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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쓸모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2

by 최영훈

부산을 벗어나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한 시간쯤 간 뒤, 진주를 지나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바꿔 타고 북서진을 한 시간 반쯤, 이후 새만금-익산 고속도로를 삼십 분쯤 타면 전주에 도착한다. 사실 부산에서 전라도는 의외로 가까워서 일 때문에 갔던 목포도 세 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북서 해안에 자리한 군산은 좀 더 걸리겠지만 전주 주변에 있는 도시나 지리산 부근의 작은 군들은 보통 서너 시간이면 도착한다. 그러니 부산 사람 입장에서는 오히려 동해를 타고 오르는 강릉보다 여수가 훨씬 가깝고 목포도 멀지 않다. 예전에 처제가 고향에 왔을 때는 식구들이 진도까지 갔다 왔을 정도였다.


여정에서 만난 꽃들

경부고속도로의 서울 인근과 경기도 주변의 고속도로, 그리고 부산 주변의 몇몇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한국 고속도로 주변은 산을 곁에 끼고 간다. 고속도로에 오르기만 해도 계절의 변화를 단박에 느낄 수 있는 이유다. 이번 여정 중 고속도로에 가장 많이 보인 꽃은 아카시아와 오동나무꽃, 그리고 등나무꽃이었다. 아카시아는 도심에서 보기 힘들다. 주변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보려면 시외로 나가야 한다. 인근 야산에 몇 그루 보이는데, 예전에 비하면 거의 멸종 위기다. 그런 아카시아 나무들이 고속도로 주변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아카시아 나무가 보기 힘들어진 건 이 나무가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설에 근거해, 이곳저곳에서 인위적인 벌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찾아보니,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척박한 땅에서도, 속된 말로 아카시아 막대기만 꽂아놔도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해서 식물학계에서는 선구(先驅) 식물로 부를 정도라고 하니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고 남을만한 강하고 질긴 생명력이다. 또 하나의 속설은 이 나무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여온, 엄밀히 말하면 외래종이라는 설이다. 찾아보니 이 말도 맞다. 물론 이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당시 화전 등으로 황폐해진 산에 가장 먼저 심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나무로 선택된 나무가 아카시아였기 때문이다.


등나무꽃은 절사면에 심겨 있었다. 그러니까 야산의 중간을 싹둑 자르고 난 길 양쪽 면에 심겨 있었다는 것이다. 등나무꽃의 이 보랏빛 절벽은 통영-대전 간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절사면마다 보이기에 인위적인 식재가 아닐까 추측을 했다. 아내가 보라색 꽃의 이름을 물어 등나무꽃이라고 말해준 뒤, 왜 이 나무를 여기다 심었을 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눴다. 아내는 넝쿨을 만들면서 크는 나무이니 경사면의 흙들이 흘러내지 않도록 일부러 심은 거 아니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럴듯했다. 호텔에서 검색해 보니 아내 말이 맞았다.


오동나무는 듬성듬성 심겨 있었다. 이제 더는 안 보이려나 할 때쯤 그 보랏빛 샹들리에를 초록을 배경 삼아 빛내고 있었다. 크기와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나무는 컸고 어떤 나무는 몇 주전에 심은 것 같았다. 어떤 나무는 길에 바짝 붙어 있었고 어떤 나무는 숲의 한가운데, 심지어 저 안쪽에 들어가 있는 농막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길 가의 나무들이 여러 그루 어깨를 맞대고 촘촘히 서서 나름의 숲을 이루고 있는 반면 오동나무는 홀로, 혹은 잘해야 두세 그루 서 있었다. 그 동떨어짐이 오히려 그들을 독보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세 나무의 쓸모

세 나무 모두, 쓸모를 인정받아, 혹은 그 쓸모가 다했다고 판단되어, 혹은 쓸모보다 해가 더 많다고 판단되어 심기고, 또 베인 나무들이다. 오동나무는 딸나무라고 불렸다. 예전에 딸을 낳으면 바로 오동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잘 크고 관리만 잘하면 곧게, 빨리 컸다. 일 년이면 1미터 이상 자란다고 한다. 15,6년이면 제법 쓸 만한 나무가 된다고 한다. 심지어 빨리 자라는 나무는 보통 내구성이 약하기 마련인데 오동나무는 단단하기까지 하다. 하여, 가구를 만들거나 악기를 만들기에 좋다. 십 대 중 후반에 시집을 보내던 조선 시대 풍습을 생각하면 오동나무를 심는 아버지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딸이 크는 동안 매 봄마다 보랏빛 꽃을 봤을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아카시아는 국내산 꿀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 그야말로 꿀나무다. 땅을 황폐화하고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한다는 속설은 거짓이다. 식물학자의 글을 보니 그 특유의 성분으로 오히려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고 한다. 혹자는 그 꽃 외에는 쓸모가 없다는 말도 하던데, 이 또한 오해라면 오해다. 잘 자라고 잘 버틴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심은 후 관리를 안 해서 그렇지 곧고 굵게 잘 자라도록 사람의 손길이 더해지면 목재로도 제법 쓸모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고속도로 주변에서 보는 아카시아 나무는 그렇게 오해와 쓸모의 경계를 오가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등나무꽃의 쓸모는 의외로 학교와 공원 등지에서 발견된다.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앞 공원에서도, 유엔기념공원 안에서도 등나무는 쉼터의 그늘을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햇살의 날이 무딘 가을과 겨울, 이른 봄에는 숨죽이고 있던 등나무는 햇살이 뜨거워지는 5월이 되면 귀신 같이 그 빛을 감지하고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운다. 부산의 경우엔 4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는데, 꽃이 진 뒤에도 그 잎의 무성함은 여름을 넘겨 초가을까지 버티니 말 그대로 자연 차양막이라 할 수 있다. 이렇다 할 그늘이 없는 공원이나 학교에서 등나무 쉼터를 만들어 그 밑에 벤치를 둔 건 경제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선택이다.


쓸모, 그 이상의 가치

쓸모를 모르는 사람도, 그 쓸모가 필요치 않은 사람에게도 세 나무의 꽃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봄의 꽃으로, 여름의 그늘로, 슬며시 다가오는 향으로 그 꽃들은 모두에게 나름의 존재의 이유를 웅변한다. 그런가. 사실, 그 모든 이유는 꽃의 밖에 있는 타자의 것이다. 꽃은 자신의 쓸모를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마치 예술처럼.


전주와 남원에서 가장 많이 만난 꽃은 이팝나무의 꽃이다. 전주 페이퍼에서 팔복예술공장까지 놓인 철로의 양쪽으로 이팝나무가 하얀 꽃을 흩날리고 있었다. 과거, 공장에서 외지로 종이를 실어 나르던 기차의 철로는 이제 전주의 문화와 예술의 전당인 팔복예술공장으로 향하는 멋진 길로 변모했다. 그곳에 입주한 전주문화재단의 후원회 이름도 이팝프렌즈다.


남원의 광한루와 남원 예촌 주변의 가로수도 이팝나무였다. 어린잎도, 꽃도, 나무도 이런저런 쓸모가 있다고 하는 이팝나무는 그 모든 쓸모를 무르고, 오직 그 하얀 꽃으로 내 옆에 있는 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해가 진 뒤 청사초롱이 켜지자 그 흰 꽃은 기꺼이 고운 불빛의 배경이 되어줬다.

꽃의 이유

광한루에 갔을 때, 꽃 사진을 찍었다. 매발톱꽃과 금낭화다. 예전에 두 꽃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금낭화 사진의 기록을 보니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던 재하네 식구의 초대를 받아 하동에 갔었다. 다른 글에도 썼지만, 재하는 두 살 위의 형이 있는 다부진 녀석인데, 딸과 함께 등교를 시켜도 마음이 놓일만한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부모의 철학으로 인해 하동으로 전학을 갔던 것이다. 매발톱은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화단에서 봤었다. 딸의 하교를 기다리는 동안 화단에 핀 이상한 모양의 꽃이 눈에 띄어 찍었다.


그 꽃을 다시 본다. 이렇게 생긴 이유가 있을까. 그러니까 팬지나 데이지처럼 꽃잎이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지도 않고 장미처럼 꽃잎이 크게 말려 있는 꽃도 아니다. 매발톱은 꽃 안에 꽃이, 그 안쪽의 꽃 안에 또 꽃이 있는 모양이다. 모양도 요란하고 색도 만만치 않다. 금낭화야 말할 것도 없다. 가느다란 전선 같은 줄기에 이름 그대로 작은 주머니 같기도, 작은 종 같기도 한 꽃이 줄지어 펴 있다. 자기의 씨를 멀리 가져가라고 나비나 새를 부르기에 적합한 색과 모양인지, 아니면 자기들끼리 부대껴 열매를 맺기 좋은 모양인지, 난 도저히 그 모양의 쓸모를 가늠할 수가 없다.


아마 식물학자들도 꽃의 모양과 색의 그러함에 대해 합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그 모양새의 효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 효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그것이 정말 꽃의 뜻인지, 자연의 숨은 뜻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저 사람의 지식과 깜냥으로 더듬거리며 추측할 뿐이지 않겠나. 우리의 자연에 대한 지식은 그렇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존재의 쓸모

어쩌면 존재의 쓸모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존재의 쓸모는 세상과 타자의 의해 가늠된다. 선택한 것 없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나온 나를 세상과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한다. 신체를 살펴 힘의 크기와 키를 재어 그 몸이 부릴 만한지 따져본다. 이것저것 가르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한 후 그 머리 안에 든 것의 기능을 저울질한다. 기준은 주체의 밖에 있다.


등교를 시작한 후, 딸은 투쟁하듯 살았다. 내가 보기엔 그랬다.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다시 영어 학원에 갔고 수학 학원에 처음 등록했다. 앞서 썼듯이, 처음 간 수학학원에서도 묵묵히 수업을 소화해 낸 딸은 선행을 넘어 월반의 목전에 있다. 담당 강사와 실장과 아내는 딸의 건강과 월반을 두고 함께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은 담당 강사의, 일종의 테스트 이후 발생했다. 강사는 딸에게 약간 많은 분량의 주말 숙제를 내어봤고 딸은 그걸 다 성실히 해갔다. 그럭저럭 문제도 잘 풀어갔는지, 강사는 딸의 성실함이 진도를 따라가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실장과 그런 논의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딸은 올라가서 증명하려 한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영재 교육에서도 자신의 실력과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그건 자신의 열정이어서 그런 열정 없이 살았던 아버지는 말릴 수 없다. 나이가 어리다고 열정의 크기와 강도가 작을 리 없다. 나이가 어리다고 존재의 증명을 향한 욕망이 작을 리 없다. 딸을 보고 새삼 깨달았다. 그런 딸에게, 아무런 이유와 증명 없이도 그 존재함의 필연성과 당연함을 말해주곤 한다. 철학자 강신주 씨가 언젠가 했던, <쓸모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라>라는 제목으로 했던 장자에 관한 어느 강의처럼 말이다.


퇴원 이후, 딸에게 바라는 건 아기 때와 같다. 잘 자고, 먹고, 싸고, 그렇게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거기에 좀 더 욕심을 내면 길에서 흔히 보이는 애들처럼 학교 갈 때 갔다가 집에 올 때 오는 것이다. 궁극적으론 매일 밤 내 손으로 이불을 덮어 재우고, 매일 아침 제 방문을 열고 나오는 녀석을 내 품에 꼭 안아 주는 것이다. 그것을 오래오래, 매일매일, 그 녀석도, 나도 누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 이상은 그저 성실히 살아낸 하루의 반복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뿐이다.


너에게만 쏟아지는 사랑이 있다.

남원에서 묵은 호텔엔 원천을 끼고 조성된 긴 산책로가 있었다. 원천의 상류는 지리산으로 이어지고 하류는 요천으로 이어져 남원의 중심부를 흐른다. 덕분에 산책로에는 맑은 물소리와 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부녀는 긴 산책을 하며 이름 모르는 꽃과 아는 꽃을 구경했다. 도심에선 보기 힘든 작은 애벌레들이 제 나름 힘껏 기어가는 것도 구경했다. 원천에 놓인 징검다리도 함께 건넜다. 딸은 별 것 아닌 일에도, 별 것 아닌 것에도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춘기를 맞은 딸의 말하는 소리는 낮았으나 웃음소리는 여전히 경쾌했다. 그 웃음소리가 맑은 공기를 울려 귓가에 머물 때마다 안도감과 기쁨이 교차했다.


딸과 긴 대화를 했다. 산책하는 내내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많은 말을 했어도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중 하나는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 연애에 관한 얘기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다 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내가 말했다. 대부분의 사랑은 욕망이 이끈다. 혹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뤄진다. 욕망이 이끌어도 이성으로 판단하여 사랑을 거두거나 멈추기도 한다. 그러나 널 낳고 키워보니 그런 사랑이 아닌 사랑이 있더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욕심도, 욕망도 없이 그저 세상에 막 나온 존재에게 막을 새도 없이 와르르 쏟아지는 사랑이 있더라. 널 사랑하는 건 그렇더라. 그렇게 말해줬다.


딸은 비구니 같은 머리칼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저 흰 캡 하나를 쓰고 호텔과 밖으로 나다녔다. 조식을 먹으러 갈 때도, 수영장에 갈 때도 그랬다. 긴 산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발은 관광지에 갈 때, 괜찮은 사진을 “건지기” 위해서만 썼다. 가발은 그야말로 장식용이었다. 마치 과거 유럽 귀부인들의 그것처럼 말이다. 그 맨머리의 딸을 볼 때마다 기쁨과 눈물이 교차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덕분에 더 또렷이 보이는 이목구비를 뜯어보곤 한다. 뜯어보다가 그 짧은 머리를 한 채 병원 침대에서 힘들어하던 딸을 떠올리곤 한다. 아니 말릴 새도 없이 그때가 떠오른다. 자신의 병과 힘껏 싸우던 딸의 모습이.


겨우 건넨 말

어떤 존재가 이유 없이 존재해야만 한다면, 그런 존재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면 그건 자식뿐이다. 욕망 이전에, 판단 이전에 사랑이 왈칵 쏟아져 버리는 존재 또한 자녀뿐이다. 난 지금도, 항암 주사의 후유증으로 팔다리에 엄습한 저림에 놀라, 자신의 팔다리를 나와 아내에게 맡긴 채 눈물을 흘리던 딸을 생각할 때마다 눈시울이 젖곤 한다. 항암치료 기간 내내, 집에서나 병원에서도 언제나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하던 나도 그날만큼은 딸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을 몰래 훔친 후, 급히 당을 충전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편의점으로 콜라를 사러 갔었다. 그 콜라와 집에 있던 초코파이를 건네자 딸은 손을 떨면서 먹었다. 우리는 그 떨리는 손을 보면서 함께 웃었다. 지금도 초코파이와 콜라를 보면 그 얘기를 하곤 한다. 어쩌면 남은 평생, 콜라와 초코파이를 먹을 때마다 그럴 듯.


치료가 끝난 뒤, 하려고 할 때마다 울컥하는 바람에, 봄날을 그냥 보내고, 결국 여행 중에도 못 했던 말을, 이번 주, 월요일 밤, 딸에게 굿 나잇 키스를 해주며 속삭이듯 말해줬다. "힘껏, 잘 견뎌줘서 고마워.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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