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바위에서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14

by 이은호



- 철없는 남자 -


마지막 고지가 저 앞인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웨이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서비스..."


화채 그릇을 들고 들어오던 그 넘은 말도 끝내지 못하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난 불청객을 뚫어져라 노려봤고 그 넘도 지지 않으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이론.. 뜨바!"


난 그 녀석을 향해 손에 잡히는 대로 휴지통을 집어던졌고, 녀석은 살짝 피하며 우릴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돌아서서 나갔다. 저 녀석이? 팁도 후하게 줬는데 눈치 없는 넘 같으니라구! 잠시 정신을 딴 데 쏟았더니 김이 빠져서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야, 그만 나가자!"


주연이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난 내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그녀도 맥 빠진 얼굴로 옷을 고쳐 입었고 우리 둘은 그렇게 룸을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니 찬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와 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저 멀리로 바닷가 도로변에 빠알간 불빛이 새어 나오는 포장마차가 죽 늘어서 있었다.


"우리 저기 가서 따끈한 오뎅국물 좀 마시고 갈까?"

"좋아요."


그녀와 난 한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사실 어떻게든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고 싶었다. 소주 한잔을 입에 탁 털어 넣고 따끈한 오뎅국물을 마시니 속이 짜르르 젖어오는 게 아주 그만이었다. 그래 이 맛이야! 술은 역시 소주지! 옛날에 아니 얼마 전 주머니가 달막달막 할때, 겨우 소주 한병 시켜서 목구멍을 달래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잔 또 한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그녀도 뭔가 감회가 있었던지 소주잔을 거푸 기울이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둘이서 소주 3병을 비우고서 포장마차를 나왔다.



밖에 나오니 훈훈한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맞았다. 술기운인지 가슴이 뜨거워져 있었던 것이다. 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바닷가 길을 따라 걸었다. 저 앞 갯바위 위에 긴 머리의 한 소녀가 홀로 쓸쓸하게 서있는 게 보였는데, 노브라 차림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몇 년째 우두커니 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어상이었다. 나는 불현듯 그녀에게 가까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저기 인어상 있는데 가볼래?"


난 좋다고 따라나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갯바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갯바위가 흔들거리고 바닥이 자꾸 밑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그랬는지 발걸음이 그다지 날렵하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고, 하나 더 간과한 사실은 폭이 좁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혼자 뒤뚱뒤뚱 갯바위 위를 걷던 그녀는 간격이 조금 벌어진 갯바위 두 개를 연거푸 폴짝폴짝 건넜고, 그다음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금 더 폭이 벌어진 갯바위를 건너려고 그녀가 다리 한 짝을 벌렸는데, 그 간격이 치마가 벌어질 수 있는 폭을 넘어섰던 것이었다. 그녀의 벌어진 다리는 그만 허공을 그었고 이어 몸이 앞으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아까 룸에서야 푹신한 소파 위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갯바위 위로 처박히고 말았고 순간 술이 확 깬 나는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다행히 숨이 붙어있었고 넘어지면서 반사적으로 손을 짚어서 인지 얼굴은 그런대로 말짱해 보였다. 한참을 흔들어도 기절을 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 이런 낭패가! 아까 룸에서부터 일이 꼬이더니!


주위에 사람은 없고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 생각나는 전화번호가 있었다. 119! 그렇다. 평소에 TV에서 119 구급대의 활약상을 익히 봐왔던 터였다.


우리의 믿음직한 친구 119 구급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0분도 채 안되어 도착하였고, 그녀를 싣고 병원 응급실로 향할 수 있었다.




- 잘난 여자 -


아 오늘은 정말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잘난 여자로 등장한 세 번째에 이런 날을 맞다니! 해도해도 너무한다. 아마도 이 허접작가가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ㅜㅜ



경석 씨와 영화에 암소갈비에 나이트에,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룸에서 약간 방심하는 바람에 그에게 기습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좋다. 까짓 거, 거기까지는 이해한다. 어느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하지만 내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인 것은, 그것이 웨이터라고 해도 내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무대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절대로 남에게 호락호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법이다.


그와 난, 김도 빠지고 기분도 상해서 계속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망가진 화장과 구겨진 옷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텅 빈 거리엔 찬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와 우리를 맞았고 저 멀리로 바닷가엔 전등이 하나씩 켜진 포장마차가 죽 늘어서 있었다.


"우리 저기 가서 따끈한 오뎅국물 좀 마시고 갈까?"

"그럼요.. 좋아요!"


그와 난 한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그는 소주 한잔을 입에 탁 털어 넣고는 뜨거운 오뎅국물을 호호 불면서 맛있게 마셨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도 지으면서. 나이트클럽에선 비싼 30년짜리 발렌타인도 남겨놓고 나왔으면서 그깟 싸구려 소주가 맛있을까? 정말 미스터리였다.


난 찜찜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 소주잔을 들고 원샷했다. 덴장! 싸구려 소주는 아주 썼다. 그가 한잔 또 한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고 나도 덩달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제 조금 달짝한 맛이 느껴졌다. 치즈와 햄과 육포가 어우러진 고급 안주를 마다하고 이런 데서 먹는 찝찔한 오뎅국물이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정말 미스터리다. 우리는 그렇게 소주 3병을 비우고서야 포장마차를 나왔다.



밖에 나오니 치마 밑으로도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래 안다. 나 오늘 많이 마셨다. 그래서 가슴이 뜨겁다.

그와 나란히 바닷가 길을 따라 걸었다. 저 앞 갯바위 위에 웬 뇬이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가만히 보니 몇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어상이었다. 미친뇬! 추운데 노브라로 있네?


"우리 저기 인어상 있는데 가볼래?"


그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역시 여자라면 밝히고 보는 스타일인가 보았다. 인어상이 뭐 볼게 있다고. 갯바위에 올라서자 바위가 흔들리고 바닥이 밑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거기다 폭이 좁은 치마를 입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최대의 실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갯바위 두 개 까지는 폴짝폴짝 잘 건너뛰었는데 그다음에 문제가 발생했다. 조금 더 폭이 벌어진 갯바위를 건너려고 다리 한 짝을 벌렸는데 그 간격이 치마가 벌어질 수 있는 폭을 넘어섰던 것이다. 순간 벌어진 다리는 허공을 그었고 이어 몸이 앞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


유럽에 가면 지나가는 뱃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 인어가 산다고 하던데.. 난 뱃사람도 아닌데... 인어의 긴 머리가 내 목을 휘어 감고... 켁켁!


비몽사몽 헤매다 번쩍 눈을 떠보니까 낯선 차 안이었고, 경석 씨와 웬 제복을 입은 남자가 근심스러운 듯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온몸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계속>




이전 13화흔들리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