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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그리움을 만드는 것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6

by 최영훈

그들만을 위한 꽃

5월과 6월의 뉴스엔 국립묘지가 자주 등장한다. 국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이들이 잠든 곳을 무심히 국립묘지라 부르나 공식명칭은 더 길거나 다르다. 5.18 영령들이 잠든 곳의 공식 명칭은 <국립 5.18 민주묘지>며 새 대통령이 현충일에 참배를 한 동작동 국립묘지의 공식 명칭은 <국립현충원>이다. 이 명칭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국립”이라는 말일 테고, 이 안엔 나라가 마음을 먹고 좋은 땅을 찾아 조성한 묘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나라의 “마음가짐" 안에는 오늘의 나라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해선 나라가 나서 그 잠들 곳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국민의 지지도 들어 있다. 이어, 이 “국립”의 묘지에 잠든 이들을 영원히 기억해야만 한다는, 이 땅에 살아 있고 살아가는 자의 의무 또한 자연스레 주어진다.


이러한 국립묘지의 의미를 생각할 때마다 이어 드는 생각이 있다.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및 영연방 국가에서 1차 세계대전 전몰 용사를 기리기 위해 사용하는 양귀비꽃처럼, 우리 또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특별한 꽃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헌화에 쓰이는 꽃이 없는 건 아니다. 대체로 흰 국화가 쓰인다. 그러나 흰 국화는 장례식장에서 통상적으로 쓰이는 꽃이다. 호국 영령들을 기리는 영상과 공간에는 무궁화도 자주 등장한다. 국화(國花)이기에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그분들을 기리는 데 쓰이기에 합당한 꽃이긴 하나, 나라와 호국영령을 두루 대표하고 상징하는 꽃이 아닌, 오직 그분들만을 위한 꽃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여전하다.


묘비 위에 놓이는 꽃들

다른 나라의 장례식과 묘지엔 주로 흰색 꽃이 사용되어서 흰 장미, 나리꽃, 백합 등이 쓰인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독일은 주로 추억과 우정을 상징하는 노란색 꽃이 사용되고 다양한 색의 꽃들이 묘지를 장식한다. 찾아보니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묘비마다 빨간 장미가 놓일 때도 있고 오렌지 색 튤립과 분홍색 겹벚꽃도 피어 있는 영상을 본 적도 있다. 일본은 좀 독특한데 장례식에선 다른 나라와 유사한 꽃을 사용하지만 묘지에는 다양한 꽃들이 헌화된다. 실제로 일본 영화를 보면 묘비마다 색색의 다종다양한 꽃이 꽂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아마도 가는 이의 유언 때문이거나 그가 좋아하는 꽃을 기억하는 남은 이의 선택 때문이리라.


그러나 장례식에 어떤 꽃을 사용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화훼농가에서 인위적으로 재배될 수 없는 꽃도 많다는 걸 감안하면 함부로 그런 유언을 남길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래서 종종 “내 장례식에는...”으로 시작되는 당부는 주로 그 방법과 형식으로 모아진다. 조금 더 나아가면 손님들에겐 어떤 음식을 대접하고 내 제사상에는 이런 음식만 놓도록 하라는 간단한 주문이 있을 뿐이다.


우리 가족도 농담처럼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하도 맥주를 즐겨 마시는 남편을 보다 못한 아내가 딸에게 “야, 네 아빠 제사상에는 맥주만 놓아도 되겠다.”하고 핀잔이 담긴 하소연과 부탁이 반반인 말을 한 적 있었다. 그 말을 받아, 딸은 내게 질문을 이어 던졌다. “아빠, 어떤 맥주로 해줘?”, 난 잠시 고민하다, “그때 어떤 브랜드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시원하고 깨끗한 맛의 라거 한 잔이랑, 진하고 씁쓸한 IPA 한 잔 놔줘라.”하고 답했다. 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그 꽃을 들고 가는 마음

공원묘지나 국립묘지 부근에서 파는 꽃은 조화이거나 국화가 대부분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꽃, 그 사람이 그 계절 사랑했던 꽃을 놓기 위해선 일부러 사가야 한다. 사기 위해선 기억하고 있어야만 한다. 기억하기 위해선 함께 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 그 사람과 나눈 대화, 그 꽃을 주고받았던, 혹은 그 꽃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던 어느 계절, 어느 풍경이 담긴 사진이 있어야 한다. 남은 가족들이 그 사람을 추억할 때, 그 사람 그 꽃을 참 좋아했더랬지, 하는 말이 무심히 나와야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며칠 전 아내와 나눈 대화가 기억난다. 이날은 딸이 고신대학교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뒤 바로 학원에 갔던 날이었다. 아내는 저녁에 예약해 둔 필라테스에 가기 전, 거실에 매트를 깔아놓고 몸을 풀고 있었다. 좀 전에 학원 앞에 내려준 딸이 궁금해졌다. 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일이다. 요즘 부쩍 더 그러던 차에, 불쑥 생각 하나가 스쳤었다. 그 생각에 대해 아내의 의견이 궁금했다. “난 요즘 딸이 집 밖에 있거나 내가 집 밖에 나가면 그렇게 애가 보고 싶어 지더라.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지는 거야. 아버지 있잖아. 아버지는 내가 안 보고 싶으셨나, 궁금해지더라고.”


나에 아버지는 내가 지금의 내 딸만할 때 집을 나갔다. 이유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바람 때문이었다. 멀리도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서 차로 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딴살림을 차렸다. 어머니는 무기력했다. 가난한 집은 더 내려갈 곳이 없을 것 같지만 정부의 최소한 보호 장치가 없던 시절엔 노동하지 않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비탈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지듯 가난에서 더한 가난으로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막상 그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그랬다. 또,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딸을 낳고 키우면서 아버지는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 질문에 아내는 잠시 생각을 한 후, 당신 아버지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 거라며, 말 문을 연 뒤 그 이유를 담담히 이어갔다. 낳기만 하면 모든 자식이 다 예쁘고 소중할 것 같으면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가는 엄마 아빠가 있겠냐고, 반문을 했다.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내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은채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그렇게 애지중지 보살피면서 지금까지 키워왔기 때문에 애틋한 마음이 생긴 것이다. 낳자마자 자식에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키우면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자신과 친할머니와의 예를 들었다.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할머니가 그리운 것은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과 기억이 잊히지 않고, 오히려 해가 갈수록 더 생생하기 때문이라고.


켜켜이 쌓인 마음들

안으로 켜켜이 쌓인 사연이 지금 이 순간 마주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만든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이 가족을 단단히 묶는다. 사무치는 그리움은 혈육에 기대지 않고 시간에 기댄다. 함께 한 시간, 공간, 그리고 서로를 바라봤던 수많은 시간들이 그리움의 뿌리가 된다. 이것들이 없으면 그리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움처럼, 내 마음이 여기 없는 누군가로 멈춤 없이, 말릴 수 없이 가기 위해선 뭔가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아내는 바나나 우유를 볼 때마다 할머니를 떠올리고, 딸은 팥빵을 볼 때마다 감전동 할아버지 사다 드려야겠다고 불쑥 말하곤 한다. 반면, 한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 외에 다른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그 사람을 향하지 않는다. 애틋함과 그리움의 강 아래로 가족의 이야기가 생명수처럼 흐른다. 가족의 강이 마르지 않는 건, 어쩌면 이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과일, 동그란 얼굴

앞서 말했듯이, 며칠 전 월요일, 회복을 돕기 위해, 체내에 부족한 성분이 들어간 영양 주사를 맞으러 고신대학교 병원에 갔었다. 한 시간 넘게 주사를 맞는 동안 딸을 지켜봤다. 딸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뭘 봤는지, 불쑥 내게 물었다. “아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뭔지 알아?”, “그러게." 하는 추임새를 던져놓고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제철 과일이라면 다 좋아하고 잘 먹는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뭘까, 하고 제법 오래 생각했다. 봄과 요즘에 나오는 과일 하나를 말하면 되겠거니 싶어 “블루베리? 산딸기?”하고 툭 던졌더니 대번에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뭐야?”하고 물었더니 “자두”라고 했다. 아하, 앞으로 나올 과일은 미처 생각을 못했구나.


잠시 후, 내가 물었다. “그럼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뭐야?”하고 물었다. 물으면서도 이건 너무 쉬운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딸은 대번에 “배”하고 답했다. 그렇다. 배 외에는 좋아하는 과일이 없다. 다른 과일은 그저 아내와 딸이 먹을 때 강권에 못 이겨 먹는 것이지 좋아서 먹는 건 아니다. 그러나 배만큼은 좋아서 먹는다. 반면 딸은 배를 별로 안 좋아한다. 뭔가 심심한 맛이라고 한다. 심지어 약간 단맛 나는 무 같다고 배를 “폄하”하기도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딸이 배까지 좋아했으면 그 배를 먹는 딸의 모습이 좋아 내가 먹을 배를 집어들 기회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6월 들어 딸의 턱 선이 무뎌지면서 조금 동글해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본다. 눈치 빠른 딸은 싱글대는 내 얼굴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살이 올랐음을 알아채고 입술을 삐쭉댄다. 머리칼이 제법 자라서 짙어졌다. 동그래지는 얼굴에 짙고 짧은 머리카락, 게다가 나를 닮아 잘 타는 피부를 가진 덕에 6월 들어 좀 더 까맣게 된 그 얼굴은 영락없이 일본 청춘영화에 등장하는, 고시엔에서 여름을 불태우는 고등학교 야구선수 같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더 싱글거리고 있다. 대신 딸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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