 자신이 해낸 것임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하는 곤란함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딸은 그 도전 또한 받아들일지 모른다. 탁월함을 반복적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다름”을 자연스레 드러내 보일 것이다. 딸의 학교 친구들도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읽고 문제집을 푸는 딸을 수상한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5교시, 거의 대부분이 잠들어 있는 과학 시간에 홀로 깨어 선생님과 단 둘이 수업을 하기도 했다. 잠든 아이들을 강제로 깨울 수 없는 선생님들의 처지도 안쓰럽지만 그 처지를 당연시하며 교사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잠이 드는 아이들도 안쓰럽다. 아무리 시험을 안 보는 중학교 1학년이라 하더라도 학교와 교사가 그렇게 다른 공간, 다른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이런 애들 속에서,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지 간에, 딸은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고 그 존재의 위치를,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있다. 굳이 다른 아이들과 닮으려 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그들의 세계와 길이 있고 자신에겐 자신만의 세계와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태연하게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수행하고 있는 것일 테다.


살아 있는 존재의 진보

수학 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월반의 스케줄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학원에서 돌아온 딸이 월반에 대해 말했을 때 아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담당 실장에게 문자를 남겼고 다음 날 전화가 온 것이다. 아내의 미소엔 이유가 있다.


수학 학원을 보내달라는 딸의 말에 집 근처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학원을 알아본 아내는 딸과 같은 영어 학원에 다니는, 부산시의 수학 영재인 학생이 다니는 수학 학원을 딸과 함께 찾아갔다. 레벨 테스트를 한 후, 실장은 입학에 난색을 표했다. 현행만 잘하는 학생은 따라오기 어렵다는 것이 난색의 이유였다. 그런 실장 앞에서 아내는 당당하게 말했다. 똑똑한 애니 한 달만 시켜봐라. 그러면 어지간한 애들은 다 따라잡을 것이다. 여기 유명한 학원 아니냐. 그러면 실력 있는 학생을 받아야 되지 않냐.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아내의 장담은 현실이 됐고 실장과 상의 끝에 상반기엔 좀 더 내실을 다진 뒤 하반기에 수학 영재인 학생과 함께 고등학교 과정으로 월반하기로 합의를 봤다. 딸은 그 과정을 따라잡기 위해서 4월 한 달간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과 씨름했다.


지난 일요일, 딸은 거의 하루 종일 영어 공부를 했다. 다가오는 수요일에 있을 학원의 월말 레벨 테스트 준비를 위해서였다. 딸은 필요하면 하고 잘해야만 한다면 노력한다. 이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딸은 일찍 깨달았다. 나도 저 나이 때 그걸 알았다면 지금은 좀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빌려와 말하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던 나 자신을 죽였던 건가. 그 반복되는 죽임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된 것이겠지. 이렇게 후회라는 시체를 밟고 서 있는 내가.


반면, 딸은 계속 새로운 자신을 탄생시키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들이는 수고와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자신과 만날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의 미래에 대해 이미 그 가능성의 유통기한이 끝난 시체 같은 존재가 훈수를 둘 수는 없다. 그건 생명 앞에 선 박제의 살아있는 척에 불과하다. 뼈를 간신히 이어 붙인 화석이 유명한 박물관에서 가장 사랑받는 기분을 네가 아냐며, 살아서 꿈틀대는 공룡 앞에서 으스대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청춘 앞에서 이제는 더 이상 발기 되지 않는 노년의 사내가 카사노바보다 더 많은 연애를 해봤다며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어 나가던 딸이, 범주가 왜 상상력의 산물인지 물었었다. 자연은 인간 이성의 밖에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의 모든 것을 규정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로 자연에 이름을 붙이고 제 좋을 대로 구분하여 범주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뒤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개는 자신이 개라는 걸 몰라.”, 인간은 인간에게도 같은 실수를 한다. 특히 어린 인간에게.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하는 딸을 본다. A4 용지 한 장을 채우는데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담길 글에 최선의 공을 들이는 딸을 본다. 오전에 공부방에 들어가서 밥 먹을 때와 간식을 먹을 때, 그리고 아빠와 잠시 산책할 때를 제외하곤 일요일 내내 영어 단어와 문법과 씨름했던 딸을 본다. 혼자 하는 공부가 외롭지 않게 옆에서 책을 읽으면서, 그마저도 한 권만 계속 읽으면 금세 지루해져서 존 맥피와 푸코와 이성복의 책을 번갈아 읽으면서 딸을 본다. 나와 다른 존재,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살아 있는 존재를 본다. 섣불리 딸의 꿈을 내 빈약한 상상력의 범주에 넣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커버 사진은 어제, 창비 부산에서 찍은 것이다.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1927년에 세워진 건물이 창비를 만나 새로 태어났다. 딸은 그곳에서 문장을 찍어 넣을 수 있는 책갈피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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