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다이어리
민식은 이 일을 하기 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는 예체능을 하는 아들과 딸을 마음껏 지원해주고 싶어 회사를 관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조금씩 사업이 자리를 잡을 때쯤 친한 지인에게 사기를 당했다. 결국 그는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한 순간 눈앞에 있던 모든 현실이 그에게서 처참히 무너졌다. 절망에 휩싸인 그는 하루하루를 허망하게 술로 버티며 삶을 견뎌냈다. 어느 날 그는 지인에게서 고독사와 죽음 현장을 정리해주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민식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우진과 현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기 힘들었던 그들은 결국 민식과 함께 회사를 차리게 된다. 그러나 가족부터 지인, 친척까지... 굳이 그 험한 일을 왜 하려 하냐며 한사코 그를 말렸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진 않았다. 남들이 기피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삶의 벼랑 끝까지 가본 그로서는 왠지 그들을 돕고 싶었다. 민식은 다짐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뇌와 고통의 시간을 겪으며,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마지막을 예의와 존경을 담아 진심으로 돕겠다고...
민식은 그들도 한때 우리와 같은 생의 시간에서 혼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이웃이라 생각했다.
이제 그는 몇 년간 이 일을 하면서, 나름 자부심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는 사무실에서 청소 도구를 소독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서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한 중년 아주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아들이 떠난 자리를 청소해 달라고 했다.
민식과 우진, 현우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의뢰인의 아들인 김철호 군이 살던 곳은 노량진의 한 주택 지하에 있는 단칸방이었다. 지하 계단으로 들어선 순간 쾌쾌한 냄새와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방안은 단출했다. 책상과 의자, 작은 냉장고, 싱크대, 옷 몇 개가 걸려 있는 행거가 전부였다.
민식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책상이 있는 벽에 붙어진 메모였다.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힘내자! 나 자신을 위해... 어머니를 위해'
무언가의 굳은 결연이 담긴듯한 글씨였다. 한눈에 책상에 있는 여러 책들을 보고선 한 때 공부를 했던 수험생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은 의외로 깨끗했다. 혈흔도 없는 듯했다. 순간 민식은 눈을 돌려 문 손잡이를 보았다. 굵은 밧줄이 보였다. 이내 그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차마 그곳을 계속 응시할 수 없었다.
그는 얼른 밧줄을 비닐봉지에 담았다. 이후 현관에 있던 신발, 바닥에 있던 이불, 행거에 있던 옷 몇 가지를 정리한 후 유품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책상에는 여러 권의 공무원 책들과 시험날짜, 장소, 결과 발표일이 있는 프린트물이 있었다. 발표일은 일주일 전이었다. 사망일이 며칠 전이라 했으니, 아마 시험 발표가 있은 후 그는 세상을 등진 듯했다.
그의 눈에 검은색 다이어리가 보였다. 펼쳐보니 날짜별로 그날 공부한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중간쯤엔 버킷리스트가 보였다. 그 버킷리스트를 보자 민식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대체 이게 뭐라고... 이런 것도 못해보고..."
그렇게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씁쓸할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보다가 맨 마지막 장에 유서로 보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민식은 유서를 유족에게 직접 전달드려야 할 것 같아 다이어리를 한 곳에 따로 두고선, 그 외 보관이 필요한 유품들은 박스에 하나둘씩 넣기 시작했다. 책상에 있는 물건들의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을 때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얼굴이 검게 그을리신... 몸빼 바지와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으신 한 중년 아주머니분이 들어오셨다.
그 아주머니는 현관 앞에서 맥없이 덜컥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