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 읽은 책 137
어떤 형태로든 집에 들어온 책은 들춰본다. 물론 들춰보는 것이 읽음으로 이어지진 않는 경우도 있다. 아내가 수년 전 회사에선 들고 온 <더 해빙> 같은 근본 없는 책이나 아들러 심리학을 편의점 도시락처럼 저렴한 입맛에 맞게 요리한 <상처받을 용기> 같은 책들이 그렇다. 딸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은 의외로 “읽게” 되는데, 최근엔 딸의 책을 보는 안목이 제법 갖춰져서 더 자주 읽게 된다. 이 책도 딸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딸은 주중에,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시끌벅적한 반에서 벗어나 최대한 조용한 곳을 찾아 이 책을 펼쳤다고 한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진눈깨비>, 「흰」, P.55
소설로 알고 있었는데, 초반 몇 페이지를 읽다 보니 자전적인 에세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표지를 봤다. 분명 소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소설인데 어쩐지 작가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이 소설은 조각보와 비슷하다. 각기 다른 흰 것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그 이야기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아니, 조각보처럼 애초에 그 목적을 위해 단어들과 이야기들이 모아졌을 것이다. 그리 보는 게 타당하겠다.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하얗게 웃는다>, 「흰」, P.74
색은 형용사와 부사로 쓰이기에 그 스스로는 세상에 자국을 남길 수 없다. 색에는 그 고유의 부피가 없어서 하나의 사람, 사물, 현상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인다. 매개체가 사라지면 색도 사라진다. 무언가 사라졌는데 색이 남아 있다면 그건 환영이거나 유령이거나 기억일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색은 기억일 수밖에 없다. 집 앞의 넝쿨장미가 빨갛다는 것도, 장마가 지나면 만개하는 능소화가 어린 시절 빨아먹던 서주 아이스 바의 오렌지색을 닮았다는 것도 기억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런 색은 사물과 사람, 사태와 상황보다 더 힘이 강하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안개와 서리, 눈이 가진 힘과 유사하다. 내려앉고 내린 후 녹아 사라지지만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눈과 서리, 안개는 기억의 매듭을 만든다.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백야>, 「흰」, P.90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흰나비>, 「흰」, P.103
소설은 세상에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누이를 중심으로 한 가족의 기억, 그리고 작가 본인이 머물고 유럽 어느 도시가 지니고 있는 역사의 상흔, 마지막으로 짙은 안개와 폭설, 찬 서리를 닮은 삶의 낮고 서늘한 순간들이 무심히 교차한다.
독자는 하나의 서사를 엮어내려 할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독자를 데리고 안개가 자욱한 낯선 도시의 골목으로 데려가려 한다. 단체 관광을 닮은, 결과와 결론을 향해가는 독자의 서사의 달음박질을 말리며 같이 걷자고 한다. 천천히.
그래서 이야기와 줄거리가 아닌 어느 삶에나 있을 법한 아픔과 슬픔, 그것들이 만든 삶의 굴곡과 마디를 꾹꾹 짚어낸다. 독자가 해야 될 일은 그 짚어내는 마디의 도드라짐, 흉터를 닮은 그것을 함께 만지며 돌아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넋>, 「흰」, P.105.
주중, 딸은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있었다고 했다. 사자성어를 닮았는데, 그건 아니라고, 그런데 어떤 단어였는지 기억이 안 나니 아빠가 읽다가 이 단어다 싶은 것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다. 의외로 쉽게 찾았다. 딸이 물은 읽다가 물은 “유보”라는 단어 뒤에 바로 “살풍경”이라는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딸에게 물으니 맞다 해서 대략의 뜻을 가르쳐 준 뒤, 검색하여 사전에 담긴 몇 개의 뜻을 함께 읽었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히틀러에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도시가 쑥대밭이 된 유럽의 도시가 어느 도시인지 잠시 생각했다. 처음 떠오른 도시는 벨기에의 루뱅이었다. 두 세계대전에서 독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도시니까. 다른 도시는 체코의 프라하였다. 그러나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게 생각났다. 결국 검색해 봤다.
두 도시 다 시기가 맞지 않았다. 루뱅은 1940년, 프라하 봉기는 1945년이었다. 소설에 나온 도시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였다. 나중에 보니 후기에 저자가 밝히고 있더라. 딸에게 찾아봤냐고 물었다. “아빠, 학교에선 그런 걸 찾아볼 만한 환경이 아니야. 너무 정신없어.”, 딸의 대답을 듣고 루뱅, 프라하, 바르샤바에 대해 얘기해 줬다.
읽다가 얼마 전 읽은 신형철의 문장이 떠올랐다. 여기 옮긴다.
“당신이 늘 울음을 참아왔으므로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보이지고 않는 그 사람의 성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왜 성대인가.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만 울음은 목구멍에서 치솟는다. 그래서 울음을 참는 일을 ‘울음을 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늘 참지 않는 사람은, 늘 참는 사람이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당신의 시는, 그렇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한다. 시는, 필요한 것이다.”, 신형철, <슬픔임을 잊어버린 슬픔>,「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P.78~81.
문학은 어쩌면 나와 타자로부터 쏟아진 말과 글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사람 편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미처 쏟아낼 수 없어 뱉은 것보다 삼킨 것이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고백건대, 처음 읽은 한강의 글이다. 집에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있다. 알다시피 읽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소설이다. 숨을 참고 읽거나 읽다가 긴 숨을 뱉어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많은 소설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고 더 나중에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딸이 가발을 쓰지 않고 등교를 하게 될 가을이나 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