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선에서 읽은 책 142
어릴 때, 젊을 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가 있다. 당연하게도 수십 년 전에 읽었을 때와 다른 기분이 든다. 분명 카프카의 <법 앞에서>와 <변신>을 읽었는데, 그리고 분명 “이런” 느낌을 받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변신>을 다시 읽으면서, 흠칫 놀랐다. 이 소설들이 이렇게까지 막막한 소설이었던가.
막막함이다. 카프카의 세계는 막막하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막막함이다. 출구가 없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물꾸물, 꼼지락꼼지락, 꾸역꾸역 살아간다. 희망의 빛이 사라진 곳에서, 어제의 일상이 박탈된 곳에서, 한 개인의 가치와 존재감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운 곳에서, 그렇게 살아간다.
이 단편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무력한 개인, 다른 하나는 헛된 희망, 마지막은 삶의 비참이다. <법 앞에서>와 <황제의 전갈>, <만리장성의 축조 때>, <양동이 기사>, <독수리>의 인물과 이야기는 법과 국가, 행정, 심지어 사회 속에서 존재감 없는 무력한 개인을 표현하고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의 헛된 수고와 기다림은 거대하고 강고한 것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이유도 모르고 권력의 출처도 모르며 명령의 합리성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 삶은 헛된 희망으로 유지된다. <변신>을 읽는 동안 알 수 없는 슬픔이 피어올랐던 건, 그레고르가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과 여동생과 가족의 미래를 그는 최후까지 상상한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고 목소리까지 잃어, 결국엔 한 마리 벌레로 살아가고 벌레로 죽는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여동생의 음악학교 진학을 꿈꾸는 건, 비극이다.
삶이 비극인 건, 최악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이 끝내 좌절되기 때문이다. <독수리>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독수리를 죽일 총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죽는다.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때 더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는 이처럼, 그가 막 희망을 가졌을 때 최후의 일격이 그를 덮친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꿈이 없는 사람에게 삶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다. 비참이다.
<굴>을 읽는 내내, 난 삶의 비참을 보는 듯했다. 최악의 삶의 조건에서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 현재 주어진 삶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려는 미력한 시도를 목격했다. 꿈틀대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이것저것을 축적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격려하는, 짧은 휴식과 그것이 가능한 공간에서 달콤한 꿈을 꾸는 인물을 봤다. 인물인가. 알 수 없다. <법 앞에서>의 주인공도 자신의 처지를 조금도 개선하지 못한다. 숱한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좌절된다. 다른 사람은 다 들어가는 것 같은데, 다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자신만 안 된다. 불합리하다. 부조리하다. 불평등하다. 그러나 그 삶은 오직 그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비참하지만 어쩔 수 없다. 끝까지, 죽어가면서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살다가 죽음의 비참을 맞이한다. 비참에서 참혹으로.
유다 다대오는 가톨릭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영화 <맨 온 파이어>에서 소녀가 보디가드에게 선물로 준 묵주에 이 성인이 달려 있다. 카프카의 소설은 이 성인을 닮아 있다. 삶의 막막함과 비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살아내야만 하는 이들의 그 모습을 무정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 끝에 작게 반짝이는 뭔가가 있다.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돌연한 출발>, <옆 마을>과 같은 짧은 소설 속에서 그는 삶의 우연성, 돌발성,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삶의 다른 국면과 양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리멸렬하고 비참하며 막막하기까지 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 또는 가능한 삶,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무모한 시도와 그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소박한 용기, 단 한 번 발휘될지도 모를, 이 역시 좌절로, 더 큰 절망과 패배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그 용기에 대하 말한다.
하여, 카프카는 유다 다대오가 된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탈주의 가능성을 귓가에 속삭이는 동조자가 된다. 유대인으로 프라하에 살면서 독일어로 글을 썼던 그가 몸소 겪었던 그 막막함, 그 삶의 지루한 궤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마치 탈옥의 비법을 숨겨 놓는 선배 탈옥범처럼 숨겨 놨다. 벗어나면 된다. 거부하면 된다. 저항하면 된다. 세상 밖으로, 틀 밖으로, 정해진 궤도 밖으로 튀어 나가면 된다. 그것 자체가 다른 삶의 가능성을 향할 수 있는 방법, 그 자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표제를 <돌연한 출발>로 정한 것은 유다 다대오를 닮은 그, 탈주의 방법을 숨겨 놓은 그에 대한 일종의 헌사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