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_대한민국 편 #18
40.
산과 들에 푸른 새싹이 돋고 예쁜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 왔다. 새 생명의 기운이 온 세상에 충만한 가운데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지상족 마을 사람들도 가슴을 활짝 펴고 밖으로 나섰다. 이제 슬슬 봄농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동안 후라이드 치킨이며 토끼 통바비큐며 맛있는 요리로 배를 불리면서 잔뜩 비축해 둔 힘을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사람들이 논밭을 돌아보며 올해는 어떤 작물을 심어 수확을 올릴까를 궁리하였다. 게다가 전과 다르게 마을에서 기르는 가축이 크게 늘어나 겨울에 녀석들에게 먹일 사료도 넉넉하게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러려면 농경지를 더 늘려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일. 후라이드 치킨과 토끼 통바비큐 요리를 생각하면 기꺼이 삽과 괭이를 들 수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지상족 사람들이 농사준비로 분주할 즈음 라일라에게는 아주 기쁜 일이 생겼다. 바로 그녀의 남편 조함장이 돌아온 것이었다. 라일라는 오랜만에 만난 그의 가슴에 폭 안겨 눈물을 흘렸고, 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제가 보고 싶지 않았나요?"
"무척 보고 싶었다오. 그래서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소!"
그녀가 눈물범벅이 된 채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빙긋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다시 한번 꼭 안았다.
조함장과 더불어 이박사와 엔지니어들도 함께 돌아왔다. 희망호 승무원들이 완전체로 다모이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모두 모여 회포를 풀었다. 레나와 라일라가 후라이드 치킨과 토끼 바비큐 요리를 정성껏 만들어 과일주와 함께 내어 왔다. 조함장 등 땅굴족 마을에 있다 온 사람들은 맛있다고 감탄을 하며 배불리 먹고 마셨다. 그 자리의 주된 화제는 땅굴족이 사는 지하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김박사는 조함장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 들었다. 그간 땅굴족과 지상족 사이를 오갔던 이박사나 엔지니어 승무원을 통하여 대강의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조함장에게 직접 듣는 이야기는 훨씬 생생하였다. 특히 자수정 선글라스는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였다. 조함장의 땅굴족 아내 화영을 비롯하여 짝귀 부부며 몇몇 원로들이 선글라스를 쓰고 대낮에 밖의 세상을 구경하며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감동이었다. 그들에게 빛을 선사했으니 얼마나 뿌듯한 일이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코팅 재료의 부족으로 충분한 수량의 선글라스를 제작하지 못하여, 여전히 거의 대다수의 땅굴족들이 낮에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함장의 이야기를 듣던 김박사가 뭔가 생각난 듯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우주항공청의 지하기지는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땅굴족이 오랜 세월 동안 지하세계를 넓혀왔다면 뭔가 단서가 될만한 걸 발견하였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지하기지가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말이죠."
"내가 아내 화영과 곳곳을 다녀 보았지만 그런 징후는 보지 못하였소. 다음에 모두 함께 가서 샅샅이 살펴봅시다."
우주항공청 지하기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거기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렸는지에 대한 기록이 있을 수도 있고, 지상족이나 땅굴족에게 유용한 정보와 자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땅굴족을 위한 선글라스 제조가 훨씬 쉬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희망호 승무원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우주항공청 지하기지에 대한 관심이 다시 되살아 났다.
그날밤, 조함장은 라일라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거의 넉 달만이었다. 둘이 결혼 후 한 달의 꿈같은 신혼생활을 보내고 조함장이 땅굴족 마을로 떠났으니, 그가 먼저 결혼식을 올린 라일라보다는 나중에 결혼식을 올린 화영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셈이었다. 조함장은 화영을 품을 때 라일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리고 이제 지상족 마을로 와서 라일라와 함께 있으니 화영 생각이 났다. 저쪽에 있으면 이쪽 생각, 이쪽에 있으면 저쪽 생각. 본의 아니게 두 명의 아내를 얻게 된 그는 마음이 갈팡질팡하였다. 하지만 그걸 밖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 함께 있는 아내에게 최선을 다할 수밖에. 한편 라일라는 그동안 조함장의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비록 마을의 평화를 위해 아버지 아마라의 명에 따른 결혼이었지만, 자신에게 남자를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주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그가 떠나고 혼자 남아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것도 갓 결혼한 남편이 자기를 버려두고 다른 여자와 또 다른 결혼을 위하여 떠났으니,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녀는 김박사와 결혼하여 내내 둘이 꼭 붙어 다니는 레나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랐다.
어두운 밤, 둘이 나란히 누운 침상에서 라일라는 조함장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동안의 그리웠던 그리고 서러웠던 마음을 몽땅 보상받고 싶었다. 그녀는 한껏 들뜨고 뜨거워진 몸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다. 한편 조함장은 그 나름대로 오랜만에 품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역시 그리움 반, 미안함 반으로 힘껏 그녀를 안았고, 그녀의 몸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한참의 격정적인 율동 끝에 둘이 거의 동시에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 기쁨의 표현인지 아니면 서운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인지 그녀가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땅굴족 여자가 어떻던가요? 맘에 들던가요? 당신에게 잘해주던가요?"
사실 라일라는 레나를 통해서 이박사의 땅굴족 여자들을 상대로 한 제모클리닉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초가 조함장의 땅굴족 신부였다는 것도. 털북숭이 여자가 김박사가 개발한 제모크림과 이박사의 제모클리닉의 도움으로 매끈한 피부를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예쁜 미녀로 거듭났고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당연히 조함장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라일라는 알고 싶었다. 누가 더 예쁜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라일라도 잘 알지 않소! 내가 원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나한테는 당신이 최고요."
조함장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였다. 뻔한 말이었지만 라일라는 그의 말이 기뻤다. 빈말이라도 그에게 자신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다.
"여보, 사랑해요!"
"라일라, 나도 사랑해요!"
라일라가 조함장의 가슴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벽에 걸려 일렁이던 횃불이 마지막 힘을 잃으며 꺼지고 캄캄한 어둠이 그들을 감쌌다.
41.
이한나 박사는 땅굴족 마을에서 제모클리닉을 하며 벌어들인 금 장신구를 지상족 마을에 들여왔다. 땅굴족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며 귀걸이며 반지 등을 만들었는데, 비록 세련된 기술은 아니었지만 다소 투박하면서도 가치가 느껴지는 물건들이었다. 여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예쁘게 꾸미고 치장하는데 관심이 많은지라 이박사가 가져온 금붙이에 지상족 여자들 모두가 좋아하였다. 서로 예쁘고 마음에 드는 것을 차지하려고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여자들은 그 대가로 닭이나 토끼 등 기르고 있는 가축은 물론 각종 곡물과 산에서 채취한 약초를 놓고 갔다. 이박사는 그렇게 수집한 것들을 땅굴족 마을로 실어 날랐다. 결과적으로 지상족과 땅굴족은 음식뿐만 아니라 식량 그리고 장신구까지 많은 분야에서 문화를 서로 공유함으로써 유대감이 점점 높아져 갔다. 한편 제모크림을 만들어 이박사에게 건넨 김박사에게도 일정 부분 지분이 있어 금 장신구로 대신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레나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녀는 날마다 이것저것 바꿔가면서 치장을 하며 행복해하였다.
지상족과 땅굴족이 교류하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면서 양쪽 다 사정이 나아졌다. 사람들 모두 열심히 일했고, 일과 후에는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웃고 즐거워하였다.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사람들 모두 앞으로 그런 날만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들이 모르는 먼 곳으로부터 시작된 태풍이 곧 닥치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전조로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느 날 밭에서 일하던 지상족 젊은이들이 이방인 남자 세 명을 마을로 데리고 왔다. 그들은 무척 지친 모습이었으며 행색도 말이 아니었다. 거의 탈진 상태로 보였다. 족장 아마라는 우선 그들에게 마실 물을 주고 부드러운 죽을 먹였다. 잠시 쉬면서 기력을 차린 그들은 지상족 사람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이 땅에 외적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지막지한 놈들이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상상도 안된다고 하였다. 닥치는 대로 마을을 휩쓸어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우고 초토화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 부족이 그놈들을 피해 이곳으로 피난 와도 되겠느냐고 하였다. 그 의사를 타진하기 위하여 천리길을 달려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미 자기네 마을이 놈들에 의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침통해하였다.
희망호 승무원들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지상족과 교류가 있었던 부족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강변족으로 불렸는데 지상족과 외모도 비슷하였고 언어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아주 오랜 옛날 외지에서 이 땅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가 강가에 자리를 잡았고 일부가 이곳 태백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 사이에 교류가 쭉 이어졌는데, 주로 강변족이 지상족 마을을 찾았다. 강변족은 강에서 고기도 잡고 수로를 따라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교역도 하였다. 그들은 지상족 마을에 들러 물고기도 주고, 해안가 마을에서 구한 소금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상족이 산에서 캔 약초를 가지고 갔다. 그들은 그렇게 지상족과 왕래를 하며 친하게 지내온 형제와 같은 부족인 셈이었다.
얼마 전 강변족 사람들이 해안족이 사는 해안가 마을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이 본 것은 처참하게 망가져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집들이 모두 불에 타 시커멓게 그을린 채 무너져 내린 집터와 도처에 널린 시체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중에 겨우 목숨이 붙은 채 부상당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소수의 멀쩡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적이 침공했을 때 마침 마을 밖에 일 보러 나가서 화를 면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적들이 마을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모든 걸 약탈해 갔다고 하였다. 해안족 마을의 참상을 본 그들은 마을로 돌아와 사실을 알렸고, 강변족 족장은 다시 이곳저곳으로 사람을 보내 정찰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많은 해안족 마을이 놈들에게 당했고, 머지않아 놈들의 발길이 강변족 마을에까지 이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대책회의가 열렸고, 힘이 약한 강변족은 놈들을 대적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피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지상족 마을에 그들이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지상족 마을에 비상이 걸렸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도대체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자들이기에 모두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이렇게 그들을 피해 정든 마을을 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그놈들이 지상족 마을까지 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마땅히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었다. 아마라를 포함만 지상족 원로들 그리고 희망호 승무원들이 모두 모여 의논을 하였다. 지상족 입장으로서는 뿌리가 같은 강변족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침공해 오는 적을 맞아 싸우려면 당연히 서로 뭉쳐서 힘을 보태야 했다. 결국 강변족을 받아주고 그들과 힘을 합쳐 함께 외적을 막아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강변족이 자신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지상족 젊은이 몇몇이 합류하였다. 저간의 사정과 적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풍파가 몰아닥칠지 걱정하며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굳은 채 서 있었다.
(1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