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든 여자 -
학원에서 만난 장석 씨는 지난 일로 서운했는지 영 떫은 감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자가 쫀쫀하기는 그깟 일로 말이다. 장석 씨,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서두르지 말라고요.
"장석 씨, 이거 어떻게 해요?"
"아 그거요? 모르겠는데요."
내가 모르는 걸 물어봐도 그는 그냥 건성이었다. 이런 괘씸한! 버릇을 고쳐놔야지! 하지만 여자가 폭력을 휘두를 수는 없고 난 따끈한 커피를 뽑아와 그를 보고 살짝 웃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 수준에 맞게 미인계를 써야지!
머뭇머뭇하던 그는 나를 슬쩍 보더니 내가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고서 안심한 듯 컵을 들고는 홀짝거리며 마셨다. 하지만 나는 곁눈질로 다 보고 있었지롱. 헤헷!
"험험.. 지혜 씨! 아까 물어봤던 거 있지요? 자세히 보니 이렇게 하는 거네요."
잠시 후 그가 내 곁으로 와서는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얏호! 남자들은 역시 미인계에 약해.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그와 같이 거리로 나왔다. 외투를 입었음에도 차가운 겨울바람이 다리를 휘감고 지나가자 오싹하고 한기가 들었다. 뭔가가 없을까? 둘러보는 내 눈에 저 앞으로 포장마차가 들어왔다. 저기엔 매콤한 떡볶이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뎅이 있겠지? 난 뜨끈한 오뎅국물을 기대하고 입맛을 다시며 그의 손을 끌고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곳은 술을 파는 곳이었다. 각종 해산물과 삶은 문어, 오징어, 노가리, 닭발 등등 푸짐한 안주거리에 술을 파는 곳 말이다. 아.. 이 사람 또 술 한잔하고서 지난번처럼 달라붙는 건 아니겠지? 걱정도 됐지만 내가 끌고 들어온 곳을 그냥 나갈 수도 없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한 것은 뜨끈한 오뎅국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주 한 병에 안주로 삶은 오징어와 오뎅을 주문하였다. 나는 그가 따라주는 소주잔을 입에 슬쩍 갖다 댔다가 내려놓고 뜨거운 오뎅국물을 홀짝이며 몸의 찬 기운을 몰아내었다.
"소주 한잔 마시면 추위가 싹 달아날걸요?"
거푸 몇 잔을 들이켜고 발그레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됐네요. 장석 씨나 술기운으로 추위를 몰아내세요. 전 오뎅국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는 추위가 대단했던지 소주를 두 병이나 비우고 나서야 그만 일어나자며 포장마차를 나섰다. 비틀하며 일어서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불안감을 느끼며 그를 따라나섰다. 가로등의 썰렁한 불빛 아래 인적 드문 거리엔 찬바람이 낙엽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거리를,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외투의 앞섶을 풀어헤치고 껑충거리며 뛰어다녔다. 난 그때 알았다. 남자는 술에 취하면 약 먹은 토끼가 된다는 사실을.
"장석 씨! 뭐 하세요? 그러다 넘어지겠어요!"
비틀거리며 껑충거리는 그의 모습이 불안하여 그에게 소리치며 다가갔다.
"봐요! 술을 마시니까 하나도 안 춥지!"
그는 아예 외투를 벗어 들고 실실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맛이 간 토끼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어이가 없었지만 비틀거리는 그가 행여라도 넘어질새라 내가 부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러다 내가 그의 집까지 바래다줘야 하는 거 아냐?
내 걱정은 기우로 끝나지 않았다. 별로 높지도 않은 야트막한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가 그만 삐끗하고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어이쿠!"
"악!"
덕분에 그는 물론이고 그를 부축하고 있던 나도 함께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자세에서 같이 넘어지는 바람에 마치 신방이라도 차린듯 나는 그의 팔을 베고 누웠고, 한동안 그 자세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하늘에는 별들이 초롱초롱, 반달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
이런 덴장! 정신을 가다듬고 주춤주춤 일어서는데 옆구리 하고 엉덩이에 통증이 왔다. 그는 그때까지 아예 눈을 감고 널브러져 있었다.
"장석 씨! 장석 씨!"
한참을 흔들어 깨우자 그가 눈을 떴다.
"아, 지혜 씨! 벌써 아침이에요?"
그의 엉뚱한 대답에 어이가 없었지만 꾹 참고 그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아.. 아야! 내가 왜 이러지?"
팔을 짚고 일어서던 그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아무래도 단단히 탈이 난 것 같았다.
"여기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요!"
난 내가 아픈 건 까맣게 잊은 채 허겁지겁 도로로 올라와 택시를 잡았다. 빈 택시를 찾아 한참을 헤매다 겨우 모범택시를 잡았고,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그를 태우고 병원으로 갈 수가 있었다.
- 괜찮은 남자 -
학원에서 난 일부러 지혜 씨를 외면했다. 지도 양심이 있다면 알아서 하겠지!
"장석 씨~ 이거 어떻게 하지요?"
그녀가 별 것도 아닌 걸 물어왔다. 머리가 나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 그거요?"
짐짓 아는 체를 하려다가 지난번 쌀쌀했던 그녀의 태도가 생각나 모른체 했다.
"저도 모르겠는데요."
허탈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와 참느라고 혼났다. 잠시 후 그녀는 따끈한 커피를 뽑아오더니 나를 보고 살짝 웃으며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어? 의외인걸!
그녀의 눈치를 슬쩍 살폈더니 그녀는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까 물었던 걸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해력이 좀 부족한 모양인데 맘 좋은 내가 해결해 줄 수밖에.
"험험.. 지혜 씨! 아까 물어봤던 거 있지요? 자세히 보니 이렇게 하는 거네요."
내가 한 수 지도해주자 그녀가 환한 미소를 띠고 기뻐한다. 후훗! 역시 여자들은 단순해!
학원에서 그녀와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그녀와 같이 거리로 나왔다. 찬바람이 씽씽 불었는데 그녀가 추위를 타는지 잔뜩 웅크리고 달달 떨고 있었다. 저 앞에 술 파는 포장마차를 발견한 그녀가 다짜고짜 내 팔을 끌고 그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 지혜 씨가 언제부터 포장마차 술집을 좋아했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좋은 찬스라고 생각한 나는 쾌재를 부르며 따라갔다.
포장마차에는 각종 해산물과 삶은 문어, 오징어, 노가리, 닭발 등등 먹음직스럽고 푸짐한 안주거리가 가득 있었다. 난 소주 한 병에 안주로 삶은 오징어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오뎅을 주문하였다. 그녀는 내가 따라준 소주잔을 입에 슬쩍 갖다 대고는 바로 내려놓고 뜨거운 오뎅국물을 홀짝이며 오뎅을 먹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덴장! 지난번에 먹는 걸 밝히는 줄은 알았지만 오늘도 술은 안 마시고 여전하군!
"소주 한잔 마시면 추위가 싹 달아날걸요?"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녀에게 한 마디 했다.
"됐네요. 장석 씨나 술기운으로 추위를 몰아내세요. 전 오뎅국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녀는 앞에 빈 꼬지를 수북이 쌓아놓고 또 오뎅을 집어 들고 있었다. 야! 그게 오뎅국물이냐? 벌써 오뎅을 그렇게 많이 먹고선. 삶은 오징어도 네가 다 먹었잖아!
술은 안 먹고 안주만 먹어대는 그녀의 모습에 괜히 열받아 혼자서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다. 빈속에 연거푸 들이부었더니 슬슬 취기가 오르는 게, '술기운으로 뭔가를 해보려던 내 계획이 빗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비틀하며 일어서는 내 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그녀가 따라나섰다.
가로등의 썰렁한 불빛 아래 인적 드문 거리엔 찬바람이 낙엽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난 껑충껑충 뛰며 내가 끄떡없다는 걸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아예 외투까지 벗어 들고 나의 건재를 과시하자 그제야 그녀는 내 팔짱을 끼며 달라붙는 것이었다. 역시 남자는 힘! 힘이야!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걷는데 길이 좀 울퉁불퉁하기도 하고 보도블록이 자꾸 일어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하지만 난 할 일이 있었다. 그녀와 허심탄회하게 진지하게 우리의 인생 얘기를 할, 적당한 곳을 찾는 나의 눈에 저쪽 계단 밑으로 조그만 화단과 벤치가 보였다. 그렇지 저기가 좋겠어. 난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냥 평범한 계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계단 한 칸이 아무리 딛어도 발이 닿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허공을 나는 기분을 느끼는 순간 그냥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지혜 씨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아.. 지혜 씨! 벌써 아침이에요?"
라고 했더니 지혜 씨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방안은 아닌 것 같고. 아.. 그렇구나! 내가 저 계단에서 굴렀지! 그제야 상황을 번개같이 정리한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런데 팔과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아.. 아야! 내가 왜 이러지?"
나는 풀썩하고 그 자리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탈이 난 것 같았다.
"여기 꼼짝 말고 그대로 앉아있어요!"
그녀는 잠시 날 살펴보더니 허겁지겁 도로로 올라가 택시를 잡았다. 한참 후 나는 그녀와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