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39
“그런 나라의 남쪽 어느 하늘에 한 사람이 산다. 축복과 은총 따위는 기대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다만 지상에서 살아갈 희망만은 빼앗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기 위해 신에게 더 가까이 가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희망은 천상의 어디에서가 아니라, 지상의 먼 곳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온다. 신이 인간에게 내려보내기 전에,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올려 보낸다.”, 신형철, <희망은 버스를 타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 243
작가가 저 글을 쓸 때, 저 버스가 부산의 영도를 향해 내려올 때, 난 영도의 한 대학에서 카피라이팅을 강의하고 있었다. 속된 말로 자본주의의 첨병이라 불리는 광고, 그중에서도 글과 말로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법을 가르치는 시간에 난 저 사태에 대해 짤막하게 말하며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내 질문은 단순했다. “경영을 잘 못해서 적자가 났는데 그 책임을 노동자에 묻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광고를 공부하겠다고 입학하여 이제 막 마케팅 원론 같은 과목을 배웠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막연히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주어 들었던 학생들의 입에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 난 김진숙 씨의 퇴직 영상을 보며 울컥했더랬다.
이제, 그 조선소는 잘 나간다. 영도는 그 시절의 영도와 달라졌고 이어진 다리는 해운대와 수영구, 남구를 거쳐 영도와 중구, 서구를 삼십 분 안쪽으로, 그 시간적 거리를 좁혀 놨다. 영도에 사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카페는 늘어나고 있고 그럴듯한 행사도 자주 열린다. 서울에서부터 내려왔던 “희망 버스”는 역사의 일이 되어 버렸고 조선소는 주인을 바꾸고 옷을 갈아입은 뒤 투쟁의 흔적을 지워냈다. 그 사이 노동자들이 잘 사는 세상이 왔는지, 영도에 새로운 희망이 도래했는지 난 알 수 없다. 해운대와 좁혀진 시간의 간격만큼 그 삶의 질도 비슷해졌는지 영도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무심했거나 무관심했던 모양이다. 이 책의 저 부분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애초부터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대통령을 '호위'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무엇을 이용한다.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용할 무엇이 필요하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할 때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런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삶은 얼마나 충만해지는가.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태극기 집회는 정치적 저항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축제일지도 모른다.", 신형철, <사회적 인정의 복지 ; 태극기 부대를 바라보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211
우리가 어떤 시대를 지나왔는지 돌아보지 않고 복기해보지 않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을 간과하거나 지금의 행복이 상실된 뒤에야 그 시대의 행복을 그리워한다. 행복은, 저자가 <고독과 행복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말했듯이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2010년대의 정치와 사회적 사건이 담긴 글들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불행을 생각했다. 용산 참사가 있었고 세월호가 있었으며 4대 강 사업이 있었다. 2009년에는 쌍용자동차 사태가 있었고 이듬해 한진중공업 사태가 있었다. 이 시기는 소위 이명박근혜 시기다. 이명박은 정동영을 이겨 대통령이 됐고 박근혜는 문재인을 이겨 대통령이 됐다. 이때 진 두 사람 중 문재인은 대통령이 됐고 현재는 퇴직하여 서점 주인장을 하고 있으며 정동영은 현 정부의 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그들이 만들었고 만들어갈 나라가 그때의 나라보다 더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그때의 나라가 불행하고 비정상적인 나라였음을, 난 이 책을 읽으며 새삼 확인했다.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 낸 사람만을, 바꾼다.”, 신형철, <슬픔의 불균형에 대하여>,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47.
“당신이 늘 울음을 참아왔으므로 당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보이지고 않는 그 사람의 성대를 들여다보고 있다. 왜 성대인가. 눈물은 눈에서 흐르지만 울음은 목구멍에서 치솟는다. 그래서 울음을 참는 일을 ‘울음을 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늘 참지 않는 사람은, 늘 참는 사람이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당신의 시는, 그렇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한다. 시는, 필요한 것이다.”, 신형철, <슬픔임을 잊어버린 슬픔>,「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P.78~81.
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죽창을 든 민초의 대열을 봤다. <군도>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무기가 될 만한 쇠붙이를, 그마저도 없으면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어 선 힘없는 백성들의 대오를 본 듯했다.
그의 글은 그렇다. 싸우는 법을 모르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민초들이 패악질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강고한 권력의 창칼과 총포에 맞서기 위해,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그들을 마주한 채 단호하게 찔러 넣기 위해, 결심과 두려움이 섞인 마음을 떨리는 낫에 담아 자르고 섞박지처럼 그 끝을 다듬은 죽창을 들고 서 있는 것 같다. 연약하지만 싸워야만 하고,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순하고 선한, 일하다 얻은 상처로 인해 본 피 말고는 자신의 피를 본 적 없는 그런 이들이 야윈 어깨를 맞대고 대오를 이룬 채 푸르스름한 죽창을 결연히 앞으로 내민 것 만 같다.
단어를 찾고 있다. 위와 같은 마음을 담아낼 단어를 찾고 있다. 두렵지만 죽창을 들고 맞설 수밖에 없음을, 그 필요와 운명을 받아들인 연약한 민초의 마음을 표현하는, 그 마음을 담을만한 하나의 절대적인 단어를 찾고 있다. 두려움과 의지, 패배와 죽음에 대한 예감과 투쟁의 결연한 의지가 공존하는 그 감정을 표현할 하나의 단어를 찾고 있다. 비유나 은유가 아닌 하나의 단어를. 아직 못 찾은 그 단어를 대신할 표현을 말하자면, 그 마음은 문학의 정신, 또는 문학의 이유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주변엔 성난 얼굴이 없다. 사나운 사람도 없다. 그 바닥이라고 왜 그런 사람이 없겠는가. 아마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일 테고 하여 그의 글에도 그런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것일 테다. 이런 순한 사람들, 문학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이 조용하고 평온할 땐, 그저 사랑이나 자연이나 삶과 죽음에 대해 쓰고 말한다.
어지러운 세상이, 소란스러운 세상이, 사나운 권력과 폭력적인 시대가 이런 문학을 하는 이들을 하나의 대열에 불러들이는 것 같다. 싸우고 싶지 않으나 싸울 수밖에 없기에 결국 글을 무기 삼아 주춤주춤, 그러나 단호한 마음으로, 지치지 않는 투쟁심으로 싸우게 하는 거 아닐까. 문학을 투사로 만드는 건, 그 문학에 죽창을 쥐어주는 건 그렇게 사나운 시대와 폭력적인 권력이다.
그의 책 중 <몰락의 에티카>와 <정확한 사랑의 실험>만 아직 읽지 않았다. 전자는 너무 전문적인 비평일 것 같아서, 후자는 표지가 촌스러워서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내 취향의 문제다.
"독서로 여행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지만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내게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보다는 읽지 못한 책에 대한 갈급이 언제나 더 세다. 그러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우울하게 애매하게-'당신의 소울시티는 어디인가',라는 물음에 답하여>,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382.
위의 저 문장을 읽고 혼자 박장대소했다. 그는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결혼했기에, 두 사람 다 여행 대신 책을 읽느라 바쁘겠지만 내 경우엔 그렇지 않아서 일 년의 두어 번은 집밖으로 멀리 움직인다. 그는 지난 2022년, 늦게 아들을 봤는데, 아마 그 아이 때문이라도 조만간, 종종 여행을 나서야만 할 것이다. 뭐, 어쩌겠나, 건투를 빈다.
이 책엔 재미있는 부록이 있는데, 그가 추천하는 중편 소설 여섯 개, 그가 추천사를 쓴 소설/에세이 열 개, 인생을 다룬 소설 다섯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글 곳곳에서 소설, 에세이, 시집을 추천하고 문장가들을 사심 없이 소개하니 어떤 책으로 독서를 시작할지 망설이는 이에게 하나의 가이드가 될 만한 책이다.
딸의 어깨너머로 본 동영상에 나온 유명한 국어 일타 강사가 말하길, 짧은 글을 읽고 생각을 말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이 좋은 국어 공부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책을 권한다. 딸에게도 권할 생각이다. 아, 딸은 지금 내가 권하여 <햄릿>을 읽고 있었는데, 얼마 전 신청한 서평단에 당첨되어 <화성의 폐허>로 바꿔 읽고 있다.
김진숙 씨의 퇴직 연설을 다시 봤다. 처음 볼 때도 그랬고 다시 볼 때도 그랬다. 왜 울컥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링크를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