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형 여자의 낚시법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 알코올을 사랑해서 맺은 결실일까? 아니면 만족스럽지 않은 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일까? 떨리는 손으로 몇 글자를 끄적이고는 간신히 전송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공수교육은 낙하산을 메고 500m 하늘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훈련이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뛰어내리려는 찰나에 우물쭈물한다. 이때 가장 좋은 처방은 다른 생각 못하도록 순식간에 밀어버리는 것이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일도 그렇게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리고 이내 문자를 보았을 상대방의 심정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렇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고, 남극처럼 차갑고 건조한 정적만이 흘렀다.
현재의 와이프와 연애시절, 연인이 되고 한 달 채 되지 않은 무렵이었다. 나는 문자로 헤어지자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고,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시답잖은 변명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너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헤어짐을 선택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는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멍멍이 짖는 소리에 가까운 변명을 했다. 여하튼, 당시에는 그녀와 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고깃집에서 고기도 잘 안 먹고 지루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은 새까맣게 구워지고 있었다.(나중에 알았지만, 우리 와이프는 고기를 싫어한다.) 나는 낯선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이 즐거웠다가도 가까워지기 시작할수록 부담스러워지곤 했다.(나는 회피형 애착 유형이 틀림없다.) 어쩌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은 그녀와 헤어지기 위한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연애의 시작도 내가 먼저 했었다. 한번 두 번의 만남을 통해 나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을 느꼈던 것은 분명하지만, 나의 불안정 애착도 한몫했을 것이다.
무례한 이별통보에 한참 뒤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주변이 웅성거리는 게 술집인 것 같았다. 역시나 그녀도 술을 좋아했다.
"뭔데 이 문자는. 이제 그만 하자꼬?"
"그래 알겠데이. 문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말로 듣고 싶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술집에서 술을 먹으며 쿨하게 털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양심의 가책을 덜 받을 테니까.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 달 동안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던 느낌을 따르기로 했다. 짧은 연애를 끝내고 다시 혼자로 돌아왔다. 평온의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고, 짧았던 연애의 추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과의 술자리 안주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내 눈앞에 띄면 죽을 줄 알아라.
세상 쿨하게 헤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눈에 띄면 죽는다는 내용의 문자와 함께 욕설이 담겨 있었다. 당시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일방적인 통보를 했던 잘못도 있었기 때문에 대꾸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문자 속에서 전달되는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아픔이 전해졌다. 진실로 그녀의 아픔이 전해진 건지, 내 마음의 아픔을 투영한 건지 잘 모르겠다.(지금도 그때의 문자를 지우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감히 다시 들여다보지 못한다. 봉인해 둔 아픔이 깨어날까 두려워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드르르르"
휴대폰 진동이 연신 울려대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번호였다. 이제 연인을 알리는 애칭 대신, 열 한자리 아라비아 숫자만이 휴대폰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공포의 문자 이후 지속적으로 오는 전화를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외면하는 그 순간에는 가슴 한편이 저미어 왔다. 애써 매몰차게 무시했고, 결국 연락처를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말 나를 좋아했던 것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고, 그녀가 내 불안정 애착의 희생자였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드르르르"
어느 날 또 휴대폰이 울렸다. 보니 그녀의 전화번호는 아니고(차단했기에 당연하다. 하지만 차단한 번호가 연락이 왔었다는 내역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내역을 확인할 때마다 슬펐던 기억이 난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진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지 궁금하여 결국 전화를 받았다. 진동 한 두 번을 더 지나쳤다면, 아마도 우리 인연은 끝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르는 번호임에도 그녀임을 직감하고, 그 정성이 갸륵하여 다시 받았는지도 모른다.
"여... 여보세요?"
내가 말했다.
"오빠, 드디어 전화받았네."
역시 전화는 그녀에게서 온 것이었다.
"으응, 오랜만이네..."
그렇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의 요지는 인연을 끊지는 말고, 좋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빠 동생으로써의 만남을 새롭게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러한 만남은 한 달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보아온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완전히 변한 것 같았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친절했다. 내가 수염을 길러도, 머리를 길러도 별말 없이 잘 받아주었다!(우리 와이프가 질색하는 것 중 하나이다.)
'오... 이 정도면 다시 사귈 수도 있겠는데?'
속으로 처음부터 이렇게 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아쉬워했다. 날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사귀는 게 좋을까 하는 갖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가 사귈지 그만둘지의 기로에 설 때가 왔다. 우리는 맥주 캔을 들고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다. 찾은 곳은 하천이 가운데 흘러가고, 양 옆으로 산책로가 잘 정비된 곳이었다. 적당한 돌덩이를 찾아 나란히 앉았다. 해는 넘어간 지 오래고,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 외에는 모두가 숨죽이고 있었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잔잔해졌다. 지금 상태라면 어떠한 이야기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일, 가족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일 등을 들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녀의 과거는 슬픈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슬퍼했고, 눈물을 훔치는 동안 연신 맥주만 들이켰다.
"오빠, 나는 오늘이 우리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하고 왔데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오늘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한 장 한 장 특별한 사진으로 인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그토록 열정적으로 하루를 보내려고 했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눈물샘이 넘쳐흘렀다. 특별한 사진을 태워버릴 생각을 하니 도저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오빠, 이제 우짜지... 사귀지 않을 거면, 인자 그만하자."
"괜찮타, 그만하자고 해도."
그녀의 모습은 맹수 앞에 선 사슴과 같아 보였다. 그리고 사슴은 도망가기를 포기한 듯 커다란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그토록 상처와 슬픔의 파도를 겪은 그녀가 다시 슬픔의 바다로 돌아가는 모습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을까.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그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가진 상처를 알게 된 이상, 다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다. 이제 슬픔의 바다를 나와 안전한 육지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다시 연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시간이 지나니, 확실히 연애 때와는 달라졌다.(물론, 나도 그럴 것이다.) 기억 속에서 예전의 아내 모습을 더듬어 다소 불평 어린 말투로 말했다.
"자기 요즘, 결혼 전이랑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인자 다 잡은 물고기 아이가?
그때 깨달았다. 그녀는 맹수 앞의 사슴이 아니었다. 나는 생쥐였고, 그녀는 쥐를 잡기 위해 동정심 어린 눈망울을 한 고양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AB형 여자는 낚시를 할 때, 계획적이고 전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