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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호 Jun 07. 2024

나와 당근과 흰모자손님

2023년 3월  4일 단 하나의 명장면

날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자 옷장을 비우고 싶어졌다. 둘째 은호를 보행기에 앉혀놓고 옷장을 헤집었다.더이상 입을 것 같진 않지만 깨끗하고 낡지 않은 옷들이 여러 벌 있었다. 오천 원, 만 원에 내놓았다.싸게 내놓아서인지 하루종일 연락이 왔다.

하늘색 원피스에 '이 옷 쬐금 야한가요?'묻는 채팅이 왔길래 '안에 이너를 안 입으면 쬐금 야할 수도 있겠네요.'하고 대답을 해드렸다.

'용기가 안 나네요.'

'쫌 시원하게 파이긴 했죠ㅎㅎ'

대화는 미련없이 종료됐다.


몇 분 뒤 단정한 갈색 시폰원피스에 '이거 뒷모습은 어떠냐'는 채팅이 왔는데 좀 전의 그 아이디였다. 오늘 내로 기필코 옷들을 팔아 정리해 버리리 마음먹은 지라 뒷모습을 요리조리 정성껏 찍어 보내드렸다.

'나이 있는 사람도 입을 수 있냐'고 물으셔서 '저도 나이 많이 먹었는데 괜찮던데요 ㅎㅎ'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오겠다고 하셨다.


쇼핑백 겉면에 예쁘게 입으시라고 짧은 글을 써서 집 앞에 둔 뒤 아무 때나 편할 때 가져가시고 입금하시라고 했다. 애초에 문고리 거래(판매자는 문에 걸어놓고 구매자가 가져가는 비대면 거래)만 할 수 있다고 써 놓은 터였다.


애기보며 청소하느라 한참 정신없는 와중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좀 귀찮아서 없는 척할까 생각했지만 둘째가 너무 꽥꽥 소리를 질러대서 사람 있는 티가 다 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드렸다.

하얀색 귀여운 털모자를 쓴 60대 아주머니가 서계셨다. 날 보자 웃으며 말씀하셨다.


"당근^^"


아, 나이가 다고 하신 게 정말로 많다고 하신 거구나. 살짝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같이 옷을 꺼내 상태도 확인하고 스몰토크도 나눴다.


무언가 알 수 없이 몽글몽글한 기분이 되었으나 그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알기도 전에 4시가 지났으므로 서둘러 둘째를 둘러업고 첫째 하원을 시키러 갔다.

첫째 아이 은유의 담임선생님께서 "어머님~~ 은유가 오늘 밥도 잘 먹고 수업도 정말 잘 참여했어요. 은유 최고! 하이파이브 짝짝!" 하시며 은유의 손바닥을 쳐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 앞에 대형승합차가 서있었다. 자주 보는 차다. 차에는 <시립ㅇㅇ실버케어센터>라고 쓰여 있다.

90살이 넘은 것 같은 할아버지가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내리고 계셨다. 딸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마중 나와 계셨다. 같이 내린 요양사가 딸에게 말했다.

"우리 어르신 오늘 수업도 너무너무 잘하시고요. 식사도 정말 잘하셨어요. 어르신 최고! "

그리곤 할아버지의 손바닥을 경쾌하게 짝짝 쳐주셨다.


나는 유모차로 아이들을 산책시키는 척하며 계속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 광경, 그러니까 둘이 합쳐도 34개월 밖에 안 된 나의 아기들과 함께 90살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우리 아기들처럼 대우받는 그 광경을 말이다.

할아버지는 걸음이 정말 느리셨고 힘도 없어 보이셨지만 얼굴에 띈 옅은 미소가 자신감 넘쳐 보였고 운전기사분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잡고 흔들며 장난을 거셨다.


인생은 끝없이 용기를 내는 일.

이라고 생각했다.


아기들이 어린이집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과 90살에 가까운 노인들이 실버케어센터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은 같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은 환경이 불편하고 어색할 것이고 그저 편하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속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적응을 해낸 것이다.


갑자기 마음이 벅찼다. 당장 누구라도 붙잡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입는 원피스를 사서 입어보고 싶은 그 마음도 굉장한 용기겠지. 나는 당근 어플을 켜서 아까 갈색 옷을 산 용기 있는 나의 구매자에게 채팅을 보냈다.


"잠시 뵈었지만 제가 지금 상상해 보니 옷이 근사하게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봄이 오면 화사하게 한 번 입어보세요. 친구분들이 멋쟁이라고 할 거예요."

얼마 뒤 사진후기가 왔길래 혹시나 원피스를 입고 찍어 보내주셨나? 설레며 열어보니 내가 쇼핑백에 쓴 간단한 편지를 찍어 보내주시며 당근을 시작한 이후로 가장 기분 좋은 날이라고 하셨다.



봄이 오면 내 구매자님은 산뜻하게 원피스를 입고 바람에 산들산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길을 걷겠지.

우리 아파트 할아버지는 두꺼운 패딩을 벗고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센터에서 또 멋지게 무언가를 배우시겠지. 신나게 박수를 치며 노래하시고 어쩌면 컴퓨터를 배우실지도 몰라.

우리 은유는 이제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서 새 친구들과 새 경험을 하고 새 추억을 쌓겠지.


그렇다면 나도 무언갈 해봐야지. 용기를 내야지.

실패해도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가혹하게 용기를 빼앗고 또 서로에게 멋대로 용기를 불어넣기도 하는 하찮고 귀여운 인간들일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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