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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여왕"의 하루

딸과 함께 꽃을 보네 24

by 최영훈

꽃이 쏟아진다. 꽃의 계절은 5월이고 5월은 꽃의 계절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이 거저 생긴 것이 아니다. 여름이라 하기엔 이르고 봄이라고 하기엔 이미 한참 지난 듯 한 5월, 우리는 무수히 많은 꽃을 만난다. 5월은 진정한 여름의 목전에서 수많은 열매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꽃들을 이제 막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태양 아래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꽃이 나를 잡는다.

빌라의 앞쪽 화단엔 삼색병꽃과 흰금강초롱이, 뒤편 화단엔 노란색 달맞이꽃과 연보라의 꽃잔디가 돌아왔다. 두 번째 빨간 벽돌집에는 빨간 장미 그늘 아래 낮달맞이 꽃과 낮달맞이의 작은 버전인 애기분홍낮달맞이꽃이 폈고 동네 이곳저곳, 그리고 수영을 하러 가는 대학 캠퍼스에는 <리플리>의, 자신의 친구를 사칭했던 주인공처럼 철쭉을 닮은 척 하지만 그보다는 작고 소박한 영산홍과 그만큼 흔한 바다 채송화라고도 불리는 송엽죽이 곳곳에 무리 지어 있다.

주말에 부산문화회관 뒷산에 올라 문수사 둘레를 걸었다. 그곳엔 작약과 유럽 수국이라 불리는 갈랜드 수국이 피어 있었고, 그 옆으로 라넌큘러스를 닮은, 장미의 일종이 헤르쵸킨과 파라솔 버베나(처음 보는 꽃들이라 검색을 해 봤다)가 피어 있었다. 참고로 갈랜드 수국은 런어웨이 브라이드라고도 불리는데, 꽃의 모양이 웨딩드레스 자랑을 두 손으로 들고 뛰어가는 신부의 뒷모습을 닮아서이지 않을까 하고 나름 추리를 해 봤다. 갈랜드 수국과 파라솔 버베나, 흰금강초롱을 보면 꽃의 이름이 얼마나 장면과 사물과 닮았는지 실감할 수 있다.


며칠 후 간 울산의 국도변엔 금계국이 만발했고 점심 먹으러 들른 언양의 한 식당 마당엔 금낭화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후 일 때문에 방문한 간월산 초입에 자리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주변에는 엉겅퀴와 레드 클로버가 자기들 마음대로 자리 잡고 있었고 버스 파업 때문에 조금 늦게 등교하게 된 딸을 데려다주고 오며 넘어온 야트막한 언덕길 옆으로는 늦게 핀 황매화와 영국에선 야생 장미로 분류되는 개장미(검색해 보니 실제로 이름이 Dog Rose다), 그리고 꽃 모양이 마치 흰 공작이 막 날개를 펼치기 직전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인동덩굴이 숨어 있었다.


5월의 이름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5월은 열둘 달 중 다섯 번째 달의 이름이 아니다. 꽃들이 쏟아지는 다섯 번째 달의 진짜 이름은 따로 있다. 5월에 많은 기념일과 행사가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장 날씨가 좋고 가장 꽃이 많기에 쉬기에도 축제를 벌이기에도 사랑을 하기에도 파티를 하기에도 가장 좋은 달이기 때문이다. 하여, 5월은 가장 화려한 이름을 얻었다. 여왕이 5월의 본명인지 예명인지 훗날 스스로 얻은 영예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달을 꼭 여왕이라 불러야만 한다면 이의 없이 5월을 그리 부를 것이다. 계절의 이름을 다시 정리하자. 봄, 여왕, 여름, 가을, 겨울.


우리가 봄꽃에 설레는 건 겨울 때문이다. 거의 모든 꽃과 벌레를 비롯한 생명의 기운들이 서리 밑에 웅크리고 있는 동안, 심지어 사람조차 겨울의 극성스러운 찬바람을 피해 웅크리고 있는 동안 꽃에 대한 상상력과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시간 끝에 상상했던 계절이 희망처럼 사나운 겨울을 몰아내며 올 때, 품어왔던 꽃에 대한 상상력은 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뀐다. 그 상상력이, 그 마음이 봄과 봄꽃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지는지도 모른다. 호들갑스러운 환영 행사로 표현되는지도 모른다. 겨울 덕분에 봄이 누리는 영원한 호사다.


여왕 같은, 5월 같은 하루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5월처럼, 구분되지 않고 이름 없는 날들에 행복이 숨어 있다. 그런 날들은 기억되기 힘들어서 그날의 일들 또한 이벤트로 기록되지 못한다. 그 무탈하고 평범한 날들이 반복되면 말 그대로 그날이 그날 같고 그 일이 그 일 같으며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무색무취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이다.

그러나 5월이 그러하듯 이름이 없고 소속이 없어도 다름이 있으면, 의미를 부여하면 특별하다. 5월은 봄과 여름 사이에서 수많은 특별한 날들이 모인 여왕의 달이 되었고, 우리는 그 5월에 있는 날들 덕분에 5월의 행복과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꽃은 그 행복한 순간들을 위해 많이 피어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가장 꽃이 많은 5월이기에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의 꽃에 담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늘 봐온 사람이지만 내 인생에서 더없이 소중한 사람들의 특별함을 스스로 일깨우기 위해, 그 깨달음을 위해 5월은 구별되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꽃이 보려는 사람에게만 그 속내를 보여주고 그 이름과 모양을 일치시켜 기억에 남기려는 사람에게만 의미를 남기듯이 우리의 하루 또한 그렇게 애써 의미를 부여해줘야만 한다. 그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그 평범한 일상이 깨어져 보면 알 수 있다. 맑은 하늘과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살이 귀한 북유럽에서 온 관광객이 우리나라의 계절에 상관없이 해만 나오면 일광욕을 하려는 것처럼, 일상 또한 그 상실과 멈춤으로 자신의 소중함을 말한다. 지난 6년 간, 딸의 일상에 대해 쓴 글보다, 여기에 실린 올 들어 쓴 글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딸과 나의 공간

5월 둘째 주, 딸의 학교에선 체험 학습이 있었고, 우린 대신 여행을 갔었다. 불행히도, 그 주 금요일 비가 온 탓에 아이들은 그다음 주에 애초 금요일에 가려했던 지역의 놀이공원에 가서 놀았고 그다음 날엔 체육 대회를 했다. 이 날, 딸은 고신대학 병원에 비타민 주사를 맞으러 갔다. 출발하기 전 집에서부터 딸은 동영상을 봤다. 누군가 보내준, 체육대회 영상이었다. 병원에서도 그 영상을 봤다. 아쉬워하는지, 부러워하는지, 난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날 딸은 집에 와서 수학 숙제를 했다. 하다가 저녁으로 치킨-신상품이 나왔다면서 딸이 강력 추천해 줬다. -을 먹으면서 잠시 음악 방송을 봤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인 제로베이스원의 멤버, 성한빈이 사회를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날, 그 친구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 공연을 간 모양이다. 딸은 그래도 치킨을 먹으면서 몇 팀의 공연을 봤다. 그러다 잠시 후 “오빠”가 나오지 않아서인지 다시 공부방에 들어가 수학 숙제를 했다.


공부방은 책상이 두 개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딸의 것. 동쪽으로 난 창 밑에 내 책상이 있다. 책상이라고 하기엔 뭐 한데, 딸이 막 태어났을 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여러 물건들을 수납하기 위해 산 낮은 서랍장에 ㄱ자의 판을 올려놓은 것이다. 난 그 판 위에 모니터와 키보드를, 서랍장 위의 공간엔 읽을 책을 대략 예닐곱 권을 한 묶음으로, 총 네 덩어리를 쌓아 놨다.


딸의 책상은 내 책들이 놓인 곳과 90도 각도 꺾여 놓여 있다. 당연히 신제품이다. 딸이 입원해 있는 동안 사들였다. 책상과 책꽂이가 한 세트인데, 책상은 버튼을 누르면 위아래로 움직여서 서서 공부도, 책도 읽을 수 있다. 나같이 산만한 사람에겐 “딱”이다. 그러나 딸은 단 한 번도 서서 뭔가를 한 적이 없다. 일단 앉으면 이창호 같은 돌부처가 된다.


과거의 나, 오늘의 딸

딸이 그렇게 그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를 푸는 동안 난 딸의 등 뒤에서 맥주를 마시며 딸이 학교에서 빌려온 <리틀 라이프>를 읽었다. 딸은 어려운 문제에 막힐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었고 그때마다 난 책을 덮고 짧은 머리칼의 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줬다. “천천히 해. 안 풀리면 네가 접근한 방법을 메모해. 그래서 학원에 가서 선생님한테 물어봐. 그럼 네 방법이 뭐가 틀렸는지 가르쳐주고, 다른 접근법을 보여 주겠지. 그러라고 학원에 그렇게 많은 학원비를 내는 거야. 그러니까 안 풀리는 문제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딸은 내 말을 듣고 안도와 분함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다. 서랍장에서 내 손수건을 꺼내줬다. 눈물을 훔치고 다시 문제에 달라붙었다. 난 등 뒤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다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는 데 불쑥, 한 생각이 스쳤다. 소년 시절,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내가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 그렇게 간절히 바랐으나 자신의 한계와 주변의 여건 때문에 되지 못했던 이상적인 나 자신이 지금 내 옆에서 공부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 올라왔다. 그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 전, 막 물을 마시려던 딸에게 농담처럼 내 생각을 말해줬다. “아빠가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소년을 내가 아예 키워버렸네. 성별만 바뀌었지. 어쩌면 미국 할머니도 널 보면 아빠랑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잘 키웠으면 만났을지 모를 아들의 모습을 너한테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말에 딸은 싱긋 웃은 뒤 수학 문제로 돌아갔다.


이 전날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놀이기구를 타기엔 아직 무리라 판단되어서, 놀이공원에 가는 체험 학습 프로그램 대신 집에 있었던 오후였다. 딸은 뭘 보다 생각이 났는지, 불쑥 “왜 앤젤리나 졸리는 왜 그렇게 많은 애들을 입양한 거야. 그리고 이혼한 다음에는 아이들의 성을 왜 바꾼 거야?”하고 물었다. 난 잠시 생각한 후, 안젤리나 졸리를 이효리와 비교했다. 어쩌면 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이효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에 대해, 톰 크루즈와 비교하며 설명해 줬다. 그러다 브래드 피트가 데이비드 핀쳐와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어쩌면 양극단에 있는 두 감독에게 사랑받는 유연하고 폭이 넓은 배우라는 얘기까지 하게 됐다.

학원 갈 시간이 다 되어서-우린 이날 지하철을 타고 가기로 했다-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무심히 말을 했다. 어디 가서 누구랑 이런 대화를 하겠냐고, 모처럼 진지하게 영화 이야기를 했다고, 그런 질문을 받아 본 것도 오랜만이고 이런 주제로 얘기한 것도 오랜만이라고, 그 뒤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야, 아빠가 이런 얘기하고 싶어서 널 키웠나 보다.”, 그러자 딸이 또 싱긋 웃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두 코스를 함께 갔다. 딸이 학원에 들어가는 걸 본 후, 난 잠시 학원 주변을 걸었다. 인디고 서원 앞에 프렌치 라벤더가 피어 있었다.


5월의 결심

모든 생명의 기운을 냉혹한 얼음장 밑에 묻어버릴 것 같은 겨울은 생명의 봄과 그 봄이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 꽃을 모르고, 그 어느 달보다 세상에 많은 꽃을 선보이는 생명의 열기 가득한 5월은 6월의 장마와 7,8월의 무더위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쉰이 넘게 산 나는 딸의 미래를 알 수 없다. 5월이 품은 그 수많은 꽃의 가능성처럼 딸이 어떤 꽃으로 피어날지 난 도저히 알 수 없다.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단어를 외우고, 그러다 자기 “오빠”들을 보며 깔깔거리는 딸을 볼 때마다, 그 막연함에 종종 아득해지곤 한다.


그렇게 막막한 순간 뒤에, 결국 결심을 하게 된다. 그 꽃을 피울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에 다짐을 하곤 한다.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함께 걸으며 말벗을 해주고 건강한 아침을 차려주고 잠들기 전 사랑을 담아 굿나잇 키스를 해주겠다고. 함께 걷다가 비가 오면 젖지 않게 큰 우산을 씌워주고 보고 싶은 전시회나 음악회가 있으면 함께 가고 싶은 사람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거절의 두려움 없이 언제나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한다.


꽃 사진은, 등장 순서대로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배열했다. 커버 사진은 갯완두다. 주로 해안 지방의 모래땅에서 자란다. 부산, 특히 필자가 사는 해안 지역(실제로 부경대학교 인근은 바다를 매립한 땅이다. 필자의 집에서 광안리까지는 지하철로 세 정거장 밖에 되지 않으며, 딸이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십오 분 정도만 걸으면 바다가 보인다.)에선 흔히 볼 수 있지만 다른 지역의 독자들은 만나기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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