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좀 내주실래요?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3

by 이은호



- 철든 여자 -


다음날 난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목욕하러 갔는데 때 엄청 나오더라. 맨날 국수를 말아서인지 국수가락처럼.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평소에 화장을 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눈썹 그리고 입술 바르는데 한 시간이나 걸린 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다. 앞으론 색칠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오늘 내가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오늘은 기어코 그에게 따져보리라 맘을 먹었기 때문이다. 내가 맘에 드나 안 드나. 맘에 들면 든다! 안 들면(안되지) 든다!(좋았어). 말을 해야 할거 아니냐고! 우쒸! 아침부터 씩씩대면서 부산 떠는 날 보고 엄마가 한 마디 하셨다.


"지혜야, 너 아침부터 모 잡아먹었냐? 입이 새빨개 가지고!"


점심시간이 다 되어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가 올 텐데.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는 늘 1시 반쯤에 왔다. 그가 오면 뭐라고 해야 하나? 할 말 있다고 뒤뜰로 불러내? 그래, 나중에 저녁때 보자고 하자! 어떻게 할까? 그렇지! 쪽지를 건네는 거야. 그가 왔다.


"저.. 우동 한 그릇 주세요."


? 오늘은 우동을 시킨다. 맨날 국수 먹다가 질렸나? 오늘은 특별한 날! 그를 위해서 비싼 멸치 왕창 넣고 다싯물도 새로 우려내고, 양념장이며 국수에 들어가는 고명도 정성 들여 새로 장만했는데 말이다. 왕재수다. 이렇게 마음이 안 통해서야...


"오늘은 왜 국수를 안 드세요? 다싯물도 새로 끓이고 고명도 다 맛있게 준비했는데."


"아 그래요? 그럼.. 그냥 우동으로 주세요."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황당한. 난 할 수없이 팅팅 불은 우동 가락을 국물에 말아 건네주었다. 그가 쟁반을 받쳐 들고 식탁으로 가서 앉는다. 근데 뭔가 허전하다. 왜 일까? 아참 그렇지! 쪽지를 안 줬구나! 이걸 어쩌지? 정신머리 하고는. 늘 먹던 국수 안 시키고 갑자기 우동을 달라니 내가 깜박했잖아, 으이그!


이걸 어쩐다? 음, 그렇지! 역시 내 머리는 쓸만해! 난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한 병을 꺼내 빨대를 꽂고 쟁반에 받쳐 들고는 그에게로 갔다.


"저.. 오늘 서비스예요!"

"예?"


그가 멀뚱하게 쳐다본다. 이런, 서비스 몰라? 서비스! 그냥 준다잖아!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무안하지. 난 잽싸게 그의 식탁 위에 요구르트를 내려놓고 휑하고 돌아섰다. 당근 그 밑에는 쪽지를 접어놓았고.


저녁 5시가 되었다. 난 화단 한쪽 구석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시간 20분이 지나도록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일방적인 약속이니까, 아니 약속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슬슬 부아가 치밀 무렵 저 멀리 그가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우쒸! 올 거면 사람 애간장 태우지 말고 진작에 나타나지. 내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소가 번졌다. 가슴은 콩당콩당 뛰었다.


"미안합니다. 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버렸네요."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 그랬었구나!


"아녜요. 공부하는 사람 오라 가라 하는 제가 미안하죠."


"근데 무슨 일이시죠?"


"별건 아니구요. 음.. 저는 임지혜라고 하는데, 댁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 저요? 에.. 양.. 양희철이라고 합니다."


"예? 양희철요?"


난 깜짝 놀랐다. 어제 문패에서 본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집주인이란 말인가? 젊은 나이에? 이거 봉 잡은 거 아냐?


"예? 왜 그러시죠?"

그가 놀라는 내 모습을 보며 의아해했다.


".. 아니에요. 그냥요...."


나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 서로 인사나 하면서 지내자고 했다. 그도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놀랄만한 건 그의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됐다는 것이다. 나도 질 수 없어 나이를 두 살 올려 스물두 살이라고 했다. 그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와 헤어져 식당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뭔가 일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다.




- 철없는 남자 -


아침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비록 장모님이야 딸 걱정 손자 걱정에 그러셨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야 어디 그런가? 선수 사기 팍 죽여 놓고 경기에 나가 우승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덕분에 밥도 몇 술 못 뜨고 게다가 용돈 5천 원도 못 받고 집을 나서고 말았다. 하기야 아직 주머니에 몇 푼 남아 있긴 하지만.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욕을 많이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프다. 에이, 도시락이나 까먹어야겠다. 허겁지겁 도시락을 비우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았다. 옆에 뚱뎅이가(얼마 전에 새로운 말벗이 생겼다) 커피 뽑는 내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천 원짜리 지폐를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할 수없이 뚱뎅이 녀석도 한잔 뽑아주었다. 녀석이 담배도 달란다. 녀석은 입만 달고 사는 모양이다.


녀석은 나보다 세 살 어린데 재수 아니 한 4수쯤 하고 나서, 지 실력을 절감했는지 대입을 포기하고 취직 공부를 하고 있다. 9급 공무원 임용시험 준비를 한다는데 내가 보기에 녀석은 애당초 그른 것 같다. 일찌감치 똥지게, 아니 벽돌이나 지는 게 그 넘 덩치에 어울릴 것 같다. 언제 기회를 보아 말해주어야겠다.


점심때가 되니까 또 배가 고프다.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백수인 모양이다. 뱃속에서 자꾸 꼬르륵 소리가 나니까 옆에 앉은 사람이 불쌍하다는 듯 눈을 세모로 뜨고 쳐다본다. 그 사람은 내가 아까 도시락 까먹고,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오전 내내 노는 걸 본 사람이다. 창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어쨌든 주린 배는 채워야 하니까.


맨날 먹는 국수, 오늘은 기분전환도 할 겸 오랜만에 우동을 먹어볼까? 어? 그 애가 있는데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아하! 화장을 했구나! 쟤가 근데 몇 살이나 먹었지? 화장한 모습을 보니까 좀 성숙해 뵈기도 하는데?


"저.. 우동 한 그릇 주세요."

진하게 화장한 그 모습이 낯설어 빤히 쳐다보며 주문을 했다.


"오늘은 왜 국수를 안 드세요? 다싯물도 새로 끓이고 고명도 맛있게 준비했는데."


그 애가 말했다. 엥? 국수를 먹으라고? 뭐 이딴 경우가 다 있어? 손님이 달라는대로 줄 것이지.


"아, 그래요? 그럼.. 그냥 우동으로 주세요."


나도 자존심이 있지 고집을 굽히지 않고 우동을 받아 들고 식탁으로 가 앉았다. 근데 면발이 팅팅 불어 맛이 없었다. 그냥 국수로 할 걸 그랬나?


젓가락을 끄적이는 데 그 애가 다가왔다. 그리곤 요구르트 한 병을 내려놓고 갔다. 요구르트? 어? 근데 그 밑에 쪽지가 있었다. 난 쪽지를 펼쳤다.


저기요... 할 말이 있걸랑요.
오후 5시에 제1 열람실 옆 화단에서 볼 수 있을까요?
진짜 용기 내서 말하는 거니까 꼭 와주세요. - 지혜가-


황당했다. 그리고 정말 당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처자식이 딸린 몸이니까 헛물켜지 말라고 해? 그랬다가 괜히 점심 먹으러 와서 불이익이나 당하지 않을까? 서로 얼굴 보기도 민망하고.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나중에 적당한 기회에 말하면 되지 뭐!


깜빡 졸았나 보다. 흘린 침을 닦으며 시계를 보니 5시 반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옆에 그 인간이 침 닦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우쒸! 저 인간은 날 감시하러 도서관에 왔나? 나도 세모 눈을 뜨고 그를 한번 째려주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허겁지겁 달려갔다. 저 멀리 그 애가 왔다리 갔다리 하며 서있는 게 보였다.


"미안합니다. 공부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버렸네요."


"아녜요. 공부하는 사람 오라 가라 하는 제가 더 미안하지요."


그 애의 이름은 임지혜였다. 그 애가 내 이름을 물어온다. 내 이름을 밝혀? 이러다가 귀찮아지면 어쩌지?


"저.. 저요? 에.. 양.. 양희철이라고 합니다."


난 얼떨결에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주인의 이름을 대고 말았다. 그녀는 나에게 서로 인사나 하면서 지내자고 했다. 정말 당돌하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생각과 다르게 좋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 어쩔 수가 없다. 먹을 거 앞에서 약해지는 초라한 백수여!


난 나이를 두 살 내려 스물다섯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애는 나이가 스물둘이라고 한다. 놀랄만한 일이다. 그 조그만 애가, 아니 이젠 애라고 못하겠다. 그녀라고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화장한 얼굴에 어느 정도 나이가 느껴진다.


그녀와 헤어져 열람실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영 이상했다. 뭔가 자꾸 꼬이는 기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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