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와 더불어 도가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인 장자(莊子)는 전국시대 송(宋) 나라 사람으로, 한때 말단 관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삶은 '맞다' 또는 '아니다' 중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며, 두 개의 상반된 가치는 마치 하나로 이어진 도르래와 같아서, 둘을 나누어서 단정하지 말고 큰 하나로 보아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만을 절대시 하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분별지(分別知)를 초월해야 하며, 좌망(坐忘)과 심재(心齋)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를 잃어버린 상태(吾喪我)에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유롭게 노닐다 보면 그것이 곧 양생이 되고, 처세의 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정치색을 띄어 임금과 군자의 도를 논하기도 하였으나, 장자는 거의 정치색을 띄지 않고 인간 본연의 도를 강조하였으므로, 저같이 평범한 사람 입장에서는 장자의 말씀이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而未知有無之 果孰有孰無也
이미지유무지 과숙유숙무야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하겠다. -장자 제물론(莊子 齊物論)-
있음이 있고, 없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이 있고, 없음이 아직 형성되지 않음도 없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홀연히 있음과 없음이 생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있다' 혹은 '없다'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자기 생각대로 있다 혹은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신에게는 관대한 반면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또 나와 의견이 다르면 '그르다' 하고 나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최대의 이슈가 되어있는 의대생 증원 문제를 보면, 우리나라 의사수는 정말 부족할까요? 아니면 많을까요? 아니면 적정 수준일까요? 어떤 이는 부족하다 하고, 어떤 이는 많다고 합니다. 다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인데 의견이 제각각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제 고집대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협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만 옳고, 나만 사실을 똑바로 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장자의 도를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세상 일은 '맞다' 또는 '아니다' 중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며, 두 개의 상반된 가치는 마치 하나로 이어진 도르래와 같아서, 둘을 나누어서 단정하지 말고 큰 하나로 보아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는 것이라고.
聖人不由 而照之於天
성인불유 이조지어천
성인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
사람이 인생 후반기쯤 살게 되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시작하면 반드시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평범하고 평안하게 보내야 할 하루하루를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시시비비의 덫인 것입니다.
서로의 의견과 주장이 팽팽할 때, 동의 가능한 하나의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옳고 그름을 격렬하게 따지는 행위가 과연 바람직할까요? 장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대립과 갈등만 증폭된다고 합니다. 장자의 생각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합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면 모든 사람들이 긍정하는 답이 나오는가?' 이것 역시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이유는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그런 관점을 갖게 된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김삿갓은 시시비비시(是是非非詩)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똑바로 가려내고자 할 때 시시비비라는 말을 씁니다. 시시비비가 시빗거리가 되어 불상사 일어나기도 합니다. 김삿갓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이 오히려 시시비비에 목숨을 거는 꼴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생이 곧 사가 되고 사는 곧 생이 된다고. 가능했던 일이 불가능해지도 하고, 불가능했던 일이 또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옳음을 따르다가 그름을 따르기도 하고, 그름을 따르다가 옳음을 따르기도 합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여전히 옳은가, 그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른가?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이야기입니다.
장자의 말에 의하면, 성인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하늘의 이치에 비추어 모든 것을 보고 따른다고 합니다. 하늘의 이치란 자연스러움이 아닐까 합니다. 시시비비를 함부로 가리지 않고, 나와 다른 누군가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 말입니다. 만일 정부가 의사단체의 의견을 포용하고, 의사단체가 정부의 정책을 포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연스럽게 합리적인 방안이 도출되지 않았을까요? 결코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선진국은 국민의 건강을 이끄는데 최우선적인 정책을 편다고 합니다. 생활체육이 그 뒷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국민들의 건강을 잘 유지시키고, 의료는 응급진료체계를 제대로 구축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반면에 우리 사회는 건강 유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공부하고 경쟁에 시달리느라 생활체육은 언감생심입니다. 어려서부터 생활체육이 몸에 배야 하는데, 대부분 은퇴 후에나 조금 맛보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건 정신이건 정상이기가 힘듭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조금만 아프면 의사를 찾습니다. 예방활동을 중요시하느냐, 사후관리를 중요시하느냐, 어떤 게 맞을까요? 정답이 있나요?
立不敎 坐不議
립불교 좌불의
서 있을 뿐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을 뿐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억지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인생의 후반부를 사는 나이가 되면 더 그러합니다. 왕년에 내가 누구였는데 하고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시대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후배, 자식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거부감의 대상이 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것을 채우는 게 아니라 가진 것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여백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유 없이 빽빽하게 채워진 사람을 보면 쉽사리 다가가기가 어렵습니다. 젊은이들로부터 흔히 말하는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본인의 기준으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 참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유 있고 넉넉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천 년도 더 전에 장자는 이미 나이 든 사람이 꼰대가 되는 것을 경계하였던 셈입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혹시 그동안 상대방의 입장은 무시한 채 나의 방식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요? 나만을 우선시하느라 관계가 망가지는 것도 모르지는 않았는지요?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제 시시비비를 내려놓고 '알 수 없음'을 선언한 후,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포용으로 상대방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동안 관계가 지루했다면 그건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지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관계의 중심은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하고, 내가 먼저 웃으며 다가서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초조했던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동안 평범하고 평온할 날을 스스로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던 시시비비의 덫에서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 이 글은 김범준著, '오십에 읽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