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든 여자 -
그 남자, 양희철 아니 김경석이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딴 도서관으로 본거지를 옮긴 거 같다. 무정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래도 그 정도 인연이었으면 온다 간다 말 한마디는 해야 할 게 아닌가? 내가 역시 사람을 한참 잘못 본 모양이다.
한 달이 흘렀다. 김경석 그 사람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난 엄마한테 말하고 도서관 식당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학원 수강증을 끊었다. 맨날 젖은 손으로 국수나 퍼 담기보다는 청춘의 한가운데서 뭔가 도전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를 빨리 잊고 싶은 맘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도서관 곳곳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을 마주하는 게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디자인은 꽤나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난 학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밤늦도록 컴퓨터에 매달렸다. 이런 재밌는 걸 놔두고 왜 여태껏 방황했던가? 호빵 찐빵 같은 얼굴을 그리고 얼굴에 마구마구 장난을 쳐주었다. 그리고 '김경석'이란 이름표를 달아 주었다. 우하하하~ 통쾌하다! 하지만 가슴 저편에서 아련한 아픔이 피어오른다.
몇 달이 흘렀다. 같이 수업을 받는 수강생 중에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김경석 그 사람과는 달리 키도 크지 않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씨가 참 곱다. 내가 몰라서 헤매는 부분을 그는 늘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외모와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씨 역시 김경석 그 사람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그는 잘 나가는 벤처기업에 근무하고 있단다. 원래 전공이 이 분야는 아니지만 갑자기 회사의 웹마스터 역할을 맡게 되어, 기왕에 하는 거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생각해 학원엘 나왔다고 한다.
그가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했다. 내가 데이트 신청하는 거냐고 하니까 그게 아니고 식사만 같이 하잔다. 혼밥이 싫어서 식사 상대를 찾나? 우리는 식사를 하고 술도 한잔했다. 그런데 그가 벌게진 얼굴로 뜻밖에도 나와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식사만 같이 하자고 하더니 깜짝쇼인가? 갑작스런 그의 고백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듣기만 하다가 헤어졌다.
내가 김경석 그 사람에게 맘이 있다는 말을 같이 일하는 언니가 전했을 때 그도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갔다는데,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처자식이 딸린 자신의 입장이나 그런 말을 건넨 내 입장을 생각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그의 심정이 아주 눈곱만큼은 이해가 갔다. 내가 남의 사정을 헤아리다니 흐르는 세월에 아픔이 무뎌진 걸까?
사귀는 건 나중 문제고 일단 내일은 그 남자를 만나 주민등록증을 까보라고 해야겠다. 아니 주민등록등본을 보자고 해야겠다. 본명이 어떻게 되는지, 나이가 몇 살인지, 결혼은 했는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앞으로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본인 신상부터 밝히는 게 좋을 거다!
- 철없는 남자 -
그녀와 헤어진 그 담날 나는 도서관엘 나가지 못했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국수를 먹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아주는 국수는 정말 맛있었는데 말이다. 그녀에게 온다 간다 말 한마디도 못하고 이렇게 비겁하게 숨어버리는 못난 내가 싫다.
한 달이 흘렀다. 몇 번의 입사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은 나는, 사실 맨날 졸기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우연히 고교시절 아주 친했던 동창 녀석을 만났다. 그는 나의 구세주였다. 고교시절 수재로 통했던 그 친구는 대학을 전자공학과를 나와 모 그룹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최근 독립했다고 했다. (주, 그는 군엘 안 가서 일찍 졸업하였음)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인터넷 벤처회사를 차렸는데 자금이 달린다고 했다. 나는 귀가 솔깃해져서 그 친구한테 말했다. 자금을 댈 테니 너희 회사에 내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고. 날 불쌍하게 여긴 건지, 옛 우정이 남아서인지 그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돈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날 저녁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난 괜찮지만 며느리와 손자 굶기지 않으려면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 협박(?)에 굴복하고 정년퇴직 때 받은 퇴직금을 거진 다 내놓으셨다. 나는 큰 소리를 빵빵 쳤다. 이자까지 꼬박꼬박 쳐서 다 갚겠노라고. 그렇게 큰 소리를 쳐야 그래도 아버지가 조금은 안심하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직장생활은 꽤나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내 적성에 딱인 것 같다. 이런 재밌는 걸 놔두고 왜 여태껏 방황했던가? 난 사무실에 사장인 친구 책상과 나란히 내 책상을 놓았다. 그리고 친구랑 똑같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친구는 연구개발이다 마케팅이다 회사 관리다 하여 매우 바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알바 아니다. 난 그저 놀다가 졸다가 재밌는 일이나 찾아서 하루를 때우면 그만인 것이다.
몇 달이 흘렀다. 우연히 길에서 도서관에서 같이 놀던 뚱뎅이를 만났다. 뚱뎅이는 도서관 식당에서 일하는 지혜 씨가 아닌 다른 아가씨와 같이 있었다.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잘 어울리는 한쌍이다. 그런데 뚱뎅이는 아직까지 그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방황하고 있단다. 난 하루 종일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으니 그게 어디냐고 위로해 줬다.
그나저나 뚱뎅이와 지혜 씨가 사귄 게 아니었다. 둘 사이를 의심했던 내가 나쁜 놈이지. 그렇게 착하고 불쌍한 그녀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었는데. 식당 아가씨로부터 그녀, 지혜 씨가 식당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지혜 씨의 어머니란 사실도 알았다. 뜨아 그럴 수가? 그렇다면 계모가 분명할 것이었다!
난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사실 뚱뗑이를 다그쳤다. 그녀가 컴퓨터 디자인 학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나는 사장을 협박(?)하여, 요새 협박이 내 주특기가 되어 버렸다. 내 대학교 후배이자 아주 괜찮은 직원 한 명을 웹마스터로 발령내고 컴퓨터 학원에 다니도록 했다. 나는 그 직원에게 웹마스터 수업과 컴퓨터 디자인 수업 모두를 듣도록 종용하고 은밀히 지혜 씨 그녀에게 잘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잘 아는 동생인데 부담 가질지 모르니까 내 얘기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면서. 후배인 데다가 사장과의 관계를 잘 아는 그가 내 말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얼마 후 그 직원이 나한테 와서 물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정말 괜찮은 여자더라고, 그녀와 사귀어도 되느냐고. 짜식 여자 볼 줄은 알아가지고. 나는 당연히 '당근!'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 앞에선 한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하라고.
(1부 끝)
*지루하셨겠지만 1부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잠시 숨 돌리고 2부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