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니잖아요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7

by 이은호



- 철든 여자 -


요즘 같이 일하는 언니를 어떤 남자가 쫓아다닌다. 그런 언니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는 희철 씨와 같이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인데, 딥따 뚱뎅이다. 나이는 스물넷이라고 하는데 재수 아니 한 4수쯤 하고 나서, 지 실력을 절감했는지 대입을 포기하고 취직 공부를 한단다. 공무원 시험을 볼 거라는데 내가 보기에 애당초 그른 것 같다. 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니면서 무슨 공부람?


거기에 비하면 희철 씨는 완전 울트라 캡숑 짱이다. 얼굴 잘났지, 키 크지, 몸매 잘 빠졌지, 성격 좋지, 자상하지.. 는 아니고, 그러고 보니까 그는 참 말이 없는 편이다. 묻는 말에나 대답을 하지 여간해서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내가 뭐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만났으면 한 번쯤은 다정하게 '좋아한다'고 속삭여 주고 손도 쫌 잡아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모아 놓은 용돈으로 핸드폰을 사줘야겠다. 핸드폰이 있으면 그래도 보고 싶을 때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고, 잠들기 전에 '잘 자, 내 꿈 꿔!'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주 보고는 말을 못 해도 혹시 전화로는 '좋아해!' '사랑해!' 하고 고백할지도 모른다. 전화기를 통해서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가 '사랑해!'하고 내 귀를 간지럽히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을까? 생각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는 요새 이곳저곳 입사원서도 넣고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나저나 그가 취업을 해서 도서관에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면 난 어떻게 되지? 우리 사이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도서관 식당에서 국수나 말고 있는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계속 만나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안돼!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 놓아야겠어! 넌 내꺼라고.



월요일 오후 하루 종일 그를 생각하며 침대 위를 뒹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충 씻고 집을 나섰다. 그의 동네로 가는 길에 시장이 있었다. 난 이것저것 구경을 하면 마음이 좀 풀릴까 하여 일부러 시장으로 들어갔다.


갈치 고등어 명태 오징어 꼴뚜기 온갖 해산물이 있고, 배추 무 오이 고추 깻잎 호박 온갖 야채가 있고, 파전 빈대떡 오뎅 떡볶이 순대 만두 온갖 먹거리가 있고, 아참! 희철 씨 만두 좋아하는데. 바지 잠바 티셔츠 츄리닝 아기 옷, 방울 달린 아기 옷 너무 귀엽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 학생 꼬마 엄마 등에 업힌 아기, 아가야 까꿍! 왁자지껄 사람들이 어우러진 시장통이 북새통을 이룬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혼자다.


저 앞에 임신복을 입은 배가 나온 여자와 츄리닝 입은 아저씨 그리고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약간 뒤뚱거리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아저씨는 한 손에 바퀴 달린 시장바구니를 끌고 한 손으로는 여자를 부축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저 여자가 나고 옆에 그가 서 있는 모습을.


꼬마가 뒤를 돌아본다. 어디서 본듯한 얼굴이다. 낯이 익은 데 어디서 봤더라? 여자가 아이의 손을 끌고 분식집으로 들어간다. 츄리닝 입은 아저씨가 따라 들어가면서 힐끗 이쪽을 바라본다. 앗! 그 사람이다. 양희철!


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하였다. 떨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한걸음 한걸음 분식집 앞으로 다가섰다. 창문 너머 식탁에는 그를 포함한 세 명이 다정하게 앉아 만두를 먹고 있었다. 그는 호호 불어 식힌 만두를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는 맛있게 먹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여자의 눈가엔 잔잔한 미소가 퍼지고. 그건 영락없는 한 가정의 단란한 모습이었다.


한참을 넋 잃고 바라보는데 눈앞이 점점 흐려져 왔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말없이 뒤돌아서서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 철없는 남자 -


뚱뎅이 녀석이 요즘 좀 이상하다. 맨날 공부는 안 하고 딴 데 정신이 팔려있다. 그를 불러 커피도 한 잔 뽑아주고 담배도 한 개비 물려주고 조용히 물어봤다.


"너 요즘 고민 있냐?"


"그.. 그게요..."


뚱뎅이 녀석이 털어놓았다. 식당에 있는 아가씨를 좋아한단다. 허걱! 그녀.. 지혜 씨가 아닐까?


"지.. 지혜 말이냐?"

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은 모르겠는데요, 근데 형이 그 애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그.. 그냥."

난 뜨끔하여 조용히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 큰일이다. 저 덩치에 가냘픈 그녀가 숨도 제대로 못 쉴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녀의 무사 안녕을 위해서 내가 훼방을 놓아야겠다. 근데 남들이 보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냐며 따지지 않을까? 그러나 정의의 사도는 외로운 법! 난 외로운 길을 가련다.


본격적인 취업시즌이 되면서 이곳저곳에 입사원서를 넣고 있지만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도 하나씩 떠나가고 있다. 나도 어떻게든 이 도서관을 졸업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그녀, 지혜 씨를 만난 지 좀 됐다. 지난번 바이킹을 탈 때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너무 무서워서 그녀의 허리를 꼭 붙들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그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것 같다. 그때 그녀는 마치 엄마가 어린 아들을 달래듯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던 것 같다. 그녀의 가슴에서 어릴 때 맡았던 엄마 냄새가 났던 것도 같다. 그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라 창피해서 한동안 그녈 피해 다녔다.



도서관이 휴관인 월요일 오후, 하루 종일 집에서 책상 앞에 앉아 졸다가 와이프를 따라 시장엘 갔다. 침 그만 흘리고 시장바구니 들고 따라오란다. 나는 왜 졸기만 하면 침을 흘리는지...


와이프는 이제 배가 많이 불러와 뒤뚱뒤뚱 거동이 불편하다. 난 바퀴 달린 시장바구니를 끌고 한 손으론 와이프를 부축하며 걸어갔다. 내가 뿌린 씨앗 내가 거두어야지 누가 거두랴?


시장엔 이것저것 구경할 게 많다. 정 취직이 안되면 이곳에 자리를 잡아야겠다. 이것저것 재밌게 구경하는데와이프가 영철이 손을 끌고 분식집에 들어간다. 이게 웬 떡이냐?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었다.


"여기 김치만두 2인분 하고 고기만두 2인분요!"


뜨거운 고기만두를 일단 반쪽은 내가 먹고 반쪽은 호호 불어 영철이한테 먹였다. 그리고 다른 고기만두 한 개랑 김치만두 한 개가 내 입으로. 그러니까 영철이가 반 개 먹는 사이 나는 두 개 반을 먹는 셈이다. 허겁지겁 먹어대는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던지 와이프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결국엔 내가 만두 3인분을 먹어 치웠다. 이제 배가 좀 차는 느낌이다. 난 배만 부르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근데 아까부터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꼭 누군가가 날 감시하는 느낌이다. 뒤돌아 봤지만 아무도 없다. 정말 이상하다. 내가 요새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몸이 허약해졌나? 취직하는 대로 우선 내 보약부터 한제 지어먹어야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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