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형 여자의 직관
결혼 전, 와이프와 나는 공포영화를 자주 봤었다. 특히, 공포 중에서도 피가 낭자하는 고어물을 즐겨봤다. 하지만 귀신이 갑툭튀 하는 영화는 둘 다 보지 못했다.(예전에 셔터를 보다가 시작 10분 만에 포기하기도 했었다.) 고어물에 있어서는 어지간한 영화는 모두 봤다고 자부할 정도다. 연애 때는 매번 DVD방에 가서 공포영화를 즐겼었다. 당시 즐겨 갔던 곳은 꽤 넓은 규모의 DVD방이었다. 4층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각 층 끄트머리 방은 화재라도 나면 지옥도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소방설비 등은 기억 안 나지만, 끄트머리 쪽에 따로 비상구는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곳은 한 여름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현명한 피난처였다. 어두침침하고 둘만의 격리된 공간에서의 은밀한 유혹도 뒤로한 채, 영화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영화에 몰입하여 또 다른 세계의 멀티버스에 탑승하려고 할 때면 늘 방해꾼이 나타났었다.
"저 사람이 아까 나왔던 갸가?"
"마이크? 마이크가 누고?"
"쟈가 누구라고?"
속사포로 그녀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
"음, 나도 잘 모르겠네."
라고 귀찮아서 얼버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녀는 다시 영화를 앞으로 돌린다.(집에서 영화를 볼 경우에 그렇다.) 그 덕분에 나는 이미 봤던 장면인 듯한 데자뷔를 강제로 수차례 경험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DVD방에서는 적어도 앞으로 돌리기 기능이 없으니 다행이었다.
"하나하나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답답해 죽겠다."
그녀가 말했다.
'그냥 대충 보면 되지, 보다 보면 다 이해될낀데...'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계속되는 데자뷔 장면에 마음속 혼잣말을 하곤 했다. 이때 표정관리가 중요하다. 잘못했다가는 시작도 전에 냉랭한 분위기로 영화는 커녕 자막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이처럼 외국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그녀지만, 평소에 본인이 눈썰미가 좋다고 말한다. 특히, 숨은 그림 찾기나 틀린 그림 찾기를 잘한다고 한다. 연애할 때 가끔 피시방에 가서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나보다는 잘했다. 그녀는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이다. 한 번은 안경점에서 시력검사를 했는데, 동체시력이 약하다는 판정이 나왔다. 동체시력이 약하다 보니 움직이는 사물에 쉽게 멀미를 한다. 그래서인지 액션 영화에서의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을 잘 보지 못한다.(그러나 연신 눈을 움직여야 하는 틀린 그림 찾기나 주변을 맴도는 스텔스 모기를 찾아내는 것을 보면 신기할 뿐이다.) 외국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니, 영화 속 등장인물이 많을수록 힘들어한다. 특히, 미스터리 추리물을 볼 때는 더 많은 인물정보와 복잡한 대화 내용에 대한 질문 공세가 이어진다. 얼굴도 구분 안 되는 판에 왜 그렇게 이름은 또 어려운 건지. 그렇다고 안면인식 장애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TV프로그램에 일반인이 나올 때면 어떤 연예인을 닮았는지 기가 막히게 짚어내기 때문이다. 다만, 외국사람을 보는 눈썰미가 약할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을 봤을 때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아본다고 한다. 관상을 배운 적은 없고, 다만 본인의 느낌이 정확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항상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오빠를 한눈에 딱 알아봤다 아이가~"
물론 이런 멘트는 술 한잔 들어가야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근데 오빠는 헤어지자고 했제?"
라며 여운을 남긴다. 그럴 때면 나는 롤러코스터에 매달린 채, 붕 떴다가 급격히 가라앉는다.
언젠가 그녀가 자주 꾸는 꿈 이야기를 했다. 배경은 중세시대다. 하늘을 향해 원형으로 올라가는 길고 높은 계단이 있었다. 하나님에게 닿기 위해 지었던 바벨탑과 같은 형상을 닮았다. 그리고 그 계단을 누군가와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떤 왕족이었다고 한다. 나쁜 무리들의 폭동과 모함이 발생했고 그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손잡고 함께 도망가는 사람은 흐릿하지만 아주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결혼식 때 나는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그런 바람 때문인지 신랑 신부 퇴장하는 순간에 혼자서 너무 빨리 걸어가 버렸다. 이에 와이프가 팔짱을 낀 채, 긴 드레스를 끌며 따라온다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혹시나 그때의 경험이 꿈으로 나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녀가 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하고 같이 도망가고 있었거든, 그 누구가 지금의 오빤 것 같데이."
"아마도 우리는 전생에도 같이 있었을끼라."
사람을 한눈에 딱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그녀. 과연 전생의 우리 인연을 알아본 것일까. 그녀는 전생을 믿는다. 전생이란 개념은 윤회사상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사상이 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정확하게는 불교 전에도 인도에 있었던 사상이다. 당시 인도 신분제인 카스트제도의 정당성을 위해 사용된 개념이기도 하다. 지금 미천한 신분은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한다.(그녀는 가끔 나에게 말한다. 오빠가 자기를 만나 고생하는 것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윤회와 전생의 개념을 깨 버린 것이 고타마 싯다르타이다.(윤회와 전생은 마음속 환상임을 주장한다.) 뭐, 전생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전생의 죄를 생각하며 불만 없이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와이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갸우뚱하며 대뜸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말은 우리의 강렬한 첫 만남을 영원히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p.s) 당시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본 적이 있었나 하고 한참 생각했던 것 같다.
AB형 여자는 자신의 직관을 믿으며, 눈썰미가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