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곳은 지상낙원 같았다. 안락한 보금자리에 자연에서 수확한 먹거리가 풍부하고, 온화한 성품의 사람들. 걱정거리도 신경 쓸 일도 없어 보였다. 그동안 지구가 어떤 변화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 평온한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김박사 일행이 며칠간 머무르며 그들을 지켜보았을 때, 그들은 과거 고대시대의 농경사회의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창고에는 수확한 농작물이며 각종 과일이 그득히 쌓여 있고,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크게 바라는 것 없고 크게 부족한 것 없이 하루하루가 평온하게 흘러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지상낙원의 모습이지 않을까?
김박사 일행이 그곳에 머무른 지 셋째 날, 조함장과 최항해사는 중국 선양에 남겨진 승무원 두 명을 데려오겠다며 비행선을 타고 떠났다. 그리고 이박사는 틈나는 대로 전자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레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김박사는 혼자 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머무는 돔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돔이 모두 다섯 개가 있었는데, 네 곳에는 사람이 살았고 한 곳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인구가 총 오백 명쯤 될까, 일종의 부족 사회인 셈이었다. 그곳의 우두머리는 첫날 그들을 대접했던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남자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아마라'라고 불렀다.
그곳에 금기사항이 하나 있었다. 해가지면 절대로 마을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가급적이면 밤에 돔 밖으로 나가는 것도 삼가라고 하였다. 김박사 일행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방인으로서 행동에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래서 밝은 낮에만 마을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떠 있고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청명하고 온화한 날씨. 널찍하게 펼쳐진 푸른 들과 숲 그리고 경작지. 마을을 둘러싼 산 어디를 보아도 푸른색 일색이었다. 중국 선양 근처에 희망호가 내려앉은 곳부터 지금의 곳에 이르기 전까지 보았던 황폐한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날 밤도 잠자리에 누운 김박사 옆으로 레나가 찾아들었다. 레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녀가 마을로부터 추방된다는 말에 김박사는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들 일행과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김박사는 체념하고 레나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실 레나가 싫지도 않았다. 그녀가 김박사가 누운 옆으로 파고들며 살포시 안겨왔다. 그리고 김박사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옷 속으로 이끌었다. 그녀의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과 더불어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비록 키는 작았지만 가슴이며 엉덩이며 여느 성인 여성의 그것과 비교해서 처지지 않았다. 김박사의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솟았다. 그동안의 우주항해 중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김박사는 레나를 꼭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그냥 모든 것 다 잊고 여기에 주저앉아서 살까?'
조함장 일행이 엔지니어 두 명과 함께 돌아왔다. 별 다른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엔지니어 두 사람은 오면서 조함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작은 키로 진화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주해 온 것인지 모를 일이라고 하였다. 당초에 희망호에 탑승하였던 생물학자가 있었으면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는 웜홀을 지나면서 살아남지 못하였다. 어쨌든 희망호 생존자 일행은 다시 함께 모였고, 맛있는 음식과 과일주를 먹고 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모두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아 이렇게 다시 함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하였다.
다음날부터 2인 1개 조로 나뉘어 주변 정찰에 들어갔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건 우주항공청 지휘통제실을 찾는 일이 있다. 최소한 그곳에 가면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지역에 어떤 지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도와 많이 달랐다. 비행선을 타고 몇 차례 공중 정찰을 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연료가 떨어져 더 이상 비행선을 띄울 수도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소득 없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그들은 맥이 풀렸다. 그냥 이곳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삶을 마감해야 하나 싶기도 하였다.
15.
어느 날 밤, 김박사가 잠자리에 누워 이것저것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밖이 어수선하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일어나려는데 레나가 눈이 벌게져 들어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김박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밖을 가리키며 뭐라고 하면서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김박사는 일단 레나를 다독이며 진정시킨 후 밖으로 나가 보았다. 레나가 바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홀에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출입문이 열리고 횃불을 든 사람 몇몇이 들어왔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 중 서너 명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 사이에서 한참 동안 자초지종을 파악한 이박사가 희망호 승무원들에게 내용을 알려주었다.
마을 주민 두 명이 무엇인가에 잡혀갔다고 했다. 그것들이 마을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숨어있다가 창고에서 나오는 주민 남녀 한 명씩을 잡아갔다고 하였다. 함께 창고에 갔다가 뒤늦게 창고를 나오며 먼발치에서 목격한 사람이 그 사실을 알렸고,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쫒았을 때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마을 울타리 너머 멀리까지 그것들을 쫒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어떤 것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존재 같다고 하였다.
도대체 무엇일까? 평화롭기만 하던 지상낙원 같은 곳에 어떤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일까? 김박사 일행은 무척 궁금하였다. 혹시 그것들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자신들이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박사가 레나와 마을 우두머리인 아마라 그리고 몇몇 주민들과 대화를 시도하였다. 아마라가 주로 이야기를 하였고, 이박사와 자주 대화를 나눴던 레나가 중간중간 전자보드에 서툴게 그림을 그려가며 내용을 전달하였다. 그림으로 묻고 답하고 손짓 발짓을 해가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박사의 표정이 굳어지고 긴장감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박사가 파악한 사실이 정말 깜짝 놀랄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땅굴족이라는 지하세계에 사는 종족이었다. 그것들이 사람인지 아니면 짐승인지 정확하게 아는 마을 주민은 없었다. 오로지 먼발치에서 혹은 가까이서라도 언뜻 본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어두운 밤에만 활동을 한 데다 동작이 너무 민첩해 가까이서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에서 그것을 본 주민들은 모조리 잡혀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번 잡혀간 주민은 아직 한 명도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그것들은 마을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레나가 계곡밑으로 굴러 떨어진 것도 사실은 그것들 때문이었다. 마을에서 좀 먼 곳까지 나와 일행들과 조금 떨어져 나물 캐는 재미에 푹 빠진 레나가 그만 해가 지는 것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레나가 보이지 않자 먼저 마을로 돌아간 줄 알았다. 뒤늦게 날이 어두워지고 혼자인 것을 알아챈 그녀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포효가 들렸다. 바로 그것들이었다. 깜짝 놀란 레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금방이라도 그것들이 달려와 자신의 뒷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급하게 옮기다 발을 헛디뎠고 그만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자칫했으면 그녀가 그것들에 잡혀갔을 수도 있었고, 계곡에서 꼼짝 못 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행스럽게도 김박사 일행을 만났던 것이었다.
16.
2245년 8월 핵폭탄이 지구 곳곳에 떨어지면서 지구 종말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핵무기를 보유한 테러국들은 늘어나고, 기후변화로 자원 및 식량 부족은 심각해져 가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 지속됨에 따라 패권국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대피처 마련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어떤 나라는 땅속으로, 어떤 나라는 산속으로, 어떤 나라는 바다로, 어떤 나라는 우주로, 각자의 여건과 능력에 맞추어 준비를 해나갔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 피난처로 땅속을 택하였다. 전국적으로 단단한 암반지형이 있는 여러 곳이 선정되었고, 태백산도 그중의 한 곳이었다. 게다가 태백산은 한민족의 정기가 깃든 영산으로 단군을 모시는 천제단이 있어 하늘로부터 보호를 받는 성지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태백산 지하에 엄청난 크기의 지하세계가 건설되었다. 외부와 차단되더라도 백 년 이상을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에너지, 공기, 식수, 식량 등을 자급할 수 있는 각종 시설과 공장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그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 핵폭탄이 떨어질 때, 사람들이 그곳으로 대피했고 외부와의 출입구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인류의 문명은 긴 세월을 지나면서 앞세대가 일군 바탕 위에 뒷세대가 조금씩 쌓아 올리면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느 한순간 무너져 버렸다. 구축되었던 인프라와 네트워크가 망가지고 끊어지고 고립되고 말았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앞세대가 죽고 뒷세대는 그 지식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하였다. 고립된 곳에서 편협하고 단순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지식도 그다지 필요치 않게 되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인간은 더 단순해지고 퇴행하게 되었다. 태백산 지하에 구축된 지하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인지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환경에서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는 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외모도 점점 변하였다. 음습한 지하세계에 살면서 몸의 털도 길어지고 뻣뻣해졌다. 오랜 지하생활로 눈이 퇴화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코가 튀어나오고 후각이 발달하였다. 땅굴을 돌아다니기 편하게 팔다리가 굵고 짧아지고 손발톱이 단단해졌다. 땅속에서의 1700년이란 긴 시간은 인간을 그렇게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밤에 지상으로 올라왔다. 낮에는 빛 때문에 앞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 밖으로 나와 희미하게 보이는 달을 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코를 킁킁거리며 배회하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연하고 육즙이 풍부한 살코기였다. 통통하게 살찐 지상족 하나를 잡으면 여럿이 배를 불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맛을 못 잊고 밤에 지상족 마을을 찾는 날들이 잦아졌다.
(7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