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철든 여자 철없는 남자 #15

by 이은호



- 철없는 남자 -


우리의 믿음직한 119 구조대의 응급조치와 긴급 후송으로 주연이는 무사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녀는 오른쪽 발목과 팔을 다쳐 한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다. 의사 말로는 일단 한 달 정도 입원해보고 다시 보자고 했다. 덴장! 한참 진도 뽑아야 할 찬스에 이게 뭐람?


그녀가 입원해있는 동안 난 자주 그녀를 찾았다. 꽃다발을 들고 맛있는 걸 사들고. 사실 회사에 있어봤자 별달리 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괜히 인어 보러 가자고 해서 다친 그녀를 놔두고 또 딴데 한눈을 팔 수는 없었다. 그 정도 양심은 살아있다. 그러고 보면 난 괜찮은 놈인 거 같다.


그녀의 집은 원래 시골이고 서울에는 오빠와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오빠는 그런대로 괜찮은 직장엘 다니고, 그녀는 그렇게 날라리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병실을 찾는 가족도 없고 그녀의 오빠도 볼 수 없었다. 오빠라? 어쨌든 그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잘못하면 그녀의 날라리 행각을 모두 내가 뒤집어 쓸지도 모른다.



팔과 다리만 다쳤을 뿐 정신적으로나 그 외 육체적(?)으로 멀쩡한 그녀는 무척 갑갑해했다. 맨날 여기저기 나돌아 다니던 날라리가 병실에 갇혀있으려니 오죽하겠는가? 그녀는 하루 종일 만화책 보고 시끄런 음악 듣고 혼자 놀다가 내가 들어서면 마치 먹이를 만난 암사자 마냥 달려들었다. 입가에 앙큼한 미소를 머금고.


덕분에 나는 그녀의 투정을 받아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길에 올랐다.휠체어를 밀면서 걸어가는 나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부부 사이로? 애인 사이로? 오빠와 동생 사이로?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 그런 놈이다.


두꺼운 외투를 입혔음에도 추운 날씨로 그녀의 볼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그녀의 빨간 입술사이로 새어 나왔다. 조금 벌어진 입술사이로 가지런하게 정돈된 하얀 이가 보였다. 한참만에 코끝마저 빨개진 그녀가 병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병실로 돌아와 그녀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혔다. 그녀가 추운 데서 떨어서인지 다리가 저린다고 했다.병실은 4인실이었는데 마침 다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난 그녀를 엎드리게 하고 그녀의 다리를 정성껏 주물러 주었다. 충만한 젊음과 춤으로 단련된 탄탄한 그녀의 몸, 종아리, 무릎, 허벅지 그리고 ...... 얇은 환자복을 통해 그녀의 감촉과 체온과 살 내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가 내 손안에 있다. 아~ 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약과 주사 도구를 챙겨 든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와 나의 빨개진 얼굴과 뜨거운 기운이 감도는 실내를 둘러본 간호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자분은 나가주세요!"


간호사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뒤로하고 난 병실을 쫓겨 나왔다.


우연히 응급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밖이 소란스러웠다. 뭔 일인고 하고 고개를 삐죽 내밀어보니 어떤 남녀가 황급히 들어서는 게 보였다. 남자가 몸이 불편한 듯 여자랑 간호사가 양쪽으로 남자를 부축하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난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들은 바로 임지혜와 오장석이었던 것이다.




- 잘난 여자 -


애앵 애앵! 믿음직한 119. 우리의 친구 119!


욱신욱신 쑤셔오는 팔다리를 움켜쥐고 병원에 도착하였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다음날 전문의의 진료를 거쳐 병원에 입원하였다. 오른쪽 발목과 오른팔을 다치고 이곳저곳에 타박상을 입었다. 의사 말로는 일단 한 달 정도 입원해보고 다시 보자고 한다. 난 의사한테 다치기 전과 똑같이 원상복귀시켜 달라고 했다. 안 그러면 책임지라고. 책임지라는 말에 의사가 졸았는지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입원해있는 동안 경석 씨가 거의 매일 찾아와 주었다. 꽃다발을 들고 맛있는 걸 사들고. 그런 걸 보면 내가 꽤나 맘에 들었나 보다. 그래도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우리 집은 원래 시골이고 서울에는 오빠와 둘이 살고 있다. 오빠한테 전화를 해서 사고 소식을 알리고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한테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러 다니다 이렇게 다친 날 보면 부모님은 뭐라고 할까? 병원에서 어디로 도망갈 데도 없고 그 잔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오빠는 잠시 병원에 들렀다가 바쁘다며 이내 가버렸다. 평소에 맨날 공부 안 하고 놀러만 다닌다고 구박하던 오빠가, 역시 아픈 나도 외면하였다. 아무래도 친오빠가 아닌가 보다. 나중에 엄마한테 따져봐야겠다.



팔과 다리만 다쳤을 뿐 정신적으로나 그 외 육체적(?)으로 멀쩡한 나는 무척 갑갑했다. 맨날 여기저기 나돌아 다니던 내가 하루종일 병실에 갇혀있으려니 오죽하겠는가? 독서하고 음악 감상하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그렇게 지루하게 있다가 그가 오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에게 막 달려들었다. 난 감정표현이 너무 솔직해서 탈이다. 하지만 입을 벌리고 좋아하는 그를 보면 내 마음도 기쁘다.


그가 나를 휠체어에 태우고 산책을 시켜주었다. 그가 외투도 입혀주고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자상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보니 남같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상하게 감정이 자꾸 쏠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너무 추워 그만 들어갔으면 싶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있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참았다. 볼이 빨개지고 입에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한참만에 코에서 콧물이 흘러나올 정도가 되어 할 수 없이 병실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병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추운 데서 떨어서인지 다리가 저려왔다. 병실은 4인실이었는데 마침 우리 외엔 아무도 없었다. 다리가 저리다고 하니 그가 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내 다리를 타고 그의 손길이 천천히 올라온다. 종아리, 무릎, 허벅지 그리고 ...... 얇은 환자복을 통해 그의 뜨거운 손길이 전해져 온다. 내 엉덩이 위에서 그의 손이 멈춘다. 아! 정신이 아득해진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약이랑 주사 도구를 챙겨 든 간호사가 들어왔다. 나와 그의 빨개진 얼굴과 후끈한 기운이 감도는 실내를 둘러본 간호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분은 나가주세요!"


그가 나가고 난 간호사한테 몸을 맡겨야 했다.


"주사 맞아야 되니 엉덩이 까주세요!"


퉁명스런 간호사의 말에 대꾸 한마디 못하고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깠다. 수액을 통해 혈관주사를 놓으면 될 텐데 굳이 엉덩이에 근육주사를 맞아야 한단다. 조금 전 그의 뜨거운 손길이 스쳤던 자리를 우악스런 간호사의 손길이 그리고 뾰족한 주삿바늘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간호사는 뭔 불만이 그리 많은지 아주 아프게 주사를 놓고 나갔다.


나쁜 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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