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든 여자 -
오전에 엄마 심부름으로 시장엘 갔다 오다가 그를 보았다. 벤치 한쪽 구석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담배를 피우는 그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희철 씨! 희철 씨!"
몇 번을 불렀는데 그는 본체를 안 한다. 아마도 요즘 심한 슬럼프에 빠진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뭐 하세요?"
"어? 지혜 씨! 언제 오셨어요?"
"희철 씨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시네요?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 봐요?"
"그래요? 몰랐네요... 후~~"
그가 담배연기를 허공에 길게 내뿜었다. 우수에 찬 듯한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힘들어하는 그를 위로해주고 싶은 모성애 같은 마음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희철 씨 요즘 힘든가 봐요? 기분전환도 할 겸 오후에 저랑 영화 보러 갈래요?"
어떻게든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불현듯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 보는 건 누구나 좋아하니까.
"예? 영.. 영화요?"
"왜요? 싫으세요? 영화 안 좋아하시나 봐요! 아님 제가 싫으시던가..."
"그건 아니구요. 예! 그럼 갑시다. 근데 지혜 씨가 시간을 낼 수 있나요?"
"물론이죠. 그럼 오후 3시에 정문에서 봬요."
룰루랄라 난 발걸음도 가볍게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열심히 일했다. 평소의 두 배쯤.
"너 웬일이냐? 그러다 몸살 날라!"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원더우먼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슈퍼 울트라 초특급 파워를 발휘하였다. 구석구석 반짝반짝 빛나는 주방을 보니까 기분도 한결 상쾌해졌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갔다. 이젠 서서히 쇼를 벌일 시간이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난 인상을 찡그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지혜야, 왜 그러냐? 어디 아프냐?"
엄마의 걱정스런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집에 가서 쉴래."
"그래그래 바쁜 시간도 지났으니까 집에 가서 푹 쉬어라. 가다가 약 사 먹고."
오 예! 내 연극 완전 성공! 아예 연극배우로 직업을 바꿔볼까? 난 옷을 갈아입고 배를 부여잡고 한쪽 다리를 끌면서 식당을 나와서는, 나오기가 무섭게 씩씩한 걸음으로 룰루랄라 정문으로 향했다. 그가 가방을 메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시내 극장가로 향했다. 어떤 걸 볼까? 코믹, 액션, 러브, SF... 종류가 너무 많아 헷갈렸다. 순진한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9금 찐한 애정영화를. 난 그에게 팝콘을 사 오라고 하고 잽싸게 창구로 가 구석자리로 표 두 장을 끊었다. 그리고 그의 팔소매 끝을 붙잡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기야 평일 이 시간에 영화 보러 올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구석자리에 나란히 앉아 편한 자세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부터 끈적한 화면과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어두운 극장 안이라 들킬 염려가 없는 관계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화면에 몰두하였다.
팝콘을 집으면서 그의 손과 자주 부딪혔다. 그의 손가락을 팝콘인 줄 알고 집은 적도 있었다. 그가 황급히 손가락을 뺀다. 순진하기는. 하지만 좋다. 전기가 흐른다. 아! 태어나서 이렇게 짜릿한 순간은 처음이다. 난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싼다. 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시간이 이대로 정지했으면...
행복했던 순간이 지나고 영화가 끝났다. 나와 그는 아직 식지 않은 상기된 얼굴로 극장 문을 나섰다.
"야! 이게 누구야? 경석이 아냐? 김경석!"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치며 아는 체를 했다. 돌아보니 웬 조폭같이 우람한 체구에 짧은 머리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남자가 웃는 얼굴로 서있다.
"야! 장정호 아니냐? 이게 웬일이야?"
그가 내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그 깍두기를 끌고 저쪽으로 가서 뭐라 뭐라 떠들어댄다. 가만있자! 그 깍두기가 아까 뭐랬더라? 김경석? 경석이가 누구야?
- 철없는 남자 -
요즘 공부가 잘 안 된다. 이것저것 잡생각에.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그녀.. 지혜였다. 시장바구니를 들고 땀을 흘리며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식당 주인아줌마가 이것저것 되게도 부려먹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한참 동안 불렀단다. '희철 씨! 희철 씨!'하면서. 당연히 내가 못 알아들을 밖에, 내 이름이 아니니. 이러다 들통나는 거 아닌지 몰라. 난 일부러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후 내뿜으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나를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외로 정과 사랑이 듬뿍 담긴 엄마같은 눈빛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오늘 오후 영화나 보러 가자고. 영화? 난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거절하기가 힘들다. 불쌍한 그녀를 위로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내 맘 한구석에서 강렬하게 솟아 올랐다. 결국 그녀와 오후 3시에 정문에서 만나기로 했다.
난 열람실로 올라가 책을 펼쳤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하지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리도 잡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책상에 엎어졌다. 잠이나 자는 게 남는 것 같다.
깜짝 놀라 잠을 깨니 3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내가 흘린 침이 흥건했다. 옆에 앉은 넘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 넘은 도서관에 공부하러 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날 감시하러 오는 넘이다. 난 허겁지겁 화장실로 가 세수하고 나서 책 보따리를 싸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 모서리로 옆에 앉은 넘의 뒤통수를 툭 치고 나왔다.
정문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그녀가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밝은 표정을 보니 그나마 좀 안심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 극장가로 갔다. 영화에 취미가 없는 나는 그나마 액션물을 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애정영화를 보자고 했다. 큰일이다. 완전 수면제일 텐데. 하지만 여태껏 틈틈이 잠을 자두지 않았던가 위로하며 팝콘을 사러 갔다. 그녀는 천사표다. 달막 달막 한 내 주머니 사정을 어떻게 그리도 잘 아는지 내가 팝콘을 사 오는 사이 그녀가 표를 끊은 것이다.
극장 안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난 그녀의 손에 이끌려 구석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윽고 영화는 시작되고 처음부터 나오는 끈적한 화면과 숨넘어가는 소리가 영락없는 수면제로 작용했다. 난 졸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팝콘을 집어서 입에 쑤셔 넣었다. 팝콘을 집으면서 그녀의 손과 자주 부딪혔다. 그녀의 식성은 왕성해서 내 손가락까지 먹으려 들었다. 내가 깜빡 졸았더라면 손가락이 먹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싹하고 한기가 들었다. 그녀가 내게 머리를 기대 왔다. 난 손을 놔둘 곳이 없어 팔을 들어 그녀가 앉은 의자의 모서리를 감쌌다. 아! 이 지겨운 영화 빨리 좀 안 끝나나?
드디어 영화가 끝났다. 오 해피! 난 서둘러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의 자원봉사가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야! 이게 누구야? 경석이 아냐? 김경석!"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조폭같이 우람한 체구에 짧은 머리에 험상궂은 얼굴을 한, 군대 시절 내 동기 장정호였다. 야, 이 녀석을 여기서 만나다니. 난 그녀에게 기다리라고 한쪽 눈을 찡긋 한 뒤 정호를 끌고 딴 곳으로 갔다.
가만있자, 근데 정호가 아까 뭐랬더라? 김경석! 그렇지? 내 이름을 불렀지! 아.. 그녀가 알아들었을 텐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