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잘 생각나는 맛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맛들 중에서도 '옛맛'이라고 표현하는 부류인데 대표적으로는 동네 경양식집이나 중저가 뷔페에서 주로 맛볼 수 있는 양송이 혹은 크림수프의 맛. 아무리 넘어져도 언제든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 어느 회사에서 나오는 3분 요리에다가 생크림과 우유, 그리고 조미료를 조금 더 가미해서 고급스럽게 만든, 하지만 오직 동네 경양식집이나 중저가 뷔페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그런 수프의 맛, 곧잘 그 맛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아마도 어릴 적 동네 경양식집을 다니며 많이 먹었기 때문이려나.
그리고 또 내가 곧잘 생각하는 맛이 있다면 갓 튀겨 나온 동네 중국집의 탕수육 맛. 몇 년 전부터인가 붉은색의 케첩과 고춧가루를 이용한 탕수육 소스가 사라지고 식초, 간장, 설탕을 넣은 맑고 검은 빛깔의 탕수육 소스가 대세로 자리 잡고 지금은 중국 북동 지방식의 고기튀김인 과포육(궈빠오로우)와 인절미 탕수육이 유행하더니, 대세 중식 트렌드에 밀려 옛날 옛적의 케첩 혹은 맑은 색의 탕수육은 동네 중국집에서도 볼 수 없어져버린 지 오래다. 없어지고 나서야 그 자리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딱 그 모양새이다.
하지만 강릉에는 아주 감사하게도 옛날 옛적 스타일의 중식을 고집하고 있는 작은 중국집이 서부시장에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추억이 기억하고 있는 그 맛을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 서부시장 근처의 작은성을 곧잘 찾아간다. 화려하거나, 엄청나게 맛이 좋거나, 고급지거나, 깔끔하거나 등등의 장점은 찾아볼 수 없는, 작고 허름해 보이고 변변찮은 인테리어나 미적인 감각도 없는 곳이지만 짜장면, 짬뽕, 탕수육, 군만두 등의 기본적인 식사메뉴와 저렴한 가격만이 장식하고 있는 붉은 메뉴판이 이 집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사실, 처음부터 이곳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삭한 고기튀김이 먹고 싶어 져서 (인절미 소스를 뿌린 고기튀김은 내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 집 근처에 있는 대만식 우육면 집에 가려고 했으나 얼마 전부터 줄 서서 기다렸다가 먹을 수밖에 없는 맛집이 되어버렸기에, 나의 식탐을 채우려면 어쩔 수 없이 추운 겨울날 밖에서 혼자 기다려야 했기에 나는 미련 없이 얼어붙은 눈길을 건너고 건너 서부시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아직도 눈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꽁꽁 얼어붙은 골목길을 지나 서부시장 입구로 나온 나, 작은 성의 실내에 애처롭게 매달린 형광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벽을 둘러쳐 만든 낡고 좁은 원목 바 테이블에서 어르신 두 분이 근처에 볼일을 보러 나왔다가 점심을 먹으러 들리셨는지 옹기종기 히터 근처에 모여 앉아 짜장면을 한 그릇씩 순식간에 '조지고' 계셨다.
"사장님, 잘 먹고 가요"
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말에 이어받아 나는
"선생님, 짜장면 탕수육 1인 세트요!" 외치고는
어르신들이 앉아계셨던 뜨끈한 의자를 이어받는다.
한쪽에는 동아일보의 스포츠면이 사장님의 오늘 아침 친구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이고이 접혀있다. 사장님은 건성스럽게 '예~'하고 들어가시더니 10분도 안되어서 탕수육 0.5인분이 짜잔 하고 나온다. 밀가루와 전분을 슥슥 섞어 만든 튀김옷에 거뭇거뭇하게 익어서 나온 뒷다리, 요즘 자주 볼 수 있는 찹쌀 옷에 등심을 튀긴 하얀 고오급 탕수육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옛 탕수육의 맛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소스와 만나면 금방 눅눅해질 수는 있어도 그것도 그것 나름 부드러운 옛 탕수육의 매력이라고 주장하겠다, 부드럽지는 않지만 약간 질기고 거칠고 뻑뻑할 수도 있는 돼지 뒷다리이지만 나는 오히려 입안에서 쫄깃하고 고기의 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이 뒷다리 고기와 부들거리는 튀김옷이 어우러진 이 맛을 좋아하는 것이다.
소스는 또 어떠한가, 최근에 좋은 사과가 많이 들어오셨다고 하시니 사과와 배추 등의 단맛이 강하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재료들로 달달하게 만들어낸 하얀 소스. 숟가락으로 떠먹으니 부드럽게 우유처럼 목 넘어가는 그 느낌이 계속 먹게 된다. 케첩과 고춧가루로 감칠맛을 즐기며 먹던 그 옛 탕수육과는 또 다른 매력.
그러고 있다 보니 방금 전 짜장면을 해치우고 나가신 어르신들과 동년배로 보이시는 여성 어르신들이 털옷을 잔뜩 껴입고 들어오시고, 그에 이어서 작업복을 입으신 흰머리가 성성하신 남자 어르신도 들어오신다. 순식간에 나는 과거를 이기고 현재를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둘러싸여 옛맛이 가득한 중국집을 즐기고 있었다.
근처의 서부시장이나 고용센터를 오신 것일까, 어르신들이라고 해서 뭔가 고리타분한 얘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 친구들, 좋아하는 연예인, 음식, 취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자식들 얘기) 등등... 젊고 어린 사람들이 음식점에서 나누는 그런 대화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이 짜장면을 한 그릇씩 시켜 먹는 모습, 그것은 마치 이 작고 허름한 중국집이 그들과 나를 과거로 돌려놓는 분위기를 가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볶은 머리가 아니고 곱게 빗은 단발머리 혹은 깻잎머리를 했었을 것이고, 모피나 털이 박힌 까만 겉옷이 아닌 흰 교복 상의와 검거나 감색의 무릎 치마를 입고, 핸드백이 아닌 갈색이나 검은 책가방을 손에 들고는 삼삼오오 서로 손을 잡고 학교 앞 분식집이나 빵집에 갔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주 특별한 날은 그 모습으로 중국집에 갔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국집에서 옆에 앉아 작업복을 입고 식사를 하시는 어르신과 주방에서 요리를 하시는 사장님은 주름살과 머릿결 사이에 하얀 밀가루와 전분, 혹은 공사장의 진분이 내려앉은 그런 하얀 모습이 아니라, 기름을 발라 멋지게 빗은 검은 머리로 식사 후에는 가게 앞에서 솔이나 88 같은 담배를 맛있게 꼬나물고 있었겠지, 그러면서 앞으로 돈 벌 얘기, 연예인 얘기, 요즘 만나는 이성 얘기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청춘이라는 것이 꼭 10~30대의 어리고 젊은 나이의 청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푸르른 봄은 항상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불러오느냐, 어떻게 지키느냐가 문제인 것이겠지. 작고 허름한 옛 맛을 지키는 중국집은 그들을 잠시 그 맛을 느끼고 즐거워하던 그 청춘으로 그 공간을 돌려놓는 것이겠지. 아무리 유행이 지나고 돌아도, 당시 그 청춘이 즐기던 그 맛은 잊히지 않고 시간 속 어느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30대를 바라보는 2명의 20대와 방과 후에 어떤 일을 할지 지저귀는 여러 명의 10대 소녀들과 함께 옛 맛 가득한 짜장면과 탕수육을 즐겼다. 그분들은 나의 생각과 글에 대해서 '뭔 소리여, 그냥 짜장면이 싸니까 오는 거지 ㅋㅋ 웃기는 소리 말고 짜장면이나 처먹어 ㅋㅋ'하고는 비웃으실지도, 하지만 나는 나만의 작은 상상에 잠겨 점심식사를 즐겼다. 음식은 입으로 먹는 것이 전부가 아니니까, 이것은 나만의 즐거움이고 자유인 것이다.
그 와중에 옆집 가게 주인분이 오셔서 '우리꺼 짜장면 3개 좀 부탁해요'하고 주문을 하고 가셨고 10대 소녀분들도 한분, 한분씩 식사를 마치고 나가시며 나는 나의 추억 담긴 점심시간을 마무리해야 함을 알았다.
"사장님, 탕수육 소스가 언제 먹어도 기가 막힌데요"
사장님은 혼자 밥 먹으러 온 손님의 미소 곁들인 칭찬에 잠시 당황하시더니 덤덤히 말을 받으신다.
"그렇죠? 요즘 사람들은 케첩 넣는 소스를 싫어해서 하얗게 바꿨어요. 배추랑 뭐랑 넣고 맑게..."
"아, 아쉽네요. 저는 케첩 소스 좋아했는데?"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올리시며,
"그래요?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오이를 안 먹는 사람도 많아서 다 빼버렸지.."
오이를 싫어하는 나 같은 인간들이 많은가 보다, 나는 속으로 '올레'를 외치며 계산을 했다.
그리고 감탄도 했다, 이 정도 오랜 시간 동안 밥집을 해오셨음에도 불구 여전히 손님들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의견을 귀담아서 들으시고 관찰하시는구나, 존경스러운 태도였다. 이전에 와서 대화했을 때는 손님에게 요리를 해서 내어드릴 때 본인이 드실 밥도 함께 해서 점심을 드신다고 했었는데, 본인이 먹을만한 정도의 밥만을 파시는 그 기본원칙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 그것도 인상 깊었다.
사람도, 가게도, 음식도 유행이나 세월에 뒤쳐져 낡아가거나 늙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오직 이익과 편리만을 좇아 놓쳐버리는 것들도 우리에게는 들려오기 마련이다, 반찬을 재사용한다거나 조리하거나 작업한 지 오래된 재료 혹은 음식을 손님에게 내어준다는 것들... 물질주의의 부정적인 이면을 보는 것은 달갑지 않다. 한국에서 중식으로 유명한 이연복 셰프는 밥을 맛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재료로 요리를 하면 된다는 간단하고 기본적인, 그리고 어려운 원칙을 지금도 지킨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어느 요리 프로그램에서 7번의 장사를 위해 13번의 장을 보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시간과 유행에 의해 변화가 온다고 하더라도, '옛것'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우리가 즐거워하는 추억과 맛, 그리고 그것을 위한 여러 기본원칙은 낡아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전통을 위한 양심과 원칙이 지켜져야 옛맛도 있고, 최신의 맛도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들의 음식에 대한 추억도, 맛도, 즐거움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상 얘기한다, 음식은 추억이고, 사람은 추억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맛의 추억은, 옛적부터 우리가 사랑하는 그 맛은, 맛과 음식에 대한 사람의 도리가 지켜질 때에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른다 해도, 우리 모든 청춘들의 추억과 맛은 언제나 그 시간 속 그대로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