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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볼 수 있는 시간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5

by 최영훈

꽃이 향하는 곳

앞선 글에 썼듯이 곳곳에 달맞이꽃이 한창이다. 낮달맞이꽃과 애기분홍낮달맞이꽃도 따라 폈다. 달맞이꽃은 보름달을 닮은 노란색이고 낮달맞이꽃은 낮에 보이는 달처럼 흰색으로 시작해 분홍으로 그 끝을 마무리한다. 애기분홍낮달맞이꽃은 말 그대로 낮달맞이꽃의 “미니 미”다. 꽃의 이름은 직관적인 경우가 많아서 달맞이꽃은 저녁이면 활짝 폈다가 해가 뜨면 살짝 오므리고 낮달맞이꽃은 그 반대다. 또, 금강초롱이나 금낭화처럼 그 모양을 그대로 따라가거나 갯개미자리나 갯완두처럼 서식지와 크기와 모양새를 이름에 그대로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꽃이 태양을 바라볼 때 달맞이꽃처럼 달을 기다리는 꽃도 있고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피는 꽃도 있다. 보라색 꽃에 대해 다뤘던 글에 등장한 아주가랩탄스도 그런 경우고 한 여름에 올라오는 맥문동도 그늘 밑에서 피어난다. 그러고 보니 장마철에 잘 자라는 수국도 그런 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꽃은 태양을 바라본다. 한여름에 피어 있는 능소화를 보면 저러다 타 죽는 거 아닌가 싶은데 능소화는 오히려 뜨거운 태양을 반기는 기색이다. 여름이 6월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땐 한 발 물러서 있다가 슬슬 에어컨을 켜야 하나 싶을 즈음엔 어김없이 동네 곳곳에 빅밴드의 브라스파트처럼 햇살 아래 꽃을 쏟아낸다. 능소화를 떨어뜨리는 건 굵은 장맛비와 시간의 흐름뿐이다.


태양을 치켜보는 꽃으로는 해바라기가 빠질 수 없다. 그 멀대 같은 모양새와 터무니없는 꽃의 크기 때문인지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에서는 좀처럼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근처 평화공원 수목전시원에나 가야 남미의 키 큰 모델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는 해바라기를 만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 6월부터 시작하여 여름 내내 피는 꽃들은 크고 강렬하다. 원추리도 그렇고 앞서 말한 능소화도 그렇다. 무궁화도 꽃의 크기 면에서 뒤지지 않고 나팔꽃과 무궁화를 반반씩 닮은 접시꽃도 제법 큰 송이를 자랑한다. 이들에 비하면 5월의 장미는 소박하게 보일 정도다.


해를 바라보는 꽃들은 해가 지면 그 모습을 바꾼다. 물론 조용히 고개를 숙이거나 돌리기만 하는 꽃도 있지만 수련처럼 꽃잎을 오므리는 꽃도 있다. 튤립도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꽃잎을 오므린다. 최근에 본 꽃 중 가장 신기했던 것 꽃잔디다. 꽃잔디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꽃을 길쭉하게 모아버린다. 그 모양새가 마치 궐련을 말은 것 같기도 하고 파라솔을 접은 같기도 하다.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미술학원에서 그린 해바라기 유화

나만 바라본 존재

언젠가 썼듯이, 딸을 보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 같은, 사사로운 취미나 인간관계가 없는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아빠들이 그러할 것이다. 아기를 보고 아기가 나를 보고 서로를 보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는 사이 부녀의 정을 쌓아간다.


아기일 때는 딸이 아빠를 찾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같이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할 때마다 딸은 날 봤다. 어린이집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딸을 부르는 경우보다 딸이 날 부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가방을 챙겨주고 머리칼을 묶어주고 원복을 입히고 준비물을 챙길 때마다 딸은 날 불렀다. 아빠하고 부르면 언제나, 기꺼이 바라봤다.


자식을 낳고 키운다고 금방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아이에게 아빠로 부름을 받는 동안 비로소 아빠가 되어 갔다. 좀 더 성숙한 어른도 됐다. 한 존재의 절대적 사랑을 받는 남자는 비로소 세계의 무게를 실감한다. 한 존재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됐음을 깨달은 남자는 비로소 자기 자신도 사랑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껴 세상에 나를 더 오래 존재시켜야 할 당위성을 비로소 얻게 된다. 네가 부를 때 거기 있기 위해, 네가 바라볼 때 거기 변함없이 보이기 위해.


줄어든 시간, 남아 있는 시간

앞서 썼듯이, 딸의 입원 기간 동안 난 아주 긴 시간 딸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밤마다 자기 방에서 자고 고학년이 된 이후 친구와 공부 때문에 바쁜 탓에 딸과 마주하는 시간은 점점 줄었다. 저녁 시간만큼은 TV도 끄고 온 가족이 서로를 보며 밥을 먹었던 이유다. 그렇게 나이가 들수록 보는 시간이 줄어들었던 딸의 모습을 투병을 하는 동안 오래 봤다. 딸은 내가 보는 사이 잠들었고 깨어났다.


건강을 회복한 후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딸은 다시 바빠졌다. 수학학원에선 월반이 결정됐고 그 스케줄에 맞춰 영어학원에선 클래스를 조정해 줬다. 딸은 자신처럼 두 학원을 동시에 다니는 유리라는 학생과 함께 월수금은 수학, 화목은 영어 학원을 다니게 됐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네 시, 그 이후로 약간은 여유로웠던 딸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나 또한 딸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제 하루 중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서너 시간 정도다. 그마저도 딸이 공부를 하러 공부방에 들어가거나 자기 방에서 친구들과 통화를 하거나 하면, 실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채 한 시간도 안 될 것이다.


지난 월요일, 딸이 퇴원한 이후 처음으로 딸이 입원했던 병원에 갔다. 정기 진료를 위해 가는 딸과 동행했다. 딸은 두 달 만에, 난 3월 퇴원 이후 처음 가는 것이었다. 비가 왔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하게 비는 듬성듬성 내렸다. 가발을 쓴 딸에겐 그런 비의 습기도 무거워서 딸도 나도 우산을 썼다. 워낙에 진료 예약이 많은 교수라 대기 시간이 길 것이라 각오한 우리는 책을 챙겼다. 딸은 <아몬드>를, 나는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챙겼다.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진료는 빨리 끝났다. 한시 오십 분 예약이었던 우리는 열한 시 이십 분쯤 도착해서 채혈을 하고 엄마가 준비해 준 서류를 들고 만료된 딸의 적금을 찾았다. 이후 꾸준히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싶다는 딸을 위해 병원 근처의 악기점에서 그곳에서 샀던 3/4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팔고 제 사이즈의 바이올린을 샀다. 이후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 진료를 봤다. 진료는 짧았다. 교수는 딸에게 일상적인 질문 몇 개를 했고, 이후 “수치가 좋네요. 두 달 뒤에 다시 오세요.”하고 진료를 마쳤다. 길게 진료하기로 유명한 그의 진료가 짧은 건, 그만큼 별 탈 없다는 걸 의미한다. 집에 돌아온 뒤, 딸은 제 방에서 한 시간 넘게 쉬다가 학원에 갔다.


꽃과 태양처럼

지난 주말, 아내는 영재 교육을 마친 딸을 데리고 처갓집에 들렀다. 손녀에게 용돈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외할아버지에게 건강한 그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였다. 사실 장인어른은 손녀만큼, 아니 어쩌면 손녀보다 더 자신의 딸을 보고 싶어 하시는지도 모른다. 승용차로는, 막히지만 않으면 십오 분 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딸을 두고 사시면서도 수시로 전화하시고, “안 오나?”하고 궁금해하신다. 그런 딸을 마주할 때마다 장인어른의 얼굴엔 화색이 돈다. 그 화색이 손녀를 볼 때도 피어나서 두 여자는 이제 세트가 되어 그곳에 간다.

그날, 점심으로 코다리찜을 먹었다고 했다. 아내가 뜬금없이 장인어른 앞에서, 코다리찜을 먹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렸던 모양이다. 집에 와서 그 말투를 딸이 그대로 흉내를 냈다. 그건 어리광이었다. 장인어른은 내일모레 오십을 바라보는 장녀의 그 어리광이 마냥 좋으셨는지 동네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에서 코다리찜을 배달시켰다고 한다.


장인어른도, 아내도, 그리고 손녀인 내 딸도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아기 일 때는 오직 엄마와 아빠만 바라본다. 세상에 태어난 새끼 중에서 독립의 시간이 가장 느린 인간이기에 부모를 바라보는 시간 또한 가장 길 것이다. 그러나 늙고 나면 그 시간은 부모의 몫이 된다. 자식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볼 기회가 더 짧기에 그리움이 더 커진다. 어느 드라마 대사에 나왔던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부모의 짝사랑이 더 커진다. 자식은 그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자신이 자식을 낳아봐야, 그제야 약간은 실감이 된다.


이날,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딸을 봤다. 병원 근처에서 점심을 먹으며 딸을 봤다. 우리에겐 서로가 볼 시간들이 남아 있지만, 그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기에 어쩌면 더 열심히 서로를 봐야 하는지 모른다. 딸이 날 바라봤던 시간과 내가 딸을 바라본 시간들이 지나갔다. 딸이 날 바라볼 시간과 내가 딸을 바라볼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병원에서 암 투병을 하는 늙은 엄마에게 항암 비니를 씌우고 온 딸을 봤다. 병원에서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절감한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고픈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충분하지 않다. 내가 나이를 먹으면 부모는 늙는데, 그래서 부모의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은데,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아예 인식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시간을 붙잡을 수 없기에 추억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한정된 시간을 살 수밖에 없기에 기념일과 사랑과, 그리고 또 사진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후회라는 단어도 만들었는지 모른다. 꽃이 피어 있는 동안 해는 뜨고 지길 반복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반복은 없다. 사랑하는 존재가 눈앞에 있는 동안 서로의 꽃과 태양이 되어줘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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