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7일 화요일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만 하다가 이제야 글을 쓴다.
글이라는 것을 쓰기까지 항상 머뭇거리고,
끄적이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는 터에,
좀처럼 미뤄두고 쓰지 못했던, 말하지 못했던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을 오늘부터 하나씩 꺼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영화 <여름, 기록>의 시작이 될 글이다.
2020년 어느 여름, 나는 어느 여성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사실, 그녀의 편지를 '찾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편지를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녀의 편지를 읽고 내 삶이 아주 많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지 않았어야 할 그 편지를,
끝까지 모른 척하고 말았어야 할 그 편지를,
난 받았고, 보았고, 그녀가 서있었던 폭풍의 한 자락에 함께 발 딛게 되었다.
2004년 10월,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그녀는 그 편지를 써 내려가며, 그것이 나에게 다가올 것이라 예상했을까.
두 아이와 자신의 언니에게 남긴 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갈 곳 없고 희망도 사라져 버린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더 이상 나와 같은 인생의 비관자가 생기지 않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내가 그녀의 편지를 받았던 2020년 여름에도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분통함과 억울함과 설움이, 그래서 나를 찾아왔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분통함과 억울함과 설움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무엇이 우선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녀의 편지를 읽고, 그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의 어느 여름날.
집에 돌아갈 차비가 없어서, 기억을 더듬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낯선 거리만 계속되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몸 위로 매미울음소리가 쏟아져내렸다.
그 소리에 덩달아 눈물이 왈칵 터질 뻔했지만, 스스로를 달랬다.
'집이 나올 것이다.'
지긋지긋했던 집이 그리워졌다.
집에 앉아있으면 들리던 미군의 헬기소리도 그리워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조금씩 낯익은 풍경들이 펼쳐졌고, 머리 위로 미군의 헬기가 지나쳐갔다.
귓가를 때리던 매미소리가 사라지고, 헬리콥터의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집을 다시 찾아 돌아왔을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이기에,
나는 다시 돌고 돌아서,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없는 나의 집을 가려는 것일까.
2004년 10월, 그녀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던 장소가 '춘천 소양로'인 것.
여름날, 눈물을 꾸역꾸역 참으며 걸었던 장소가 '춘천 소양로'인 것.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우연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상하고도 기이하고도 슬픈 우연에서 시작된 이야기일까.
이제 나는 그 여름날, 불안한 마음과 확신의 마음을 반씩 안고 그 길을 걸었던 것처럼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이 이야기에 끝에서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운 나를 발견할 것이고,
또 한 편으로는 세대를 이어온 오래된 기억의 끝자락을 발견한 것이다.
여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