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50
“시는 숨결, 메아리, 잔물결, 속삭임, 호흡과 영감, 심장 박동, 피와 공기, 잎들, 해안, 건초냄새, 어휘들의 소리, 흩어지는 말들, 입맞춤, 포옹, 감싸 안는 팔들, 빛과 그림자, 즐거움, 느낌, 떨림들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P.25
힘든 계절에 겨우 할 수 있는 일은 이 책을 읽는 일, 그뿐이었다. 틈틈이 맥주를 마셨고 딸을 봤으며 수영을 했고 면접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내 여름은 7월 중순, 그날로부터 급격히 습하고 더워졌는데, 근 한 달 반을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손에 잡힐 리 없는 책을 애써 잡으려 할 때, 그나마 잡혔던 책은 이 책뿐이었다.
시에 관한 책이다. 설명이 없다. 평론도 아니고 사회 비평도 아니다. 엄청난 문학 이론이 나오지도 않고 역사와 이론을 가져와 시인과 시를 판단하지도 않는다. 얼핏 견고해 보이는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에게, 물질에 기대고 세월에 치이면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시가 해왔던 일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왜 돈이 안 되는 시를 읽었고 외우려 했으며 그 시로 마음을 전하려 했던가. 이데올로기의 격랑을 겪으면서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마치 무궁화호와 KTX의 속도 차이만큼 급격히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고 기댔던 가치관이 사라지는 세상 속에서, 사실과 객관, 기술과 증명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왜 끝끝내 시를 읽으며 살아왔던가. 저자는 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시인은 사그라지는 목소리를 듣고 멀리서 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백마일 밖에서 밀려오는 파도의 소리를 듣는다. 산맥 너머에서 달려오는 봄의 소식을 먼저 듣고 시베리아에서 웅크리고 있는 겨울의 예고를 미리 접한다. 우리가 보지 않는 것을 보며 보지 못한 쪽에서 본다. 다들 보고 있는 것이 아닌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다들 보고 있는 것은 다들 보고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본다. 설령 함께 보더라도 다른 색의 안경을 끼고 본다. 그는 창조주이며 장의사이고 봄이며 겨울이고 폭풍이자 고요다. 불이며 물이고 폭우이며 폭설이다. 변함없다고 주장하는 일상을 고통스럽게 통과하며 입은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내 것과 닮은 그 상처를. 그것이 시와 시인의 일이다.
전할 수 없는 것은 옷을 입고 온다. 우리는 그대로 전하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날것으로, 알몸으로 오는 진실을 감당할 수 없기에 시인의 의미는 옷을 입고 온다. 그것이 은유다. 우리는 그 은유의 숲에서 겨우 안도한다. 알려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은유의 숲에서 그저 안도할 뿐이다. 그러다 보이는 것은 보고 들리는 것은 듣고 알아챈 비밀에 잠시 웃고 울 뿐이다. 그것이 시인과 시가 우리에게 올 때, 그리고 우리가 시와 시인에게 갈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제, 직업적으로 더 많이 책을 읽어야 한다. 오랫동안, 그러니까 거의 십여 년 동안 딸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나마 후배가 판을 벌여 몇몇 청춘에게 몇 년 전 카피라이팅을 가르친 적이 있을 뿐이다. 이제는 내가 해 왔던 일-광고와 홍보, 조사와 분석, 마케팅 전략과 커뮤니케이션 전술의 수립 등 - 과 더불어 앞서 말한 일도 병행하게 됐다. 하여, 어쩌면 앞으론, 이렇게까지 마음으로 책을 읽는 일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런 예감 때문에 이 여름, 술에 흔들리면서도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 내가 좋아하는 사사키 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이 비중 있게 인용된다. 읽지는 않았지만 갖고 있는 김동규 교수님의 <철학의 모비딕 : 예술, 존재, 하이데거>와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도 인용된다. 이 외에도 평소 좋아하고 즐겨 읽었던 들뢰즈, 아감벤, 바우만, 니체, 보르헤스, 서동욱, 김재인, 한병철, 김현경 등의 책이 인용됐다. 인용문을 볼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세상과 세월, 맘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 책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책이, 그리고 독서가 무기가 된다고들 말하는데, 그 의견에 대한 동의는 유보한다. 무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최소한 내게 있어 책은 방패, 피할 성(城)은 된다. 저들은 그 성벽을 쌓은 거대한 돌들이며 외성과 내성이며 해자(垓字)이며 망루다.
매거진의 이름을 바꾸려 한다. 동해선은 당분간 탈 일이 없으니. 물론 마땅한 이름이 떠오를 때까진, 이름은 유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