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화엄경-
밤하늘에 한가위 보름달이 둥실 떠올랐습니다. 어떤 이는 가족과 함께 달을 보며 포근함을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타지에서 홀로 달을 보고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외로움에 잠길 것입니다. 그런데 달이 실제로 포근하거나 외롭거나 할까요? 아닙니다. 달은 아무런 감정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단지 달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러할 뿐입니다.
버스를 탔는데 멀쩡한 청년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습니다. 그 옆에는 일흔이 훌쩍 넘어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가 서 있습니다. 마땅히 자리를 양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묵묵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습니다. 결국 육십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몇 정거장이 지나고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인이었던 것입니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버티고 있던 청년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리에 앉아있을 때나 버스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나 똑같은 사람인데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사실을 '팩트'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입니다. 그런데 이 팩트처럼 뿌리가 약한 것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과거에 사실이라고 했던 것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근거가 약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거기에 누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보름달은 그냥 보름달이지 그게 포근하거나 외로운 것이 아니듯, 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요? 과거는 절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일까요? 그렇다면 과거에 내가 겪었던, 내가 보았던, 내가 느꼈던 것들이 지금도 똑같은 감정으로 남아 있나요?
저는 정말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어린 시절 먹을 거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거 제대로 못 입고 힘들게 자랐습니다. 학교를 다니기 힘든 고비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주위에 도움을 주는 손길이 있어 학업을 이어갔지만 힘들었습니다. 그 시절 부모님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왜 나를 낳아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시절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건강한 몸과 스스로 벌어먹고 살 정도의 머리와 능력을 물려주신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겪었던 힘들었던 경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웬만한 어려움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단단해졌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변덕스럽습니다.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바뀝니다. 비참한 과거였는가, 나를 단련시키는 과정이었는가? 무의미한 과거였는가, 유의미한 과정이었는가?
삼십 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나올 때, 믿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컸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한 것 밖에 없는데,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렸습니다. 퇴직하고 나서도 그들은 나를 내쫓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직원들에게 저를 모함하고 안 좋은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억울했고, 그들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악연(惡緣)을 끊어낸 것으로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과 계속 얽혔다면 그들은 내 영혼을 모조리 갉아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라도 그들로부터 멀어진 게 내 인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고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나를 옭아매는 과거, 과거를 바꾸어야 삽니다. 그러면 현재가 바뀌고 미래가 바뀝니다. 과거의 삶이 어땠는지, 그때의 내가 아니고 '지금'의 내가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삶을 통하여 그 결정을 입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옳은 결정이었다는 것을. 과거를 포함한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생의 비밀이며 기적입니다.
括囊 无咎 无誉
괄낭 무구 무예
자루를 틀어 묶어 허물을 없이 하고 명예도 없이 하라. -주역 곤괘-
중국 은나라 사람들은 갑골점을 쳤습니다. 불에 달군 막대로 갑골을 지져 갈라지는 금의 모양을 보고 하늘의 계시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자루를 틀어 묶는다'는 것은 의견이 분분할 때, 왕이 나서서 한 가지로 확정하여 자루에 넣고 틀어 묶어 일절 다른 말이 없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역경에서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무엇이라 규정할 것인지에 대해 결단을 내렸다면, 자루를 틀어 묶듯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단, 이때 허물도 없이 하고, 명예도 없이 하라고 합니다.
허물에 대하여,
역경에서는 허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无咎者 善補過也
무구자 선보과야
허물이 없다는 것은 과오를 잘 보수했다는 말이다. -계사상전-
이 말은 자신이 저지른 어떤 과오로 인하여 상처가 나기는 했지만, 상처를 잘 치료했기 때문에 흉터(허물)가 남지 않았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즉, 과오를 고치기 위한 후속적인 노력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과오가 기억에 계속 불명예로 남지 않는 경우입니다.
역경에서 '허물이 없도록 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바로 과거의 사실들을 바꾸어 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성찰하고, 그 과정을 통해 지나온 삶에서 어떤 과오가 발견된다면 이를 잘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그 과오가 허물로 계속 남지 않습니다. 단, 이러한 성찰과 치유의 과정 앞에 '자루를 틀어 묶으라'는 조언이 선행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성찰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에 좌우되는 성찰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는 성찰이어야 함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될 것입니다.
명예에 대하여,
다음으로 역경에서는 '명예도 없이 하라'고 조언합니다. '명예(名譽)'는 '도덕적 또는 인격적으로 두루 인정받아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공적이나 성과 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기서 '두루 인정받는다'는 것은 남이 그렇게 본다는 뜻입니다. 즉, 명예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도 없이 하라'는 것은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해 타인의 시선에 구애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라면 이미 명예로운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역경의 조언을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나의 인생을 무엇이라 규정할지 결단을 내렸다면, 자신의 결단에 대해 자루를 틀어 묶으라. 그리고 그 기준에 비추어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잘 치유해서 그 과오가 허물로 계속 남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라. 아울러 그러한 노력에 더하여 명예를 얻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일절 하지 말라.'
어째서 이러한 조언을 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인생에서 어떤 보람을 찾지 못하는 경우의 상당수가, 바로 내 인생의 보람이 아닌 타인의 것을 위해 소중한 내 시간과 기운을 낭비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래놓고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을 합니다. 헛 힘을 쓰는 꼴입니다. 인생의 후반부에서 이제 나의 시간과 기운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오로지 나 스스로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通變之謂事
통변지위사
변덕을 관통해 내는 것을 일러 사람의 일이라고 한다. -계사상전-
인간 정신의 힘은 과거를 바꾸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변덕스러운 우연에 휘둘리지 말고, 모두 굴복시켜야 합니다. 특히 악연에서 비롯된 변덕이라면 그것이 과거가 됐건 현재가 됐건 반드시 끊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하늘의 뜻을 이루고자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인생의 전반기는 생(生)의 단계, 인생의 후반기는 성(成)의 단계라고 합니다. 인생의 전반기를 살기 위해서 치열하게 보냈다면, 후반기는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 내기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루를 틀어 묶고, 과거를 성찰하여 허물을 없이 하고, 남의 시선을 의식한 명예도 없이 하는 데 있습니다.
※ 이 글은 강기진著, '오십에 읽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