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1

by 이은호



- 철든 여자 -


내가 그를 처음 본 게 언제인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가 내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는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답답하여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그가 보이면 내게 더욱 큰 설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에게 내 마음을 표현한 적은 없다. 아니 사실 매일 그에게 내 마음을 표현한다. 다만 그가 모를 뿐이다. 아님 알면서 모른 척하는지도 모르지만...


난 도서관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어머니가 이곳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공부에 소질이 없던 나는 여고 졸업 후 재수를 포기하고 이곳에서 어머니를 돕고 있다. 차라리 그게 나 자신을 위해서나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이곳 도서관은 굉장히 커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책을 읽으러 오는 사람보다는 시험공부하는 학생들이나 입시 공부하는 재수생 그리고 취업 준비하는 백수들이 더 많다. 특히 재수생이나 백수들의 경우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는데 열람실의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아침 일찍 오는 사람들도 많다.


그 사람도 그들 중 하나다. 내가 보기에 그는 대입을 준비하는 재수생 같다. 짧게 자른 머리에 시원스럽게 생긴 외모 그리고 큰 키가 내 맘에 들었다. 어쩌다 그의 입가에 번지는 해맑은 웃음이 아직은 소년 티를 채 벗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하고 동갑 내지는 잘해야 한두 살 정도 차이가 나지 싶다.


그는 점심때 식당에 와서 국수나 우동을 사 먹었다. 가끔은 다른 사람과 같이 왔지만 대부분은 혼자 와서 식사를 하고 갔다.


"저... 국수 한 그릇 주세요."


청아한 그의 목소리가 내 가슴에 울렸다. 나는 늘 그의 그릇엔 국수도 많이 담고, 계란, 오이, 김 등 각종 고명도 많이 얹고, 깍두기도 종지에 예쁘게 담아서 그에게 내밀곤 다. 어쩌다 그의 손끝과 내 손끝이 스칠 때면 내 몸 전체로 전기가 짜르르 흘렀다. 그리고 그가 국수 그릇을 맛있게 비우는 걸 보면서 작은 행복감을 느낀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하는데 같이 일하는 언니한테 내 마음을 들키고 말았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드는데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언니한테 털어놓았다. 괜히 공부 열심히 하는 그에게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얘기하였다. 하지만 언니의 생각은 달랐다. 마음에 있으면 일단 부딪혀 보라고. 그리고 그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라고.


며칠 동안을 그에게 말해야지, 말해야지 하면서 나는 끝내 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가 답답해 도저히 못 참겠던지 대신 말을 꺼냈다.


"저.. 저기요!"

"...?"

그가 멀뚱 거리며 언니를 쳐다보았다.


"얘가.. 지혜가요..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언니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그에게 얘기하였다. 그가 나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내가 나설 차례인가? 난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가빠지고 도저히 거기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다닥 주방으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언니가 말해주었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는 그냥 조용히 듣고 아무 말 없이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역시 그는 나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 정도의 남자가 나 같은 애를 거들떠나 보겠는가? 괜히 말했다. 차리리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나 하는 건데...




- 철없는 남자 -


오늘도 난 도서관엘 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취직해야 하는데 2년 넘게 군에서 뺑뺑이 도는 바람에 돌머리가 다 되었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잔머리 잘 굴린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다.


난 대학을 졸업하고 군엘 갔다. 내 아내랑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술김에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로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 고지식한 부모님은 '니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며 입대 전에 서둘러 결혼을 시켰고, 아내랑은 신혼의 단꿈도 채 못 꾸고 나는 군에서 뺑뺑이를 돌았다. 졸병 시절 태어난 아들은 지금 세 살이 되었고, 아내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다. 그렇게 황금 같은 내 청춘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누가 보든 날 총각으로 보는데, 더구나 동안이라 네댓 살은 더 어리게 보는데, 두 아이의 아빠가 된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가 앞으로 처자식 먹여 살릴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하다. IMF의 그림자가 채 가시지 않아 취직하기도 힘들고 지금까지 아내와 아이를 보살펴 주었던 부모님도 올해까지만 책임지겠다고 하시니 정말 큰일이다.


난 무거운 어깨를 끌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에 용돈 5천 원을 받아 들고 집을 나선다. 이른 아침 6시에. 이렇게 일찍 나서지 않으면 도서관 열람실의 좋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약 60석쯤 되는 일등 열람실은 각각의 자리에 칸막이가 되어 있고 방음시설도 잘 되어있어 잠자기에는 딱이다.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거의 박 터지는 수준이다.


내게 주어지는 하루 용돈 5천 원은 너무 빠듯하다. 하기야 아내가 최대한 절약하며 생활하는 걸 아는 내가 거기에 이의를 달수는 없다. 차비 1,000원, 도서관 입장료 500원, 담배 한 갑 1,200원, 점심값 1,500원, 오전 오후 자판기 커피 두 잔 600원. 어쩌다 아는 사람을 만나도 선뜻 커피 한잔을 뽑아 주지 못한다. 불쌍한 내 신세...


하지만 가끔은 커피 몇 잔씩 동병상련을 느끼는 동료 백수들에게 인심 쓰는 날도 있다. 전날 내가 집에서 (?)을 무지 잘했다던가 아님 아내에게 공돈이 생겼다던가 하여 아내가 보너스로 세종대왕 한 장을 쥐어주는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이면 마음이 든든하여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가 고프면 공부가 안된다. 매일 아침 일찍 나오는 바람에 아침밥을 제대로 못 먹는 나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오전 10시 이전에 깨끗하게 비워 낸다. 백수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배가 허전해지는 것을. 군에 있을 때 보다도 더 커진 양에 나 스스로가 문득문득 놀라곤 한다. 일찌감치 도시락을 비운 나는 점심은 보통 도서관 식당에서 국수나 우동으로 때운다. 그나마 국수의 양이 푸짐하고 계란, 오이, 김 등 각종 고명도 많은 것이 다행이다.


언제부턴가 도서관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애가 눈에 띄었다. 조금은 깜찍하고 귀엽게 보이는 아이였다. 아마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를 나와 바로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버는 듯싶었다. 그런데 그 애가 나를 보고 자꾸 힐끗거리는 것이었다.


쟤도 날 백수라고 놀리나? 우적우적 국수 그릇을 비우는 돼지 같은 모습이 우습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맞는 말이라 딱히 할 말이 없다. 대신 그 애가 쳐다볼 때마다 애써 외면하며 눈길을 피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보란 듯이 번듯하게 취직해서 저런 애한테 뭔가 떳떳하게 모범을 보여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의 다른 아가씨로부터 아주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 이름이 지혜라고 했던가, 그 애가 날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눈빛이 그 눈빛이었나?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이 빨개져 도망가 버렸다. 이럴 수가! 내가 고딩 정도로 밖에 안보였단 말인가? 난 할 말을 잃고 그 아가씨 말만 조용히 듣다가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그다음 날부터 며칠간 난 도서관에 가질 못했다. 아들 녀석이 급성 장염으로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몸이 무거운 아내를 대신해 내가 병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들 옆에서 잠을 자며 틈틈이 공부를 하였다. 당연히 공부는 잘 되지 않았고 오가는 간호사 언니들의 둥근 엉덩이와 하얀 종아리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나마 일주일간 아들과 같이 지내며 부자간의 정을 쌓은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계속>



*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은 2000년 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