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뒤를 쫓다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2
- 철든 여자 -
일주일이 넘도록 보이지 않던 그가 드디어 나타냈다. 난 너무 기뻐 냉큼 그 사람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먼젓번 일이 부끄러워 그럴 수가 없었다. 하기야 달려가 봤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다 내 마음뿐인데.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 국수 한 그릇 줄래요?"
잠시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난 얼른 외면했다. 그는 묵묵히 국수 그릇만 받아 가지고 가버렸다. 왜 아무 말도 없는 걸까? 난 무척 답답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계속 밀려드는 손님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날부터 그는 매일매일 보였다. 그렇게 착실하게 도서관에 나오는 걸 봐서는 그는 성격도 꽤 무던한 사람일 듯싶었다. 무슨 일로 일주일간 안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다시 나타난 걸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아무 말도 없을까? 그렇게라도 내 마음을 표시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난 답답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가 역시 국수를 주문하였다. 난 그가 얄미워 국수를 조금만 담으려다가 그래도 밤늦도록 공부하는 사람인데 생각하며 더 많이 듬뿍 담아주었다. 돈을 건네받으며 손길이 슬쩍 닿았다.
"고생이 많지요?"
그가 나를 보고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생? 뭔 고생? 하기야 너 땜에 맘고생한 걸 생각하면.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짜샤, 맘고생 시키지말고 잘해라이!'
또 며칠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나무토막같은 그 넘에게 따지기 위해 도서관 문 앞에서 그 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지나고, 10시 반이 지나고... 그 넘은 겨우 국수 한 그릇 먹고 오래도 버텼다. 11시가 다 되어가자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삐죽한 넘이 보였다. 바로 그였다. 당당하게 따지기로 맘먹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얼른 나무 뒤로 숨었다.
그 남자가 문 밖으로 나가고 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버스 정거장을 지나 계속 걸어갔다.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이런 우라질, 넌 버스비도 없니? 왜 이렇게 걷기만 하는데? 하루종일 일하느라 힘들어 죽겠구만! 하.. 남자 하나 잘못 만나 나 요즘 많이 버렸다. 욕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여자는 남자 만나기 나름이라지만 나 성질 더러워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버스 정거장 5개가 지나고 나서야 그는 골목으로 꺾어졌다. 휴! 난 반가운 마음에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후다닥 뛰어 쫓아 갔다. 그는 골목길에서 조금 들어간 뒤 어떤 이층 집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그는 안으로 사라졌다.
<양희철> 나는 문이 닫혀버린 그 집 대문 앞에 섰다. 문패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양 씨였나? 그러고 보니 난 아직까지 그 사람 성도 이름도 모른다. 한참을 서 있다 터덜터덜 피곤한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 철없는 남자 -
아들 녀석이 퇴원하고 난 다시 도서관엘 나갔다. 취업준비하는 백수가 갈 곳이라곤 그곳밖에 없다. 이제 두 달만 있으면 본격적인 취업시즌인데 바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더구나 영어 단어 하나 잘 들어가지 않는 이 단단한 돌머리로는 말이다. 하기야 머리가 단단하면 한번 들어간 건 잘 안 나온다고 하더라! 넣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오랜만에 도서관엘 갔더니 그동안 안면을 쌓았던 백수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반갑게 호들갑을 떤다. 한동안 안 보여서 나 혼자 배신 때리고 취직해 떠나버린 줄 알았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아무 일 없이 다시 당당하게 돌아온 날 무척 반긴다. 이런 물귀신들! 어쨌든 날 반갑게 맞아주는 동지들에게 자판기 커피 한잔씩을 쐈다. 1,800원이 들었지만 며칠 동안 아들 간호하며 굳은 용돈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부담이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뱃속은 어김없이 소식을 알려왔고 나는 식당으로 국수를 먹으러 갔다. 아참 그렇지! 저 애, 지혜라고 했던가? 아는 체를 해? 말아? 거 참..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별게 다 신경 쓰이는군! 근데 쟤는 몇 살이나 먹은 거야? 쪼그만 게 벌써부터 남자나 밝히고 말이야! 내가 좀 멋있기는 하지만... 난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냥 국수 그릇을 받아 들고 돌아서고 말았다. 내일은 한마디 해줄까?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인가 그 애로부터 국수 그릇을 받아 들고 돈을 건네면서 손끝이 스쳤다. 아무래도 걔가 일부러 내 손을 잡은 것 같았다.
"고생이 많지요?"
아무 걱정 없이 학교 다닐 나이에 이런 데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한마디 건넸다. 그러자 그 애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내가 괜히 아픈 데를 찔렀나? 뭔가 위로의 말을 더 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옆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쟤한테 정신 차리라고 얘길 해줘야 하는데...
또 며칠이 지났다. 난 밤늦도록 도서관 열람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뱃속에서는 연신 꼬르륵거리며 밥 달라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꾹 참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나 열심히 공부를 했냐고? 그건 완전 오산이다. 오늘 시골에서 장모님이 올라오신다. 아니 지금쯤 집에 계실 것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하지만 그것도 다 잘난 사위일 경우에 해당되는 말이다. 나처럼 밥벌이도 못하고 아내한테 용돈 타 쓰는 경우에는 장모님 뵙기가 몹시도 괴로운 일이다. 그냥 댁에 계시지 뭐 하러 오신담?
밤 10시가 넘고, 10시 반이 넘고, 11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집에 가야 한다. 지금 가서 인사드리고 밥 먹고 씻고 자고 낼 새벽에 나오면 별로 마주 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계획이 선 나는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시간을 더 죽이기 위해 고픈 배를 움켜쥐고 걸어서 집엘 갔다.
띵동!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벨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놓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얏호!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셨던지 장모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내 작전이 완전 성공한 것이다. 비록 배는 곯았지만. 예전의 잔머리가 다시 정상 가동되는 것인가? 난 기쁜 마음으로 밥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험난한 산이 남아 있다. 첫째는 장모님과 함께 자고 있다며 배가 제법 부른 아내가 콧소리를 내며 달라붙는다. 난 짐짓 태연한 체하며 아내의 부른 배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졸아서 잔뜩 웅크렸다. 돈벌이 못하는 백수 가장이 되어 보라, 어디 자신 있게 되는 일(?)이 있는지!
둘째 녀석이야 말년 휴가 나와서.. 군인정신으로... 돌격 앞으로 해서..... 그냥.. 그래 가지고.......
음냐~ 음냐~~ ZZzzz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