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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회사인가, 학교인가?

by 감성기복이

여기는 회사인가? 학교인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 가끔은 어른들이 더 유치할 때가 많다. 고등학생쯤만 돼도 하지 않을 유치한 짓을 한다던가.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배웠을 법한 것들을 모른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몰라서 잘못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것일 거다.






일진놀이

'일진'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이런 풀이가 나온다.

일진()[1]은 본래 군사들의 한 무리를 뜻하는 단어이나 1980년대 이후부터는 사회적·신체적인 위력을 과시하는 비행 청소년들을 칭하는 말로 주로 쓰인다.

학교 다닐 때 꽤나 들어봤던 단어다. 어느 학교든 다 그런 무리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랑 직접적 연관은 없어도 그런 애들을 보면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는 행동이라던가, 말투라던가 영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학교 밖에 나왔을 때 그런 것들이 좋았다. 그런 유치한 짓을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진 놀이를 직장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을 어른들이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이가 없이 느껴졌던 일은 신입이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꽤 높은 사람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연차 차이도 많이 나는데 창피하지도 않을까'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 같았다. 자신의 영웅 일대기쯤은 있는 사람 같았으니까 말이다. 소문으로 듣자면 그는 직장 생활 내내 일진 놀이를 일삼으며 살았다고 한다. 누군가의 과거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사람의 학창 시절도 언뜻 알 것 같았다.



어른의 세계

인간에게 제일 두려운 감정 중 하나는 '소외감'이다.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만큼 무서운 것도 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제일 하면 안 될 짓이 '왕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런다. "쟤도 왕따 당할만하니까 당하는 거야"라고. 세상에 왕따 당할만한 사람은 없다. 그 어떤 짓을 했어도 약자를 만들고 소외시킨다는 것은 아직 나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 '은따'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더 나쁘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 직장에서는 드러내놓고 따돌리는 왕따보다, 비폭력적은 은따가 더 많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이 자기 발로 퇴사를 하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그런 일을 당해도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왜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 왜냐면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생존 본능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괜히 대들었다고 더욱더 큰 곤욕을 지속적으로 오래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신고할 만한 거리가 없다. 걸고넘어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투나, 심적 증거만으로 누군의 편에 서 줄 만큼 조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나 자신만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주기 정도나 될까. 그리고 결코 그 지대에서 나도 안전한 사람이 아니다. 이런저런 꼴을 다 보다 보면 나도 언제든 저렇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다.



도망가자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라는 노래를 참 좋아한다. 힘들 때 들으면 참 위로가 되는 곡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그러한 위로곡들을 들으며 참으로도 잘 버텼다. 버스에서 그 노래들을 들으며 울었던 날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그건 요즘도 가끔 그렇다.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어디에 있든, 누가와 있든 똑같이 흘러가는 내 인생을 결코 불행한 환경에서 보내지 말라고 말이다. 이쯤에서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 말도 생각난다. 하지만 그건 내가 스스로 극복 가능한 지옥에서나 쓰는 말이 아닐까. 타인에 의해 정신적으로 모든 게 무너지고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최근에 <미지의 서울>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거기서 세상에 숨은 미지에게 미지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준다.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양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그렇다. 숨는 것도 사는 것이고, 숨는 것도 용감한 것이다. 무조건 맞서 싸워 이기는 일만이 훌륭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머리를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도망갈 때와 싸워야 할 때를 현명하게 판단해 에너지 낭비를 덜 하고, 더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일 것이다. 나 역시 이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위로도 되었고 용기도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용기가 없다. 어쩌면 적당히 버틸만해서일수도 있고 아니면 학습된 무기력일 수도 있다. 나도 도망가지 못하고 있으면서 누군가에게 도망가라고 하는 것이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헤어질 결심

회사와도 헤어질 결심이 필요하다. 그 결심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세상의 찬 바람을 맞아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요즘 헤어질 결심을 재촉하고 있다. 몸은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때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퇴직 절차도 피곤하고 그냥 소라게처럼, 그리고 영화 < 헤어질 결심 >의 서래처럼 숨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있다. 회사생활 할 때는 평생 다닐 것처럼 한다. 그 끝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끝나도 아무렇지 않은데 말이다. 조금만 아파도 규칙적인 출퇴근하는 직장인 생활은 이어가기 힘들다. 내가 아니라 가족이 아파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회사를 다닐 때 그래도 그나마 에너지가 있을 때 회사와 헤어질 준비를 천천히 해놔야 한다. 그래서 헤어질 결심은 어쩌면 입사와 동시에 시작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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