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아들은 초2 아들이 아니다
책을 버렸다. 나와 길게는 25년 지기 책까지 포함했다.
책을 사면 버리지 못해서 이사를 할 때마다 책이 많아져 어느 해에는 이사를 위해 책장을 몇 개 더 짰다. 1년 전쯤 책을 안 사기로 마음먹었지만, 좋은 책을 발견하면 바로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고는 했다.
언젠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송인 김종국의 방을 공개한 적이 있다. 물건이 쟁여 있고, 창고처럼 쓰는 2층에는 먼지 쌓인 물건들이 가득했는데, 그걸 하나하나 꺼내면서 김종국이 보인 반응을 보고 결국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버려.”
이건 후배 누가 선물해 준 거고, 그건 첫사랑과의 추억이 담긴 거고, 저건 무언가를 기념해서 산 거고, 받은 거고….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기억과 그 기억을 채우는 감정을 김종국은 차마 버리지 못했던 거였다.
책에 있어서는 나도 김종국과 비슷하다. 책 한 권 한 권에는 책 페이지만큼의 시간과 감정들이 들어 있다. 그걸 산 서점, 서가, 그날의 날씨, 읽을 때 막힌 지점, 다시 읽게 된 새벽, 그것이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두드린 세기와 박자…. 책장에 세로로 꽂힌 책등의 제목들은 내 인생의 앨범 같다. 분리수거함으로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둘째 봉이 방 책장에 꽂힌 책들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더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아이의 옛 사진을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 책과 아이와 내가 만든 장면들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간다. <와이(WHY)> 시리즈 책들도 그러하다.
봉이가 초등 2학년쯤이었나. 집에 있는 몇 권의 <와이> 시리즈에 빠져서는 한 번 본 책을 두 번 세 번 계속 보고는 그 내용을 내게 묻기도 했다. 우리는 시리즈 목록을 보면서 읽고 싶은 책들을 계속 집었다. 다 사주기에는 비용이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와이> 책은 집집마다 널려 있고 명절에 사촌형네 집에 가서 물려받아 오면 될 것 같았다. 퇴근길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 큰길가 헌책방이 보였다. 길가에 내놓은 책더미 중에서 <와이> 시리즈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앗, 저거다.
나는 그 주 주말에 봉이와 헌책방 사냥에 나섰다. 각자 배낭을 메고 버스를 타고 그 헌책방 근처에서 내렸다. 길가에 내놓은 책 말고도 안으로 들어가니 종류가 더 많았다. 봉이는 책을 고르는지 읽는지 알 수 없게 한참을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정말로 사서 가져갈 책을 골랐다. 이거, 이거, 저거, 또 저거… 집다 보니 꽤 무거웠다. 으악, 도저히 들고 갈 수가 없으니 몇 권을 빼자고 내가 봉이에게 제안했다. 봉이가 무엇을 뺄 것인지 뒤적이며 고민하다가 삼십 분이 훌쩍 더 지났다. 그렇게 봉이와 나는 사냥감들을 어깨에 메고 손에 들고 헌책방을 나왔다.
집 나온 지 무려 세 시간이 흘러 있었다. 우리는 근처 옛날통닭집으로 향했다. 버스 타고 오다가 찜한 가게였다. 처음 맛본 옛날통닭에 봉이는 홀릭되어 있었다. 한 마리면 둘이 충분할 줄 알았는데, 하나를 더 달라고 했다. 이제는 배까지 무거워지자 끄응,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어깨에 배낭을 메고 손에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에 섰다.
집에 가는 버스에 올라타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봉이는 그때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간질간질해서 웃음이 커다란 마스크처럼 얼굴을 온통 가렸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마스크는 여전히 얼굴에 걸려 있었다. 입으로는 아, 무거워, 아, 무거워, 쉼이 없었지만 마음은 실구름처럼 하늘을 떠다녔다.
까르르까르르 그때의 봉이의 웃음, 재잘거리는 목소리, 책장을 하염없이 넘기고 넘기고 넘기면서 집중하는 옆모습. 콧대보다 더 높은 입술. 힘이 들어가 주름이 질 것 같은 미간. 나는 아마 그 순간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 주, 다음 달, 다음 해에도 계속되고 이어지는 아주아주 평범한 일상이라고. 이렇게 그때를 한 조각 행복으로 추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학생 봉이가 엄마 마음을 헤집고 학교에 간 아침이면, 봉이 방에 가서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을 바라봤다. 오늘 본 사춘기 봉이의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고, <와이> 헌책을 잔뜩 등에 지고 온 그날을 떠올리며 위로받곤 했다.
나는 그 <와이> 책들을 내 책들과 함께 거실 복도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몇 년 전부턴가 한 번도 꺼내보지 않고 장식처럼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이제는 안녕을 고하기로 했다. 고층 아파트가 나란히 선 모양새로 책 건물이 들어섰다.
그렇게 두 달간 잠정적 쓰레기 더미가 집 안에서 치워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오며 가며 그것들을 안 보는 척 바라봤다. 복도가 좁으니 지나가다가 가끔 옷이 책에 걸리기도 했다. 와르르 무너지는 일도 감수해야 했다.
처음엔 내가 게을러진 줄 알았다. 예전과 달리 쓰레기를 쌓아두고도 잘 견디는 스타일로 변한 줄 알았다. 우울증이 생기면 쓰레기를 못 치운다더니 내가 우울증이 있나 보다, 했다. 그러다 비로소 내 진짜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 책들을 내 곁에 두고 싶은 마음, 좋은 시간으로만 채색된 과거를 붙잡고 싶은 마음, 엄마를 따라다니던 어린이 봉이의 천진했던 웃음과 목소리를.
쌓인 책 더미들을 보면서 계속 내게 물었다.
내가 허망한 것을 붙잡고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름하여 ‘기대’라는.
과거의 좋은 기억으로 현재를 왜곡하는 기대.
매 순간 변하고 있는 아들이 예전의 아가로 박제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기대.
아들의 성장을 응원하지 못하고 핸드폰만 본다고 화를 내는 무분별한 기대.
독립적인 성인이 되길 바란다면서 성인이 되는 다리를 잘라버리는 앞 못 보는 기대.
기대는 내 안에서 나를 파괴하는 괴물이었다.
더는 과거에 발목 붙잡혀서는 안 되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의 봉이를 과거 봉이의 그림자로 보지 않고, 뒤돌아보는 일을 하지 않겠다.
마침내 결심했다.
그리하여 복도에 서 있는 책 건물을 무너뜨렸다. 내다 버리기로 했다. 묵혀두었던 보자기들을 꺼내왔다. 핑크색, 초록색, 황금색, 노란색… 색색이 하나씩 꺼냈다. 네모의 보자기를 펼쳐서 그 중간에 책 더미를 올렸다. 보자기 크기에 맞추어 책 더미 높이도 조절했다.
다 싸니 총 일곱 개였다. <와이> 책들은 한 보자기 속에 넣었다. 현관에 먼지 쌓인 킥보드를 꺼냈다. 봉이 거였다. 킥보드 발판 정중앙에 책 보자기 한 무더기를 올렸다.
총 일곱 번을 왔다 갔다 했다. 두 번은 중간에 꾸러미가 쓰러져 길바닥에서 보자기를 다시 펼치고 책들을 정돈하는 일을 처음부터 했다. 킥보드에 올리고 다시 내리느라 오른쪽 옆구리와 허리에 무리가 갔다. 킥보드를 제자리에 두고 집에 들어와서는 휴대용 안마기로 아픈 부위를 풀어줬다. 안마기 손잡이에 손에 난 땀이 옮겨졌다. 온몸이 땀이었다. 오랜만에 볼에서도 땀이 나는 경험을 했다. 그 또한 쾌감이었다. 어떤 것도 쉽게 얻어지지 않으니까. 이 정도 땀은 흘려야 어리석음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봉이가 다시 핸드폰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런 봉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이제 그만 봉이를 바라보자. 나를 보자.
이제 그만 봉이를 위해 기도하자. 나를 위해 기도하자.
이제 그만 봉이가 먹고 싶은 게 무언지 묻지 말자.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묻자.
이제 그만 봉이바라기를 거두자. 나바라기를 하자.
이제 그만 과거를 떠올리자. 오늘을 살자.
에필로그
저녁 무렵 헌책 보따리를 둔 재활용장을 내려다봤다. 허걱. 보따리들이 사라졌다. 일곱 개가 전부 다. 주말이라 재활용 차가 다녀가지 않았고, 옆 쓰레기 더미는 그대로이니 분명 책 꾸러미들만 누가 가져간 것이리라. 그 안에는 책을 산 날을 기념하여 남긴 메모, 선물한 사람이 준 마음의 편지, 낙서와 기록들이 담겨 있다. 부끄러웠다. 내 이름이 버젓이 담긴 나의 과거들이 누군가의 손에서 펼쳐진다니 조금 끔찍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제 쓰레기라고,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헌책 보따리를 가져가신 분이여, 장담컨대 그 책들로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 책들로 꽤 괜찮은 성장을 할 겁니다. 누군가의 몇십 년을 켜켜이 품은 책들이거든요. 기쁨도 고통도, 성장도 아픔도, 성숙도 발전도 다 담겼답니다. 당신과 당신 가정에 풍요가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사진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