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카페 점원의 일상이야기
포근함을 넘어 초여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따뜻한 봄날 일요일 아침. 가게 문 앞 화분에 활짝 핀 꽃이 출근하는 점원을 반겨줍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마치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네요.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밝아집니다. 콧노래 부르며 청소하고 커피머신 세팅하고 부지런히 장사 준비를 합니다. 그날 날이 좋아서일까요? 손님들이 많이 찾아주시네요. 덕분에 혼자서 동분서주.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세시쯤 되었을까요? 가게 위치를 묻는 전화가 걸려옵니다. 가게가 주택가 골목에 위치하다 보니 찾기 힘들어하는 손님이 가끔 계십니다. 한 이십 분쯤 지나서 연세가 좀 있으신 남성분과 수녀님이 가게로 들어오시네요. 그분은 바로 이해인수녀님이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수녀님을 몰라 뵈었죠. 저희 가게에 이해인수녀님께서 찾아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수녀님께서 본인이 쓴 것이라며 건네주시는 책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그리고 얼떨떨하였습니다. 어떻게 저희 가게에...
알고 보니 수녀님이 바로 동네 주민이셨습니다. 한 번씩 동네 책방에 마실을 다니신다고 하십니다. 어쩌다 저희 가게 이야기를 들으셨고, 한번 가볼까 하시고 걸음을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디테일한 부분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가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시고 분위기가 좋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문구류도 이것저것 구매를 하시네요. 이쯤에서 서가에 수녀님 시집이나 수필집이 꽂혀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야기가 한결 부드럽게 흘러갈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희 가게에 수녀님이 쓰신 책은 없었습니다. 뭔가 뻘쭘해지는 분위기.
"저는 이 가게 점원에 불과하고요, 북큐레이션은 가게 사장인 제 딸이 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고 핑계를 댔습니다. 가게에 없는 사장님에게 책임을 떠넘긴 거죠. 뭐 사실이기도 하고요. 사장님이 시와 수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저희 가게에 시집은 아예 없고, 수필도 아주 제한적으로 구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수녀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십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저를 잘 몰라요."
수녀님을 모시고 오신 남성분은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이었습니다. 원래 독실한 불교신자인데 수녀님의 강연을 듣고 너무 감동을 받아 그 후로 종종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불자라고 합니다. 그분이 그러십니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몰라요. 제가 수녀님을 모시고 다닐 줄을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오늘도 이 가게를 삼십 분 넘게 찾다가 못 찾고 돌아갈 뻔했네요. 그래도 이렇게 모시고 와서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도 다 인연인 거죠."
감사했습니다. 가게 홍보도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녀님과 함께 하는 사진도 찍어 주시네요. 날이 더우니 수녀님께서도 시원한 음료를 드시나 봅니다. 아아를 주문하시네요. 수녀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뭔가에 펜으로 적고 계십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저에게 건네주십니다. 살펴보니 하나하나 직접 사인을 한 꽃 책갈피입니다.
수녀님이 시나 수필에 쓰셨던 글 중 좋은 구절을 뽑아서 책갈피로 만든 것 같습니다. 정말 예쁘네요. 다 좋은 글귀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걸 뽑아보았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는 동안
나도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네
아! 어떻게 이런 구절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푸근해지고 뭔가 새로워지는 기분입니다. 글귀처럼 하루하루가 날마다 새롭게 피었다가 지는 나날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4월 초 정기건강검진 때 위내시경을 했는데, 식도염과 위염 진단을 받았습니다. 평소 공복에 속이 쓰렸습니다. 오랫동안 맵고 짠 음식을 즐겨 온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위장약을 40일분이나 처방해 주시더군요. 완전 한 보따리입니다. 약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습니다. 요즘 쓰린 속을 부여잡고 살다 보니, 수녀님께서 주신 '작은 위로 작은 기도' 책자에 나오는 '싱겁게 더 싱겁게'라는 시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짜지 않게 맵지 않게 먹다 보니 글도 말도 싱겁게 하고 용서도 싱겁게 하네. 사람을 대하는 일도 짜지 않게 맵지 않게 넘치지 않게. 그래야 오래가네.
젊었을 때는 사랑도 매운 사랑, 찐한 사랑을 원하죠. 그러다 보니 더 맵고 더 찐한 사랑을 갈구하게 됩니다. 사랑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찐한 맛, 매운맛이 사랑을 망쳐버리고 맙니다. 나이 들어보니 알게 됩니다. 싱거운 사랑, 넘치지 않는 사랑이 질리지 않고 오래간다는 것을.
나이 들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끔 생각해 봅니다. 젊었을 때는 열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공격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잃는 것도 많았습니다. 건강을 잃기도 하고, 사람을 잃기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잃기도 하고요.
수녀님이 주신 '인생의 열 가지 생각' 수필집에는 가난, 공생, 기쁨, 위로, 감사, 사랑, 용서, 희망, 추억, 죽음의 열 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서문에 이런 글이 있네요.
반드시 하루에 한두 번은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내 삶에 대해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내 삶에서 죽음을 잘 기다리고 이용하길 바랍니다.
이제 나이 들면서의 삶은 하나씩 정리하며 비워가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재물을 비우고. 어차피 죽고 나면 아무것도 짊어지고 갈 수 없는데 말입니다.
수녀님은 저희 가게에 한 시간여 계시다가 가셨습니다. 딸과 함께 이곳에 책방을 열게 된 사연도 말씀드리고, 저나 딸도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덧붙여 단순히 책 팔고 커피 파는데 그치지 않고, 독서모임, 글쓰기모임 등 소모임 활동도 하면서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조금이라도 평온한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응원한다고 하시더군요.
일요일. 정말 뜻밖의 귀한 손님을 맞은 날이었습니다. 저희 가게가 있는 동네에 수녀님이 주민으로 계시고, 저희 가게를 찾아주실 줄이야. 아무쪼록 앞으로도 수녀님께서 좋은 시와 글 많이 써주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