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꽃을 보네 27
기억은 사건과 사물에 의존한다. 행복은 불행한 나날에 돌아보는 무난한 날들에 대한 재평가다. 아무런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말 그대로 무탈한 날들이다. 기억 속엔 무탈하고 무난한 날들의 자리는 없다. 앞서 말했듯 사건은 무난하고 무탈한 날에 돌출의 자극을 주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은 그 자극으로 인해 기억되기 때문에, 훗날 그 자극과 같거나 닮은 자극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주어질 때, 그 사건은 회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절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거나 없다면 그 시절이 지금으로부터 먼 시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런 자극,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삶, 나름대로 괜찮은 삶 아닐까?
딸을 키우는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은 놀랐던 순간들이 대부분이다. 살짝 다쳤거나 넘어졌거나 떨어뜨렸거나 놓쳤거나....... 또, 그다음으로는 딸이 즐거워하던 순간들이다. 동네 공원에 가서 과자를 먹고 꽃을 구경하고 동물원과 대형 놀이공원에 갔던 일은 기억에 남는다. 여행 갔던 곳과 숙소들도 기억에 남는다. 그다음으로는 성장하면서 어떤 하나의 단계를 넘어갈 때의 순간이다. 어린이집 발표회와 졸업식, 초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중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 그러나, 어쩌면, 딸과 나에게 가장 기억에 오래, 그리고 강하게 남을 일은 투병의 겨울일 것이다.
궁금해졌다. 딸은 나와의 사이에서 뭘 기억하고 있을까. 나를 어떤 사건과 사물로 기억을 하게 될까. 내게 그 사건과 사물에 대해 더 이상 물을 수 없어서 스스로 그 사건을 복원하고 복기할 때 가장 손쉽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사건이나 사울은 무엇일까. 우연히 마주한 음반이나 공연, 혹은 사물이나 꽃과 나무를 볼 때, 그중 어떤 것이 나를 강렬하게 생각나게 할까. 무엇이 기억의 방아쇠가 되어줄까. 저항할 수 없이 아빠를 향한 노스탤지어로 빠지게 할까. 궁금해졌다.
앞서도 말했듯이 배를 제외하면 특별히 좋아하는 과일이 없다. 다른 음식도 마찬가지다. 면 요리를 좋아하지만 요즘엔 그것도 심드렁하다. 딸이 라면이나 국수, 파스타를 주문할 때나 신나서 하지 나를 위해선 그런 요리마저 귀찮다. 솔직히 나를 위해 밥을 차리는 것도 귀찮다. 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내가 있는 식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신나게, 그리고 바지런히 움직이지만 나 혼자만을 위해서는 귀찮다.
배달 주문은 아내가 하는데 그때마다 내게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어본다. 딸이 곁에 있을 땐 함께 묻고 하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은 “없다.”이다. 실제로도 없다. 그러니 어떤 음식을 앞에 두고 지금 여기 없는 아빠가 생각이 나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선 글에 썼듯이 차가운 맥주 한 잔을 앞에 놓으면 내 생각이 날지도. 그러나 요즘엔 특별히 마음을 두는 브랜드가 없으니 그 차가움과 목 넘김의 순간, 아빠의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어떤 글에서 썼는데, 남겨주고 싶은 건 있다. 아주 오래된 가죽 파일럿 점퍼와 책들이다. 점퍼는 나중에 네가 입으라고 이미 말해뒀다. 한 5센티미터만 더 크면 약간 오버핏으로, 빈티지 한 멋을 풍기며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지가 가져갈지 모르겠다. 책은 워낙에 편식해서 그 차려진 것들 중 딸이 좋아할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책을 향한 여정의 작은 디딤돌이 되기 바라면서, 원래도 책을 깨끗이 보지만, 딸이 태어난 후 산 책들은 더 깨끗하게 봤다. 바람이 있다면 딸도 폴 오스터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했으면 한다.
다른 글에 썼듯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현재까지, 과제이든 논문이든, 잡글이든 다 파일로 저장해 놨다. 특히 딸의 어린이집 졸업 즈음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일을 기록하며 내 생각과 감정을 담은 글들을 써서 저장해 놨다. 물론 브런치 스토리에도 연재를 해 왔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브런치 스토리가 망하지 않는다면, 딸이 대학 갈 때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줄 생각이다. 그 글들의 한글 파일을 포함, 지난 이십몇 년간 해 온 카피라이터 경력 속에 써 온 카피와 기획서들이 담겨 있는 세 개의 USB도 건네줄 생각이다. 그것의 처분 여부는 그때부터 내 소관이 아니다.
내게 있어 딸의 투병은 그때 끝난다. 딸이 가발을 쓰지 않고 학교에 가기 시작하는 날, 내게 딸의 투병은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그러면 비로소 조금 걱정을 덜 것 같다. 마음이 놓일 것 같다. 그 후, 어쩌면 나에게나 딸에게나 약간은 다른 삶의 형국이 펼쳐질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몰라, 얼마 전 딸에게 넌지시 얘기해 놨다. 네가 가발을 안 쓰고 등교하게 되는 가을쯤 되면 아빠에게 다른 어떤 일이, 혹은 제안이 올 것 같다. 지금은 전혀 그럴 가능성도, 근거도 없지만 그냥 그런 예감이 든다.
혹시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면 아빠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좀 바빠지고, 너한테 조금 덜 신경 쓰게 되더라도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얘기해 놨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그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음이 나나 딸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딸이 그렇게 가을바람을 자기 머리칼로 맞을 때, 내 마음속에서 딸의 투병은 비로소 종료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 투병은 기억 속의 일로 남게 될테고, 어쩌면 이 글의 연재 또한 종료될지도.
얼마 전, 함께 일하는 감독의 선배인 김 00 감독의 일을 도와주러 함께 간 적이 있다. 울산의 간월재 밑의 영남알프스복합웰컴센터에서 좋은 경치를 보며 잠시 몸을 움직이면 되는 일이라 기꺼이 갔다. 일을 하다 동료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김 00 감독과 일을 하던 중, 내게 한 뼘을 대신 재어 달라고 했다. 난, 제가 쓸데없이 손이 큰 편이라 감독님이 재신 것하고 넓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했다.
그러자 “아, 최작가 어디 손 좀 봅시다.”하기에 보여줬더니, “야, 아니 무슨 작가가 이렇게 손이 크노.” 했다. 작가의 적당한 손 크기가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웃으며 말을 받아 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손이 큰 게 뭐 예전에 밴드에서 베이스 칠 때는 좀 도움이 됐는데, 요즘엔 수영할 때 좀 도움이 되고, 아, 딸내미 머리카락 묶어줄 때도 좋더라고요. 그것 말고는, 딱히, 참 쓸모없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김 감독이 “딸내미 머리 묶어 줄 때라........”하면서 그 말을 잠시 음미했다.
김감독은 환갑이 넘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내가 아는 한 공식적인 결혼식은 물론이고 서류상의 혼인도 없다 - 슬하에 자식도 없다. 출산이 결혼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듯, 결혼이 슬하의 자식의 유무를 결정짓는 절대적 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자식이 없다. 그것이 그의 선택인지, 운명인지, 아니면 자신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누군가를 자식이라 부를 수 없거나, 혹은 그 사실을 모르거나 남이 키우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여하간 그에겐 자식이 없다. 그런 그에게 내가 무심히 던진 그 말이 생각보다 깊고 긴 여운을 남긴 모양이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그를 기억할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그를 볼 때마다 종종 느껴지던 무력감과 우리와 함께할 때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던 그의 이야기는 본인 서사의 강박적 진술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갈수록 잊히는 자신의 서사, 그 소멸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60대 남자는 그렇게 수다스러워졌는지 모른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고 있는 그에게 자기 기억의 망각은 불안한 예감처럼 그의 주변을 서성일테고, 그렇다면 누구보다 더 자신의 단서를 세상에 남겨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해갈 것이다. 또, 그럴수록 더 수다스러워질 테고. 이 날도 우린 정치와 경제, 이란과 이스라엘 전쟁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치 천일야화처럼.
이 글의 초안을 저장해 놓고 딸을 데리러 갔다. 아직은 가방이 무거워 보여 대신 들어줄 겸 해서 간다. 오늘, 딸의 가방을 받아 드는 데 유독 무거웠다. “뭐야. 왜 이렇게 무거워.”했더니, 딸이 얘기가 길다면서 걸으면서 말을 잇는다. 사회 시간이 끝나고, 사회 선생님이 딸만 잠시 남으라고 했단다. 딸은 내가 뭘 잘 못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옆에서 선생님의 말을 함께 들었던 반장도 같은 생각이 들어 딸에게 물었다고 했다. “너 뭐 잘 못 한 것 있지?”
아이들이 다 나가자, 선생님이 사회 참고서 세트를 하나를 주셨고 딸은 감사히 받았다고 했다. 별 말은 없으셨다고. 그런데 딸이 오면서 지난 시간에 사회 선생님이 한 말을 기억해 내어 말해줬다. 선생님은 수행평가나, 수업 태도나, 글 쓴 거나, 퀴즈 같은 거 보면, 앞으로 너희들이 공부를 어떻게 하고 얼마나 잘할지 감이 온다고 하셨단다.
집에 와서, 꺼내보니 네 권, 한 세트다. 내가 농담을 던졌다. “야, 이젠 몰빵이구나. 될만한 애들한테 몰아주기냐.”, 그러자 딸이 웃었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한 마디를 했다. “아빠는 중학교 때, 공부는 잘하는데 집이 가난해서 선생님들이 참고서를 챙겨 줘서 받았는데, 이젠 수업을 잘 듣는 애들한테 주나 봐.”, 딸의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다. 수업 태도며 여러모로 공부와 수업에 성의가 있는 학생에게 준 상이라면 상인 책을 받아온 딸을 보며, 과거의 응어리 하나가 풀어진 느낌이다.
꽃이 드물다. 아니, 6월엔 새꽃이 거의 없다. 동해선을 타고 벡스코역에서 태화강역까지 가는 동안, 그 사이 송정과 일광, 기장과 서생, 월내를 지나며 해안가 마을과 제법 큰 도심, 그리고 양 옆으로 울창하고 높은 산을 끼고 가지만 초록을 비집고 나온 도드라진 꽃이 보이질 않는다. 5월에 핀 꽃들이 6월을 견뎌내고 있다. 슬슬 힘겨워 보인다.
봄에 핀 꽃들은 제 역할을 다하고 초록으로 변했다. 열매 맺힘의 제 본분을 다하고 그렇게 초록의 베일 뒤로 사라졌다. 이것을, 이 사라진 사태를 ‘꽃이 졌다.’라고 표현해도 될까. 그 표현은 서운하다. 꽃의 입장에서도, 그 꽃을 기다렸던 사람 입장에서도, 그리고 그 꽃의 물러감 후 힘차게 출렁이는 역동적인 초록 물결에서 자연의 기운을 느끼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 표현은, '꽃이 졌다.'는 표현은 아쉽다.
할 일을 다 한 뒤 그 모습을 탈바꿈한 것이다. 그러니 변신이나 탈피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지금, 이 뜨거운 6월에 막 절정을 이룬 꽃은 수국뿐이다. 벌써 길고 굵은 빗줄기를 며칠간 연이어 쏟아냈던 하늘 아래에서 파랑, 보랑, 분홍의 꽃을 세상에 밀어내고 있다. 지금은, 그래서 능소화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정말, 그뿐인가.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