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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다 Nov 02. 2023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 가을날 어느 하루

   맑은 가을 하늘에 손을 쑥 하고 넣으면 구름이라도 잡힐 것 같다.

  그런 가을날, 안톤 슈낙이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떠 오른다. 감성에세이 중 최고라 생각하는 나는, 어린 시절 살던 집의 나무계단, 시골 울타리 곁의 작은 우체통, 대도시의 가로등, 녹슨 돌쩌귀가 삐걱대는 대문, 가슴 시린 첫사랑의 추억 등 낭만과 서정성을 지닌 안톤 슈낙의 섬세한 문장을 좋아한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떠 올리며 지나가는 가을에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쓴다.


  자아를 혼자 만들어 갈 수는 없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그물망 속에 다양한 측면으로 다르게 형성된다.     


  하나둘 곁을 떠날 때마다 우리를 슬프게 한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땀 흘리며 뛰어놀고, 밤송이머리로 막걸릿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먼 길을 떠난다. 철모르는 아이가 장례식장에서 웃으며 뛰어놀 때, 다시 찾은 초등학교 운동장이 한없이 작아 보일 때, 시간이 지나간 것 아니라 화살처럼 흘러간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문득 찾은 시장통의 시끌벅적한 소리의 꿈틀거림은 활력소이다.

  과일가게, 건어물 가게를 지나 박상 가게는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이다. “뻥”하고 박상을 튀기면 날아가 흩어진 것을 주워 먹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돌아 나가는 모퉁이, 생선가게의 비린내를 나는 더 없이 사랑한다. 고기 장사하는 엄마가 곧, 나를 맞이할 것 같은데, 고기 사소! 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지나가 버린 삶의 무게가 나를 슬프게 한다.     


  새벽시장으로 달려가는 트럭에 실린 소들과 눈망울이 마주친다.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뉴스에,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송아지에게 후들거리는 다리로 젖을 먹인다. 숟가락을 들며 본 소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을 뚫리게 한다. 구제역으로 살 처분되는 소는 안락사 주사를 준다. 고통스러워 마취제 주사를 함께 줘야 한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 돈 드는 게 아까워 잔혹한 사람은 안락사 주사만 맞힌다. 어미 소가 죽음을 곁에 두고 고통에 부들부들 떤다. 안간힘을 다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죽음을 버티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이 떠올라 나를 슬프게 한다.    

 

  온 가족이 다 모이는 명절날,

  누렇게 익은 황금 들판과 뛰어놀던 메뚜기. 가재와 미꾸라지를 잡던 개울은 물소리가 잔잔하고 개구지게 흘렀다. 첨벙거리며 반도로 잡아, 함께 끓여 먹은 수제비 추어탕은 그 어떤 맛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은 쏟아져 점점이 눈에 박힐 것만 같아 자꾸만 눈을 껌벅거리던 고향 풍경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싼 숲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 공연이 슬프게 한다.

  304명의 아이를 수장한 세월호.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잊지 말자고 피를 토하는 외침을 돈 멍에로 가장하는 쓰레기 언론들. 책임자 처벌과 진상조사가 없어, 잊지 말자고 잊지 말자고 아픔을 심장에 묻고 공연하는 엄마들을 저버리는 세상이 나를 슬프게 한다. 보고 싶다! 고 차라리 울면 슬픔이라도 조금 덜어낼 건데, 한 분 한 분 슬픔을 갈무리 한 채 외치는 목소리가 나를 슬프게 한다.   

  

  책을 찾기 위해 책장을 뒤지다, 툭 떨어진 편지 한 통이 나를 슬프게 한다.

  “우리는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나도 너를 좋아하지만 주어진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 잠시 떨어져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생각해 보고 다시 만나자. 이 편지가 끝이 아니라 시작일 거야!” 갈래머리와 까까머리 순수한 마음으로 만나 편지가 오가던 마지막 그녀의 편지는 나를 슬프게 한다. 잊히고도 남은 시간, 되돌아보는 편지는 추억을 곱씹게 되어 마음 한편 비워 둔 곳 떨림을 느낀다.

  “잘살고 있지?, 결혼은 했나 몰라. 행복하게 살아!” 주소가 없어 붙이지 못하는 편지는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나를 슬프게 한다.     


  길옆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국화, 투구꽃이 아름다운 계절.

  설렘 없이 아픔 없이 그렇게 마음 쓰는 일 없이. 별일 없이 사는데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문득 혼자라는 외로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완전한 자유’는 혼자라는 외로움을 감내해야 한다지만, 가슴을 어슬렁거리는 군중 속의 고독은 기억으로도 채우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좋은 가족이 있어도 채우지 못하는 그 무엇, 외로움이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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