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품에서 시작하는 문해력 수업 02
저는 일 년에 50권 정도 읽습니다. 서평을 남긴 책의 권수로만 따지면 말이죠. 그런데 상당히 분야가 좁습니다. 십여 년 전에는 라캉이라는 정신분석학자를 중심으로 그를 공부한 국내외 학자들의 이론서적과 에세이, 또 라캉이 남긴 책과 강의록을 읽어 왔습니다. 물론 제가 사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분야이지만 이상하게 재미가 있었습니다. 최근 5,6년 동안은 들뢰즈라는 철학자를 중심에 놓고 그를 공부한 학자들의 책과 들뢰즈가 세상에 남긴 책들을 주로 읽었습니다. 왜냐고요? 재미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순전히 재미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학자와 그가 남긴 이론, 그 이론을 공부한 사람들의 책을 읽고 있는 겁니다. 물론 사이사이, 다른 분야나 다른 작가의 책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그야말로 한 놈만 “팰” 때가 있습니다. 올해, 그러니까 2025년 상반기엔 신형철이라는 문학평론가에게 그야말로 꽂혀서 그의 책을 내리 세 권 읽었습니다. 그 전해엔 서동욱이라는 철학자이자 시인에게 꽂혀 네다섯 권 내리읽었었죠. 아직 읽지 않은 서동욱의 책이 두 권이나 더 있어서 조만간 펼쳐볼 생각입니다.
이게 정상일까요? 정상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소위 독서가들은 대체로 저와 비슷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는 작가나 장르가 있어 그걸 한동안 읽다가 나이가 들면 작가나 장르를 갈아타고 그러다 점점 더 심오한 책으로 접어듭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책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집에 있던 계몽사 위인전집과 백과사전이었습니다. 그거 외엔 책이 없었죠. 그래서 위인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당시엔 도서관도 흔치 않았고 집에 책이 많거나 독서가 어른이 있는 집도 거의 없어서 책을 빌릴 때도 없었죠. 그렇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후, 사춘기가 올 즘, 중학교에 들어가서 추리소설에 빠져들었습니다. 문고판을 열심히 사서 읽었죠. 덕분에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광팬이 됐죠. 엄밀히 말하면 셜록 홈스와 에큘 포와로의 팬이 됐다고 봐야겠죠. 또 중학교에 올라가니 집에 책이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책을 빌려 봤습니다. 헤르만 헤세도, 생 텍쥐베리도 그때 읽었죠.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다른 친구들보다 더 저 주인공들과 작가들에 대해 많이 알고야 말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죠. 저에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제 딸을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희 부부도 다른 이들처럼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줬습니다. 앤소니 브라운과 백희나 작가의 책은 물론이고 <달님이 따라와요>와 같은 다양한 국내 작가의 동화책도 읽어줬습니다. 그때마다 딸은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책이 꼭 한두 권 있었습니다. 대여섯 권 사들여서 읽어주다 보면 그중 한두 권에, 그야말로 꽂히는 거죠. 결국 동화책은 점점 늘어나는데, 매번 밤마다 읽어주는 책은 몇 권 남짓이었습니다. 사실 부모 입장에선 이것도 읽고 저것도 읽으면서 다양한 자극을 받길 바라는데, 애가 좋다고 하면 계속 읽어줄 수밖에 없죠.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왜 딸이 자기가 맘에 들어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딸이 동화책을 들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깜짝 놀랐죠. 얘가 스스로 한글을 깨칠 만큼 천재였나 하고 호들갑을 살짝 떨었죠.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딸은 각 페이지의 내용을 정확히 외워서 페이지를 넘겨야 할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넘기면서 일종의 동화책 암송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엔 어떻게 됐을까요. 동화책 중에 <돼지 루퍼스, 학교에 가다.>가 있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은 돼지 루퍼스와 들어올 조건에 대해 말하는 교장 선생님 간의 대화가 이 동화책의 골간을 이루죠. 이 책은 딸이 그전에 읽었던 책들보다 내용이 길고 상황이 복잡합니다. 그런데 딸은 이 책을 아주 좋아했죠. 당연히 외우고 싶었던 딸은 무한 반복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수백, 수천 번 읽어줬을 겁니다. 결국 딸은 그 긴 동화의 내용을 외워서 등장인물의 목소리까지 연기하며 암송할 수 있게 됐죠. 삼촌에게 그걸 보여줘서 삼촌이 조카가 천재인 줄 알고 깜짝 놀랐을 정도로 딸은 완벽하게 내용과 페이지 넘김의 타이밍을 조화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인 고교 시절 친구와 고등학교 교사인 지인에게 이 얘기를 화제로 대화를 한 후, 우리는 이 현상이 상당히 의미 있는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교육적으로, 독서적으로 말이죠.
독서가의 욕망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알고자 하는 욕망, 하나는 재미를 느끼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여기에 더 근본적인 욕망이 하나 더 자리하고 있죠. 재미있고 알고 싶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망 말이죠. 독서가에서 애서가, 애서가에서 장서가로 발전하는 건 결국 이 세 가지 욕망이 한데 어우러진 당연한 결과인 것이죠. 두세 살 무렵의 딸에겐 이 세 가지가 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자기도 그 마음이 뭔지 몰랐을 테지만 말이죠. 아마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야, 이 동화책 재미있는데, 그런데 이거 엄마와 아빠가 읽어줘야 들을 수 있다면 내 것이 아니잖아. 내가 펼쳐서 “읽어야” 내 것이 되는 거잖아. 그럼 난 외워야겠다. 외워서 거기에 딱 맞춰서 책장을 넘겨야겠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이죠. 즉 책을 펼치고 읽어야만 책이 내 것이 되고 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내 것이 된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겠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선 근본적인 덕목 하나가 필요합니다. 바로 인내심, 그 인내심이 바탕이 되는 집요함과 집중력입니다. 딸은 외우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당연히 알 리가 없죠. 다만 재미있는 걸 많이 듣고 엄마, 아빠가 페이지 넘기는 걸 유심히 봤을 뿐입니다. 그것도 수십, 수백 차례 말이죠. 자기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많이 듣고 봐야만 자기가 원하는 걸 달성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걸 한 겁니다. 그때가 올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하나의 동화를 반복해서 듣고 본 겁니다. 여기에 저와 아내의 인내심도 한몫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우리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상상도 못 했죠.
그 결과, 현재 중학생이 된 딸은 책상에 서너 시간 앉아 있는 건 어렵지 않은, 엉덩이가 무거운 학생이 됐습니다. 알고 싶고 궁금한 건 스스로 찾아서 연구하고, 다양한 접근법이 필요하면 아빠에게 부탁해서 함께 검색해 보고 필요한 책은 구하거나 대출해서 읽어보는 학생이 됐죠. 알고자 하는 욕망이 채워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런 학생이 된 겁니다. 근본적으론 새로운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에 깊은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됐습니다. 새로운 것 앞에서 걱정을 하고 주눅이 드는 것이 아니라 저것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내 세계가 더 넓어지겠구나, 새로 배운 걸 아빠에게 자랑하고 아빠랑 얘기해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하는 학생이 됐습니다.
또,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든 아이가 이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여러 번 읽어달라고 하는 아이는 있어도 그것을 외우기 위해 그러는 아이는 흔치 않고, 설령 아이에게 그런 욕심이 있어도 부모가 피곤해서, 지루해서, 새롭고 다양한 걸 더 많이 접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대부분은 몇 번 읽고 만다고 합니다. 어쩌면 많은 아이들의 가능성이 부모의 사소한 결정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저 또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분명 저도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선택을 했을 테니까요. 지금이라도 그런 선택을 최소화하기 바라며, 또 많은 부모님들이 그런 실수를 줄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연재를 이어가려 합니다.
목차도 준비되어 있고 하고 싶은 말도 정리되어 있어 일주일에 두 번, 금/토에 연재를 할까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