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든 여자 -
오늘 영화관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장석 씨가 그렇게 엉큼한 남자인 줄 몰랐다. 감히 소중한 곳을 그렇게 함부로 더듬으려고 하다니.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무너질 뻔했다. 그랬다면 얼마나 헤프게 보였을까?
영화를 보는 사이 자꾸만 어떤 눈길이 느껴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저쪽 대각선 너머로 웬 남녀가 꼭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꼴불견이다. 공공장소에서. 어두운 영화관이라고 안 보이는 줄 아나? 그렇게 붙어있고 싶으면 어디 모텔이라도 갈 것이지 말이다. 나중에 나갈 때 얼굴이나 확인해 봐야겠다. 그리고 한번 째려줘야지.
영화가 끝나고 장석 씨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난 사람들을 헤집고 아까 그 꼴불견 쪽으로 향했으나 이미 두 사람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아깝다. 한번 째려줬어야 했는데.
짧아질 대로 짧아진 한겨울의 해는 산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술이나 한잔하자며 날 데리고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를 시키고는 잔에 맥주를 가득 부었다. 원래 술을 잘 못하는 나는 입술만 적시고 안주만 집어 먹었다. 그는 거푸 몇 잔을 들이켜더니 이미 바닥을 드러낸 안주접시를 보고는 씩 웃었다. 그리고 돈가스 안주를 시켰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그의 성의를 생각해서 난 안주를 계속 먹어치웠고 그는 맥주만 마셔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로 취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데 그가 내 옆을 파고들었다. 난 자꾸만 구석으로 몰리고 그는 자꾸만 파고든다. 이제 봤더니 이 남자 되게 집요한 사람이다. 겨우 영화 한편 같이 봤다고 이제는 마음 놓고 달라붙는 걸까? 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온다.
술집을 나와 그가 날 집까지 바래다준다며 따라왔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우리 동네에서 내려 나란히 걸었다.그의 팔이 슬쩍슬쩍 내 팔을 건드리고 그의 술기운 섞인 숨결이 느껴졌다. 달지도 그렇다고 역겹지도 않은 숨결이었다.
집 앞 골목길에 도착하였다.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밤하늘엔 가느다란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내가 오늘 즐거웠다며 이만 돌아가 보라고 했다. 그는 뭔가 미련이 남았는지 머뭇머뭇하는 모습이었다. 혹시 또? 이런 엉큼한!
"담에 봐요!"
한마디 남기고 난 냉큼 집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내 뒤통수를 찌르는 그의 따가운 눈길이 느껴졌다.
- 괜찮은 남자 -
모두들 별칭이 있는 것 같아 나도 별칭을 달기로 했다. 지금부터 나의 별칭은 '괜찮은 남자'이다. 앞으로 많은 사랑을 바란다.
오늘 영화관에서의 일이 계속 아쉽다. 그녀가 주춤주춤 할 때 마치 잠자는 토끼 옆을 거북이가 지나가듯 순식간에 해치웠어야 하는 건데 말이다. 일이 술술 잘 풀릴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먹고 말았다. 앞으로 그녀가 바짝 경계를 할 텐데 어떻게 그 벽을 넘는담?
영화관을 나오니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난 그녀의 손을 끌고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뭔가 기회를 만들려면 역시 술이 최고가 아닌가? 적당한 술은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고 상대를 멋져 보이게 하니까.
맥주 몇 병과 마른안주를 시켜서 그녀의 잔에 맥주를 가득 부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술을 못한다며 입술만 적시고는 안주만 축내고 있었다. 이런? 이러면 안 되는데. 속이 탄 나는 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안주를 집으려고 더듬으니 이미 접시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피식 헛웃음이 났다. 그녀는 안주 킬러였던 것이다. 할 수없이 양이 푸짐한 돈가스 안주를 시켰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엄청난 식욕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계속 안주만 먹어댔고 난 맥주만 마셨다.
시간이 흐르고 난 괜히 취한 체하며 그녀의 옆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자꾸 피하고 난 그녀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이제 봤더니 이 여자 되게 소심하다. 이제는 아예 날 벌레 보듯 한다. 오늘 완전히 스타일 구겨지는 날이다. 아!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온다.
술집을 나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했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그녀의 동네에서 내려 나란히 걸었다. 팔을 뻗어 슬쩍슬쩍 그녀의 팔을 건드려 보았다. 은은하게 그녀의 숨결이 느껴진다. 아! 달콤하고 향기로운 숨결이다. 저 밑바닥으로부터 뭔가 꿈틀하고 솟구쳐 오르는 게 있었다.
그녀의 집 앞 골목길에 도착하였다.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는 가로등도 잠이 오는지 깜빡깜빡 졸고 밤하늘엔 조그만 초승달도 구름 속으로 살며시 숨고 있었다. 분위기는 분명한 타이밍이었다! 기회를 엿보며 그녀의 빈틈을 찾고 있는데,
"담에 또 봐요!"
그녀가 날름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완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다. 결국 오늘 하루 아무 소득 없이 스타일만 구겼다. 이러다가 언제 그녀 손을 잡고, 언제 뽀뽀하고, 언제 '자기야~ 내 꿈 꿔!'를 하냔 말이다.
우워! 난 한마리 고독한 늑대가 되어 초승달을 올려보다가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구름 속에서 벗어난 초승달이 날보고 웃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