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동산도 가고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6

by 이은호



- 철든 여자 -


그와 인사를 하고 지낸 지 두 달이 넘었다. 그동안 그와 영화도 보고, 언덕 위 조용한 찻집에서 달달한 카페라떼도 같이 마셨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사실 거의 내가 수다를 떨었지만, 종합해본 결과 그는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것만 빼고는.


난 아직 그의 연락처를 모른다. 하기야 연락할 필요가 없다. 맨날 도서관에서 보니까. 하지만 그가 도서관엘 안 나오면? 무턱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갈 수도 없고, 걱정이 된다. 그에게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백수 주제에 사치스럽다고 요즘 중학생도 다 들고 다니는 핸드폰이 없단다.


집 전화번호는 취직 전까지는 여자 친굴 안 사귀겠다고 맹세했다면서 엄마가 걱정한다고 안 가르쳐 줬다. 설마 마마보인 아니겠지? 하지만 아직 여자 친구가 없다는 말에 더없이 위로가 되었다. 그래 내가 있잖아! 넌 내꺼야!


내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줬다. 하지만 한 번도 그의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다. 아직은 그의 마음이 딴 곳에 있나 보았다. 취업준비에 열심인 그를 귀찮게 할 수 없는 내 마음만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요즈음 취업시즌이 다가오는 관계로 그 사람한테 만나자는 말도 못 붙인다. 길고 긴 밤 난 허벅지를 찌르며 얼마나 외로움을 달랬는지 모른다. 가슴과 옆구리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이여...


가만있자! 아무리 취업공부도 중요하지만 맨날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차라리 잠시라도 모두 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하고 싶은 내 간절함이 지어낸 핑곗거리 인지도 모르겠지만.


다음날 나는 그가 공부하는 열람실을 찾았다. 그는 누적된 피로에 지쳐서인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가 반쯤 풀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올려다본다. 입가로 침이 흘러 책상 위에 고여 있다. 오, 불쌍한 사람! 얼마나 피곤했으면!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주고 쪽지를 건넸다.


오후 세시반 난 그와 함께 근처 공원에 와 있다. 커다란 저수지를 끼고 산책로가 나있고, 가족동반 방문객들이 많아 몇 개의 놀이기구도 갖추어져 있는 휴식과 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입에 물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시원한 바람도 쐬고 침엽수림에서 나오는 상쾌한 공기도 맘껏 마시고, 이 얼마나 기다리던 소중한 시간이던가!


저 앞 놀이동산에서 '꺅!' '까악!' 하는 하이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바로 바이킹을 타는 사람들이 허공에서 쏟아내는 소리다. 그래 바이킹! 저걸 타면 희철 씨 스트레스가 다 풀릴 거야! 난 그의 팔을 끌고 놀이동산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무섭기는 했지만 그를 위해서, 희철 씨 스트레스 맘껏 풀라고,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배가 서서히 움직였다. 배가 뒤로 가면서 몸이 앞으로 쏠리니 긴장이 됐다. 정점에서 배가 살짝 정지하는 순간 온몸이 짜릿하게 저려왔다. 여기저기서 '깍!' '꺄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배가 하강한다. 힘차게 나아가면서 얼굴을 때리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몰아친다.


"꺄~호!"


나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옆에 그가 나를 꼭 부여잡고 꺽꺽거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래요, 희철 씨! 그동안 공부하느라 힘들었죠? 맘속에 쌓였던 것 다 풀어내세요! 나는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 철없는 남자 -


그녀와 알고 지낸 지 두 달이 지났다. 밖에서 그녀와 몇 번 만났는데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내 주머니 사정도 잘 헤아려주고...


그녀가 내 연락처를 자꾸 알려달라고 한다. 큰일이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그녀가 자기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 줬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에게 전화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내 사정을 그녀에게 말해줘야 하는데,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만나면 그녀의 수다가 워낙 심해 내가 끼어들 틈도 없거니와 그렇게 즐거워하는 그녀의 기분을 도저히 망칠 수가 없었다. 어려운 형편에 식당에서 고생하는 그녈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 큰일이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이제 취업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처자식의 밥줄이 내 손에 아니 내 굳은 머리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책은 손에 안 잡히고 머릿속은 온갖 잡생각으로 복잡해졌다. 그 와중에 또 잠은 어찌나 쏟아지는지 허구한 날 난 허벅지를 찌르며 쏟아지는 잠과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모른다.


월요일 휴일에 집에서 푹 쉬고 다음날 도서관에 갔는데, 여전히 잠이 쏟아져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나 보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기척에 눈을 억지로 떠 보니 그녀 지혜 씨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내 손에 쥐어주고 간 메모지를 펼쳐보니,


Dear 희철씨
정원에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있어요. 이렇게 좋은 날 공부한다고 힘드시죠? 오랜만에 공원에 가서 좋은 공기 마시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오후 3시에 정문에서 기다릴게요.
lovely 지혜가

그래 머리도 복잡하고 공부도 안되는데 오랜만에 공원에 가서 머리 좀 식히자. 기회가 되면 그녀한테 사실 고백도 하고.


공원은 도서관에서 20분쯤 살살 걸어가면 닿는 거리에 있는데, 저수지를 둘러싼 풍광도 좋고 호젓한 산책로도 운치가 있어 청춘을 달리던 시절 가끔 찾던 곳이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갑갑한 도서관 열람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상쾌한 공기도 마시고 나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 좋다. 이런 공기 좋은 곳에서 담배 한 대 피우면 정말 맛있는데.


어디선가 '꺅!' '까악!' 하는 하이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하고 둘러보니 저 앞에 보이는 놀이동산에서 흥겨운 음악소리와 함께 왁자지껄한 사람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옆에 바짝 붙어있는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아.. 갑자기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거기에 놀이기구가 있다는 걸 깜빡했는데, 난 세상에서 무서운 게 딱 두 가지 있다. 바로 쥐새끼와 바이킹 놀이기구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나를 바이킹 있는 데로 끌고 갔다.


그래, 그녈 위해 내가 희생하기로 했다. 그녈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 무서운 걸 타기로 했다. 그나마 중심이동이 제일 짧은 중간 좌석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녀가 '오늘 희철 씨 스트레스 맘껏 다 푸세요'라는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제일 끝 뒷자리로 끌고 갔다. 아무래도 그녀가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배가 서서히 움직였다. 배가 뒤로 가면서 몸이 앞으로 살짝 쏠리니 벌써부터 정신이 없다. 이윽고 배가 정점에 다다르고, 심장이 쫄깃해지고, 사타구니 밑이 시큰해지고, 정신이 아뜩해지면서 그다음부터는 사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심장이 딱 멈춘 것도 같고, 무서워서 고함을 지르는데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안 나오고 숨이 꺽꺽 막혔던 것 같고, 바이킹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옆에 있는 거 아무거나 꼭 쥐고 매달렸는데, 그게 그녀의 허리인지 그녀의 허벅지인지... ㅠ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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