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움직이는 것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10
- 철든 여자 -
오늘은 일요일. 오후에 그 남자, 장석 씨를 만나기로 했다. 오장석. 컴퓨터 디자인 학원에서 만난 매너 좋은 그 사람 말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 주민등록증은 확인했고, 이름이랑 나이는 맞더라. 오늘은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뜨아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나의 단호한 표정에 그러겠노라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처음부터 잘 잡아놔야 한다.
난 느지막이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고 나서 커피를 홀짝이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다. 내가 식당일을 그만두고 학원엘 다닌다고 할 일이 없느냐? 그건 절대로 아니다. 청소하기, 빨래하기, 밥 짓기, 장보기 등 온갖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집안일이라는 게 해도해도 끝이 없고 해도해도 표가 안 난다.
물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고 밥값 하라는 엄마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학원비와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타 쓴다. 파출부보다 못한 대우다. 요즘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다리 밑에서 주어온 자식이 아닌가 하는.
한동안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나도 나름 규칙이 생겼다. 빨래는 일주일에 두 번, 청소는 이틀에 한번 그리고 일요일은 반드시 쉰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나에게도 월요병이란 게 생겼다. 하루 쉰 대가로 월요일엔 산더미 같은 집안일에 허리가 휜다. 에고 허리야! 생각만 해도 아프다.
구질구질한 얘기는 이쯤 하고, 난 인터넷으로 영화 프로를 검색했다. 이따가 장석 씨를 만나 영화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믹, 액션, 러브, SF... 다양한 영화를 맛보기와 함께 검색하다가 눈에 확 띄는 영화를 발견하였다. 화면이 거의 살색으로 도배된 찐한 애정영화, '앵두가 더 빨갈까 체리가 더 빨갈까' 였다. 그래 이걸 보는 거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외출 준비를 하였다.
장석 씨는 카페에 조용히 앉아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에 나뭇잎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 가지에는 간밤에 내린 눈이 덜 녹아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내가 앞자리에 앉자 그가 조금 놀란 듯 움찔하더니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미소 뒤로 쓸쓸한 여운이 흘렀다. 내가 겨울을 타나? 왜 이 남자가 이렇게 센티멘탈하게 보이지?
"가져오셨어요?"
난 맘을 독하게 다져먹고 그에게 물었다.
"뭘요?"
그가 딴청을 피웠다.
"주민등록등본 말이에요!"
나의 단호한 목소리에 그가 주저하며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저.. 여기요."
그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들고 내용물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주민등록상 그는 분명히 미혼이었다.
"됐네요. 여깄어요. 그리고 혹시 뭐 숨겨둔 아이라던가 그런 일은 없지요?"
"..예? 무슨 말씀을?"
그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분명하게 해놓고 싶다지만 이런 식으로 다그치는 내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순전히 경험에서 얻은 쓰라린 교훈이니까.
장석 씨와 극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당근 표도 그 사람이 끊었고 팝콘도 그 사람이 샀다.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고 화면 가득히 퍼지는 살색 그리고 거친 숨소리. 난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화면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언제부턴가 그의 손길이 내 무릎 위에서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난 자꾸 몸이 움찔거리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 돼.. 안.. 돼.......
정신이 아뜩해지려는 찰나 난 그의 손을 들어 그의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거기서 혼자 노세요!
- 새 남자 -
내 이름은 오장석이다. 이 글엔 1부 마지막 편에 첨으로 등장했지만 이제 이름 석자 밝히고 주인공으로 떳떳하게 데뷔하였다. 2부의 주인공은 나다! 비록 출연료는 없지만.
얼마 전 울 회사에 주책 상무, 사장 친구로 김경석이란 사람이 왔는데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여자 뒤 따라다니는 거, 노는 거, 술 마시는 거만 딥따 밝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처구니없게도 내 대학 선배라고 한다. 난 그런 사람이 대학 선배라는 게 창피스러웠지만 딱 한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그 주책 상무의 소개로 그녀, 임지혜란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처음엔 유유상종이려니 생각하고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말 괜찮은 아가씨란 생각이 들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귀엽게 미소 짓는 모습이 제법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맘씨도 착한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애경험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청순함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헛다리를 짚었다고나 할까? 보기완 다르게 그녀는 당돌하였다. 다짜고짜로 내 주민등록증을 보자느니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라느니 하여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무슨 속셈인가 궁금했지만 다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그런 것이려니 여기고 순순히 들어주었다.
오늘 카페에서 내 주민등록등본을 확인하는 그녀의 입가로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숨겨둔 아이가 어쩌고 저쩌고 한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고? 난 조카도 없는데.
지혜 씨와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런데 그녀는 예상과 달리 찐한 애정영화를 좋아했다. 데이트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과감하게 그런 영화를 보자고 한다. 밝히는 걸까? 아님 애정결핍일까?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고 화면 가득히 퍼지는 살색 그리고 거친 숨소리. 그녀는 더운 숨을 뿜어내며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
남녀관계가 가까워지는데 바디랭귀지가 최고라 했던가? 난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그녀의 무릎에 한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금씩 위로 위로 전진하였다. 그녀는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체 하는 걸까? 가만히 있었다.
난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행보를 재촉하였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하나 둘, 하나 둘. 마악 고지를 점령할 즈음 그녀가 내 손을 떼더니 내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이런 젠장! 좀 더 빠르고 과감하게 돌격하는 건데.
<계속>
*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은 2000년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