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픔만 남기고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8

by 이은호



- 철든 여자 -


집에 돌아오는 길로 난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그와의 기억이 스치며 지나간다. 그리고 보니 수상했던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필시 그의 이름도 가짜일 것이다. 저번에 극장에서 만난 깍두기가 뭐라고 불렀더라?


난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담날 날이 밝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열람실 쪽으로 가는데 마침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야! 김경석!"


그가 뒤돌아본다. 그리고 눈을 똥그랗게 뜬다. 이런 김경석이 진짜 이름이었구나! 그에게 다가가 그의 옷소매를 힘껏 잡아끌었다. 뭔가 직감했는지 그가 순순히 따라온다.


뒤뜰 벤치로 가서 앉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개미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난 무게를 잡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목소리 쫙 깔고 말했다. 순순히 좋게 말할 때, 피차 감정 상하기 전에, 얼굴 붉히기 전에, 줘 터지기 전에 다 털어놓으라고 했다. 너무너무 순진했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과격하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다 너 때문이다. 더 열받는다.


그는 겁을 먹었는지 순순히 불었다. 역시 그가 나에게 말한 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총각이라는 것도. 사실 분명하게 결혼했다 안 했다는 말하지 않았지만 정황 증거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들을 조카라고 하고 여자 친구가 없다고 하고. 나쁜 넘!


난 이미 모든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설마 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입을 통해서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참으로 기가 막히고 허탈했다. 울음도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앞이 하얗고 멍했다.


그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한마디 했다. 나보고 뚱뎅이를 사귀지 않느냐는 거였다. 뚱뎅이가 그러더라며. 그러면서 그 넘 별 볼일 없으니까 조심하랜다. 기가 차는 일이다. 내가 한 마디 했다. 그래도 너보단 낫다고.


그와 옥신각신 해봤자 이젠 아무 소용이 없다. 애당초 그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을. 알았다고, 고만하자고, 쓸쓸히 그 자리를 떠나왔다. 찬 가을바람이 뺨을 스치고 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나간다. 내 텅 빈 가슴을 그냥 휑 뚫고 지나간다.


스무 살의, 내 청춘의 가장자리가 그렇게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 철없는 남자 -


간밤에 너무 많이 먹었는지 배탈이 났다. 시장에서 만두를 먹고 집에 와서 저녁밥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졸다가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잠을 잤다. 튼튼한 위장만 믿고. 하지만 아무래도 처리용량을 초과했었나 보다.


난 뒤가 급해 도서관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열불 나게 뛰었다. 막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부른다. 것도 여자 목소리다. 누굴까? 이 시간에 날 부르는 낭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허걱! 그녀, 지혜 씨였다. 그녀가 내 이름을 알다니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그녀가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소매를 잡아끈다. 난 뒤가 급했지만 분위기 상 찍소리도 못하고 그냥 끌려갔다. 뒤뜰 벤치로 가서 그녀가 분위기를 엄청 잡더니만 나보고 다 털어놓으라고 한다. 순순히 좋게 말할 때, 피차 감정 상하기 전에, 얼굴 붉히기 전에, 줘 터지기 전에. 그녀의 불끈 쥔 두 주먹과 서슬 퍼런 얼굴을 보면서 할 수 없이 다 불고 말았다. 사실 뒤만 급하지 않았어도 뭔가 빠져나갈 궁리를 생각해냈을 텐데, 뒤가 급하니까 머릿속이 하얘져 변명거리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본명이 김경석이고,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가 곧 둘이 될 거라고 했다. 이렇게 술술 부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 순진한 놈이다. 그녀가 알아줄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그냥 조용히 듣더니 허탈한 표정이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뚱뎅이를 사귀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허점을 찌르는 날카로운 내 공격에 그녀가 움찔했다. 그녀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 진짜로 그 넘과 사귄단 말인가? 지금껏 양다리를 걸쳤단 말인가? 그럼 나도 꿀릴 게 없지. 그녀에게 그 넘 조심하라고 한마디 했다. 하지만 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그래도 나보단 낫단다. 이런 젠장! 비교할 상대가 따로 있지, 오늘 완전히 스타일 구기는 날이다.


그녀는 제 할 말만 다하더니 그냥 뒤돌아 가버렸다. 양 어깨가 축 처져서 힘없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괄약근에 힘을 꽉 주고 버티고 서 있었다. 이대로 그녀와의 인연이 끝나는 건가? 내 스타일은 구겼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인 건가? 그나저나 큰일이다. 오늘 점심부터 어떻게 국수를 먹으러 간담!


찬 가을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나간다. 내 텅 빈 가슴을 그냥 휑 뚫고 지나간다. 스무일곱 살의, 내 인격의 가장자리가 그렇게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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