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23
장미가 폈다. 앞집 담장 안에서 빨간 장미가 솟아올라 담을 타고 넘쳐흘러 거리로 쏟아진다. 한 때 민트 색이었으나 이제는 그 빛이 바래어 연하다 못해 창백하게 보이는, 그저 살짝 푸른색이 스쳐 간 흔적만 남은 흰색에 가까운 벽과 그 위로 삐쭉 솟은 긴 창 모양의 방범용 울타리를 덮치며 쏟아 내린다. 급작스레 터져버린 활화산이 뿜어낸 화산탄처럼, 5월의 태풍에 솟아오른 빨간 파도가 넘실댄다.
빨간 장미의 교과서이자 아이콘 같은 크고 풍성한 송이들이 그야말로 주렁주렁 달려 있다. 꽃을 달고 있는 가지가 위태롭게 보일 정도다. 앞집은 이층 양옥인데 몇 년에 한 번씩 칠도 새로 하고 철마다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는데 정작 주인장 얼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집의 뒤편이 우리 빌라 베란다와 마주 보고 있는데, 그 뒤편에는 주인이 아닌 세입자가 살아서 작은 문이 따로 나있다. 이렇게 그 집의 뒷모습을 보고 거의 이십 년 넘게 살았는데, 여전히 그 집에 몇 가구가 사는지, 집주인이 누군지 모른다.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집 주인장이 꽃을 키우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를 상당히 좋아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계절마다 그 계절을 대표하는 꽃을 피워 동네 골목에 선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매 계절마다 그 계절에 피는 꽃 중 가장 송이가 큰 꽃을 골라 피울 수는 없을 것이다. 봄에는 오색 동백이 담장 위로 울긋불긋 보이고 초여름에는 장미가, 한여름에 능소화가 쏟아진다. 모든 꽃이 이렇게 담장 밖을 넘어 그 위로 피어나니 지나가는 이웃들을 위해 꽃을 가꾸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동네 이곳 저곳 빨간 파도가 넘실댄다. 장미의 열풍이 몰아친다. 세 번째 붉은 벽돌집에도, 능소화의 폭포가 골목의 반을 가르곤 하는 그 골목에도 빨간 장미가 폈다. 긴 건너 슈퍼 가는 길에 있는 빌라의 화단에는 모란 같이 큰 노란 장미도 폈다. 이 집 주인장도 솜씨가 좋은 모양이다. 덕분에 딸에게 장미는 흔한 꽃이다. 이맘때면 당연히 보여야 하는 꽃이다.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빨간 장미가 릴레이를 펼쳤다. 봄에는 벚꽃 그늘 아래로 등교했던 딸이 초여름에는 빨간 장미를 만지며 학교로 들어갔었다. 아쉽게도 그 빨간 장미들은 교장이 바뀐 후 사라졌다. 다 뽑혀 버렸다.
여름 한복판, 연꽃이 핀다. 대체로 장마 이후가 절정이나 울산과 부산에선 5월부터 피어, 울산대공원의 연못이나 인근 사찰에 가면 이른 연꽃을 만날 수 있다. 내게 불교의 꽃 두 개를 고르라 한다면 연꽃과 수국이다. 사찰 곳곳에 연꽃이 그려져 있다. 기와의 수막새에 가장 많이 그려진 무늬도 연화문이다. 불교 때문인지, 신라의 수도였기 때문인지, 경주엔 특히 연꽃의 명소가 많다. 경주뿐일까, 경남의 사찰 중 연꽃을 볼 수 없는 사찰이 있을까.
그런데 딸이 연꽃을 처음 본 곳은 경주도, 부산도 아니다. 물론 이 지역 어딘가에서 봤을지도 모르지만 첫 번째 장소로 기억되는 곳은 아마 고령일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고령군에서 운영하는 펜션에 당첨되어 간 적이 있다. 대가야의 땅이기에 그 펜션이 있는 테마파크의 이름 또한 그랬다. 그곳에 넓은 산책로와 공원이 있었는데, 그 입구의 연못에 곱게 연꽃이 피어 있었다. 딸은 그곳에서 나비도 봤다. 어디 키워 풀어놨나 싶어 두리번거렸을 정도로 고령박물관 뜰에는 딸의 손바닥만 한 각양각색의 나비들이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밤에는 엄마와 함께 별을 봤다. 사람이 지은 것이 자연이 만든 산보다 그 높이가 낮을 때 하늘에 있는 별이 밤마다 찾아온다. 높은 건물이 발산하는 많은 빛은 사람의 시선을 코앞에 머물게 하지만 그 빛이 없는 곳에선 시선은 별을 향한다. 언제 발하여 이제야 도착했는지 모르는 그 별빛을 보기 위해 딸은 몰려오는 잠을 뿌리치며 엄마와 밤을 기다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합천의 해인사도 들러 팔만대장경도 구경했다. 1학년 여름의 일이지만 딸은 제법 그 여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연꽃은 민물, 그것도 고인 물에서만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도심에선 귀한 꽃이다. 물이 고인 곳엔 모기도 많으니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엔 저수지도, 연못도 남아나질 못한다. 반면, 연못이 없는 사찰에서는 큰 항아리에 물을 받아서라도 키운다. 사찰에서 연꽃을 피우는 이유는 그 꽃이 부처의 인생관과 닮았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삶 속에서 한여름 연꽃이 피듯 잠시 잠깐 행복을 누리고 보시를 하고 덕을 쌓는다는 것, 그것이 지금의 인생이고 나중에 맞을지도 모를 인생이라는 것, 그러나 결국은 인생에서 그 고통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 부처의 말은 연꽃을 닮아 있다.
연꽃을 보러 간 사람에겐 줄기도 뿌리도 보이지 않는다. 위에서 보면 꽃과 넓은 잎만 보인다. 흐르지 않는 물은 고요하나 맑지는 않다. 맑게 흐르는 물에선 연꽃이 자라지 않는다. 호수나 저수지의 특성상 수면이 지면보다 낮기 마련이라 지상에서 부는 바람도 꽃을 흔들지 못한다. 큰 잎도 여간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물속에서 무슨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럴 리 없겠지만 설령 물속에 악어가 있더라도 물 밖의 일이 아니다. 물뱀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물에 파장을 일으키는 건 작은 개구리이거나 연꽃 옆에 있는 개구리밥 같은 작은 수생 식물뿐이다.
장미가 핀 곳엔 다른 꽃도 핀다. 강렬한 태양을 받는 목 좋은 곳에 터를 잡고 피는 꽃이기에 다른 꽃도 덩달아 잘 핀다. 우리가 흔히 보는 빨간 덩굴장미는 담장이나 지지대를 타고 자란다. 위로 옆으로 퍼진다. 가지가 굵어지면 꽃도 커지고 가시도 커진다. 큰 꽃을 보기 위해선 가지가 굵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고 그 꽃을 따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큰 가시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연근 채취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노동이었다. 극한의 노동이었다. 꽃도 잎도 다 걷어진 펄에 들어가 연근을 손으로 일일이 꺼내고 있었다. 포클레인을 동원하는 곳도, 물을 사용하는 곳도 있지만 중국을 비롯한 연근을 먹는 많은 나라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여전히 사람이 장화를 신고 들어가 직접 연근을 채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중노동이다. 연꽃은 물가에서 볼 수 있지만 연근을 손에 넣기 위해선 펄에 들어가 손과 발에 진흙을 묻혀야 한다.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 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리틀 라이프>, P.199
당연하게도 연꽃과 연잎이 크면 연근도 굵고 길다. 그러니 그걸 캐는 사람의 수고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연꽃이 광대하게 펼쳐진 연못과 저수지는 꽃구경을 위해선 좋은 곳이나 노동의 현장으론 최악이다. 장미도 마찬가지다. 보기만 하는 사람은 가시의 위험 밖에 있다. 어쩌면 가시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장미를 꺾으려는 사람, 장미 덩굴을 넘어야 되는 짐승에게 그 가시는 고통을 암시하고 있다.
꽃이 필수록, 넝쿨이 자랄수록 가시도 많아진다. 연꽃과 연잎이 클수록 그 뿌리도 진흙 아래로 더 깊고 더 길게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당연한 얘기다. 동해안에 가면 방풍림을 볼 수 있다. 곧게 자라는 소나무나 전나무, 메타세콰이아를 바다와 마을 사이에 심어 놓았다. 방풍림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선 키가 커야 한다. 키가 클수록 바람을 더 많이 받고 햇살도 더 많이 받는다. 꽃이 많은 나무는 가시가 많고 뿌리가 깊다. 다시 말하지만 당연한 얘기다.
인생의 특정 시점을 떠올리며 그때가 내 인생의 최악이라고 말하곤 했다. 삼십 대에도, 사십 대에도 이십 대와 십 대를 돌아보며 종종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최악의 시기는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내 인생의 어느 때보다 가장 두려웠던 겨울과 봄을 보냈다.
그 사이 깨달았다.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맞을 수 있는 인생 최악의 순간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마주했을 때라는 것. 또, 당연히, 가장 최악의 순간은 그 불안이 현실이 됐을 때라는 것을.
우리는 저마다의 과거를 갖고 있다. 삶이라는 투쟁 속에서 상처를 입기도 한다. 과거를 그림자처럼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흉터가 생긴다. 피가 멎을만하면, 딱지가 생길만하면, 상처가 아물만하면 새로운 상처가 생기고 그것은 나아서 흉터가 된다.
흉터는 상처의 아물어짐을 뜻할 뿐 그 기억의 사라짐을 보장하진 않는다. 흉터의 밑엔 고통과 출혈의 기억이 있다. 몸과 마음은 그 흉터를 볼 때마다 그 선연(鮮然)한 과거를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다. 흉터-몸에든 마음에든-가 없는 사람은 흉포한 들개를 닮은 급작스런 기억의 습격을 겪지 않는다.
물론 흉터가 없어도 흉포하고 난폭한 기억이 있을 수 있고 흉터가 있어도 그 흉터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을 못 할 수도 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인간엔 망각이라는 행운이 있어서 평생 기억하겠다고 다짐한 기억을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은 잊힐 뿐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의 저장고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누군가, 그 무언가가 흔들어 깨울 때까지.
이번 주, 딸이 학교 도서관에서 <리틀 라이프> 1권을 빌려 왔다. 워낙에 SNS로 마케팅을 잘한 책이니 몇몇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 외에는 어떤 신작에도 심드렁하는 나조차도 그 대략의 내용을 알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기에 딸이 읽기에는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먼저 집어 들어 읽었다. 화요일, 울산 작업실로 향하는 동해선 안에서도 읽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딸에게 이 소설을 읽게 하지 않을 것이다.
1권의 3분의 1쯤 지났을 때 잊고 있던 사건 하나가 생각났다. 과거로 인해 늘 자살의 목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친구의 자해에 대해 깊이 물어보지 못하는 한 남자의 고백을 읽고 있을 때였다. 한 소녀의 죽음이 불쑥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이 나이 정도 되면 인상 깊은 죽음과 장례식 사연 두세 개는 갖고 있다. 내게도 서너 개 정도 있어서 죽음의 황망함과 남은 자의 슬픔이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면 늘 떠오르는 일종의 레퍼토리가 있다. 그러나 이 죽음만큼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이십 대에 막 접어들었거나 십 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여하간 평택에 살 때였다. 교회에서 밴드를 하다 보니 다른 교회에서 음악을 하는 친구들을 알게 됐다. 동네가 좁은 탓이다. 감리교회의 누구, 장로교회의 누구, 침례교회의 누구, 드럼에 그 친구, 피아노에는 그 친구, 베이스엔 그 친구, 하는 식으로 알게 됐다. 서로 친하게 지내던 우리는 그 동생들하고도 친하게 지냈는데, 난 드럼을 치는 녀석의 여동생과도 친하게 지냈다. 순한 녀석이어서 나 같이 모난 사람 하고도 말을 곧잘 주고받았다. 그 소녀의 친구들도 다들 그 오빠들의 교회를 다니다 보니 두루 알게 되어 같이 노래도 하고 연주도 하고 그렇게 십 대 후반의 한 시절을 보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어느 날, 집으로 전화가 왔다. 소녀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 잠시 보자고 해서 나가, 한가하게 산책을 했다. 그 말미에, 소녀가 불쑥, 지금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그러는데 우리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질 수 없냐고 물었다. 마침인지, 하필 인지 집에 어른이 여행을 가는 바람에 집은 비어 있었다. 그러라고 했다. 그때 솔직히, 난 음흉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니 확실하다. 술을 입에도 못 댈 때이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지 못했을 뿐이지 그 소녀와 있는 동안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그 소녀는 자기 집안 얘기를 했을 것이다. 고통의 속살을 약간은 드러내 보여줬을 것이다. 드러머의 동생을 통해서 얼핏 들은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밤엔 그 소녀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새, 아마 난 그 생각이 쉴 새 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유혹의 말도, 음주도 하지 못했던 두 십 대는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그 며칠 후, 그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러머의 동생이 전화 너머에서 울먹이며 말해줬다.
난 한동안 드러머의 동생과 긴 산책을 자주 해야만 했다. 소녀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나도 당연히 몰랐다. 우리는 말없이 어제 봤던 풍경을 오늘도 보며 걸었다. 그 후 그 친구의 오빠들도, 나도 각기 흩어졌다. 서른에 평택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그곳을 간 적이 없다.
지금의 내가 그 당시, 그 나이의 소녀를 만났다면 위로의 말과 방법을 건넸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내 딸과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다. 그런 십 대 소녀가 쉰이 넘은 남자에게 자기 고민을 들고 올 리도 없지만, 혹시라도 그 고민을 들고 온다면 그때처럼 허둥대지는 않을 것이다. 가시도 나 볼만큼 나 봤고 나와 타인에게 상처도 줄 만큼 줘봤고 받을 만큼 받아봤다.
세상을 향해 꽃을 피우는 만큼, 우리가 성장하는 만큼, 나이를 먹는 만큼 과거라는 뿌리도 깊어져서 그 과거의 무게를 적당히 다루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게다가 사람에겐 망각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죽음도 잊고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걸 알게 된 어른이 된 지금, 그 소녀를 다시 만난다면 어쩌면 그 소녀가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게 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겨우 열세 살인 딸에게도 과거가 있다. 미래도 있다. 딸은 살면 살수록 과거의 뿌리는 길고 깊어질 것이고 살아내면서 얻은 훈장 같은 상처는 많아질 것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과거가 짧은 사람에겐 미래가 길다고 여기는 것이다. 혹은 과거가 긴 사람에겐 미래가 짧다고 여기는 것이다. 절대적이지 않다. 살아온 만큼 살아갈지,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우린 그저 이 찰나를 살뿐이다. 과거를 되새기는 것도 미래의 남은 날을 헤아려보는 것도 부질없다. 과거는 잊혔고 기억에 남은 것은 흐릿하다. 선명하다 해도 되살릴 수는 없다. 지나간 것이다.
미래는 확률이다. 예측이다. 오늘 기울인 최선이 내일의 최상의 결과를 불러올지 아무도 모른다. 뿌리와 줄기는 오늘의 일을 할 뿐이다. 그 끝에 봉오리가 몇 개 맺힐지, 어떤 크기의 꽃이 필지 모른다. 꽃들은 또, 자기들이 지고 나면 어떤 열매가 얼마나 많이 열리지 모른다. 각자가 마주한 지금 이 순간을 전력을 다해 살아낸다. 그 전력의 순간에 섬광처럼 피어나는 삶의 환희를 온몸과 마음으로 만끽할 뿐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과거도 미래도 내 것이 아닌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지금 딱 이 순간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