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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되지 않은 인생

by 감성기복이

"에지 있게"

한때 꽤 많이 들렸던 말이다. 에지 있게 살자. 그런데 에지 있게 사는 삶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나는 말한다. 내 인생의 난이도는 최고난도 킬러문항이라고.


어떤 사유로 먹다 남은 샌드위치와 케이스가 깨진 티라미수 케이크를 들고 오다가 가방이 못 쓰게 되었다. 집에 와서 보니 가방 속 노트와 물품들이 모두 젖어있었다. 무엇인가 봤더니 티라미수의 커피 국물이 다 가방에 흐른 것이다. 빨 수도 없는 가방이었다. 차가 없어서 큰 가방에 바리바리 다 넣어가지고 낑낑 거리며 다닌다. 그래서 그 큰 가방도 공간이 모자라다. 비록 3만 원도 안 되는 가방이지만 이렇게 못쓰게 된 것에 너무 아깝고 속상했다. 말려 써야지. 그런데 이 꼴을 보고 있자니 그렇게 초라해 보였다.






세련되지 않은 인생

20살 이후 끼니를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고 3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급식을 먹지 않았다.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았다. 종종 급식비를 밀려 통지문을 받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젠 그런 일을 안 겪어도 되었기에 기뻤다. 성인이 된 후로는 항상 시간이 없었고, 돈이 없어서 끼니를 못 챙겼다.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구석에 숨어 잠깐씩 음료를 마시거나 빵을 쪼개먹는 정도였다. 학식은 너무 비싸 보였다. 집에서는 그런 나한테 매일 식량을 쥐어줬다. 도토리빵 3개. 하루치 식량이었다. 앉아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차에서 먹을거리를 찾다 보니 맨날 과자 아니면 초콜릿이었다. 덕분에 몸도 많이 나빠졌다. 어릴 때는 잠깐의 고생일 줄 알았다. 이렇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일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 사람의 속사정을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잘 풀리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들이 많다. 그런 걸 보면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인생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줄곧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 사람 인생이 이러기도 쉽지 않다고 느껴진다. 물론 이건 부정적인 나의 관점일 수도 있다. 희망이 점점 절망이 될수록 정신은 피폐해진다. 그래도 지금은 집에서 나와 정신적으로 많이 나아졌지만 거의 10년 이상을 우울에 찌들어 살아왔다. 난 왜 안되는 걸까 라는 고민도 많이 했다. 이제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해결이 되어서가 아니라 체념이다. 이젠 그런 고민을 할 정신적 에너지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울함은 내 탓이 아닙니다

우울함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나약해서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집을 나와보니 알았다. 우울함은 환경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고 어떤 사람들과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울함의 원인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또한 내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면 나만 고치면 될 일인데 주변 환경이 문제가 되면 답이 없다. 내가 타인을 바꿀 수도 없고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조차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울해지는 것이다. 내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무기력함과 그 안에서 그저 버텨내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우울함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이렇게 우울함과 무기력은 항상 짝꿍이 된다.


나는 자주 말했다. 내 인생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그저 살아있으니 벌어야 하고 나는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하는 것 같다고. 누가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고, 누군가 나를 자꾸 끌어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이다.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건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건 다시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없었던 것보다 그걸 볼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망가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정법 인생

어느 순간부터 성공이라는 목표는 잊은 지 오래다. 왜 안되냐고 나를 다그칠수록 점점 더 불행의 굴레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상과 맞서 싸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할 힘도 없거니와 의미도 없다. 하지만 우울이 더 심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분명 정신은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우울할 때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했다. 항상 먼 미래를 보며 현재를 살았다. 그래서 지금의 행복이 없었다. 항상 '-하면 행복할 텐데' 라는 가정만 가지고 살았다. 지금의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기에 지금의 나는 소중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의 내가 가장 어렸고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을 사세요

오히려 조금 나아진 후 한 치 앞을 보기 시작했다. 원대한 꿈을 보고 매일 그것에 집착해 살았다면 지금은 그냥 당장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해 산다. 누군가 그랬다. 삶이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는 당장 맛있는 커피 맛에 집중해 보라고. 너무 멀리 보지 말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생각을 돌리라고 한다. 답답하고 불행한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한다고 한들 행복한 모습이 그려질 리 없다. 그저 신기루 같은 영상일 뿐이다. 어느 순간 짠- 한고 행복이 오지는 않는다. 행복한 감정도 하루하루 쌓여가는 것이고 습관이다. 오늘이 기쁜 사람이 내일 기쁠 확률도 높다. 물론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불행 역시 대비할 수 없다. 오히려 갑자기 찾아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다. 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다. 조금이라도 좋은 때에는 다가올 불행이 두려워 그 좋음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더 불안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좋은 날이 많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수많은 날들로 쌓아놓은 행복은 불행이 왔을 때 방파제 역할을 한다. 불행이 올까 두려워 현재를 낭비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한 치 앞만 보며 현재를 아름답게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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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