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2월생이다. 그래서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2008년 초/중등교육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1~2월생들은 대부분 7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연령이 만 6세이기 때문에 3월에 입학하는 교육 제도상 1~2월생들은 만 6세가 넘어갔기에 당연히 그래야 했고, '빨리빨리'의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는일곱 살에 입학하는 걸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유치원 졸업식에서 친구 엄마와 우리 엄마의 대화가.
"OO는 이번에 학교 가나요?"
"네, 2월생이라 이번에 보내요."
유치원 생활을 여섯 살 친구들과 함께 보낸 내가 취학 전 워밍업 기간인 일곱 살 유치원 생활을 건너뛰고 곧바로 학교에 투입된 것이다.
그렇게 나의 흑역사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며칠간은 운동장에 한참을 서 있었다. 뭣 때문에 아이들을 세워 놓은 건지 당시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 운동장에 서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그 시간 내내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은 울먹이며 교실로 들어가는데 엄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내가 걱정된 엄마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운동장 한쪽에서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날 지켜보고 있었다.다른 애들은 멀쩡히 잘 서 있는데 나만 주눅 든 얼굴로 주야장천 울고 있으니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교실에 들어가서도 나의 눈물 바람은 계속되었다. 본래 좀 작기도 했고 일곱 살에 입학했으니 또래보다는 현저히 작은 키 탓에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당시 내 기준에서는 어른 키만 한 남자애가 시력이 몹시 나쁘다는 이유로 내 짝꿍이 되었다. 근데 이 녀석이 자꾸 노래를 흥얼거리며 박자를 타는 것처럼 위장한 채 내 발을 밟는 게아닌가?
지금 같으면 벌떡 일어나 녀석의 머리채를 낚아채며, '야, 죽고 싶냐? 제사상에 올라간 육전 맛 좀 보게 해 주랴?'라고 혼쭐을 내줬겠지만, 당시 난 어리고 나약했다.
짝꿍의 도발에 매일같이 울었고 왜 우냐는 담임선생님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걸 본 짝꿍은 더 신바람이 나 날 괴롭혔다.
그리고 3학년이 되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심부름할 사람을 찾았다. 친구들이 손을 들길래 나도 따라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OO 야, 밖에 나가서 '벼' 좀 가지고 와라." 하셨다.
교실 문을 나섰다. 하지만 벼는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쪽 쓰레기통 뚜껑 위에 정말 '벼'가 있었다. 나는 얼른 그걸 집어서 교실로 돌아갔다.
벼를 들고 헉헉거리며 돌아오는 나를 본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아니, 복도에 있는 폐품 중에서 '병' 좀 가지고 오랬더니, 이건 뭐니? OO야~ 네가 나가서 병 좀 가지고 와라."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아이들을 깔깔거리며 큰 소리로 웃었고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4학년이 되었다.
음악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이 내일 교과서에 있는 악보를 2절지에 그려올 사람을 찾으셨다. 무식이 용감이라고(无知无畏)나는 또 손을 번쩍 들었고, 다른 친구와 함께 절반씩 나눠 그려오기로 했다. 그날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 말린 2절지가 행여 바람에 구겨질세라 노심초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엄마에게 악보를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뭘 그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엄마의 도움을 받아 그려보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더니 내가 그릴 악보 부분이 어딘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보다 열 살, 여덟 살 많은 언니 오빠를 키워온 엄마는 우선 아이가 학교에서 이런 숙제를 받아오는 것 자체가 몹시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래서 가뜩이나 얼이 빠진 나에게 어느 부분을 그려가야 하는 거냐고 채근했다. 버벅거리며 잘 모르겠다고 말하자 엄마는결국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격앙된 목소리에 선생님은 그냥 안 그려 와도 된다고 대답하셨고, 다음날 나는 텅 빈 2절지를 들고 학교로 갔다.
음악 시간이 되자 다른 친구가 예쁘게 그려온 악보가 칠판에 붙어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그려갔어야 하는 악보 부분이 나오자 나를 한번 흘깃 보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기까지글을쓰고보니엄마에 대한 성토의 글 같아 괜스레 미안해지지만내가말하고자하는요지는내가정말심각할정도로말귀를못알아들었었다는점이다. 아, 많은분들이오해하실까봐노파심에하는말이지만중학교때부터정신을차린나는공부를꽤잘했고명문대에입학했다. 하지만, 초등학교때까지나는무척어리숙한아이였다. 학습 능력도 뒤처졌고 사회성도 부족했다.뭘알고학교에다녔다고하기엔내행동들은납득이가지않는다. 선생님의말씀을잘이해하지못했고친구들과의대화에서는행간을읽어내지못했다. 입학한해에만헤맨게아니라, 초등학교내내여러모로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내 이런 흑역사는 훗날 내 자존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학교가 즐겁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성격을 180도 바꿔놓은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난 학교가 싫었다. 매일 가방을 메고 학교를 향하긴 했지만, 학교는 나에게 즐거운 곳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생님들도 무서웠다. 친구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날이면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점점 위축됐고 소심해졌다. 집에서는 누구보다 사랑받는 막내딸이었지만 학교에서 나는 선생님의 말귀도 못 알아듣는 바보 천치였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수동적인 쫄보였다.
사춘기를 지나며 구겨진 자존감에 먼지를 탈탈 털고 다림질을 하고 예쁜 브로치를 달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뭐든 잘하고, 인정받고 있다는 걸 후천적인 노력과 교육으로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엄마의 따뜻한 눈길과 위로가 있었더라면 훨씬 더 빨리 회복력을 높일 수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오은영 선생님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제는브런치에 공개적으로 내 흑역사를 이야깃거리 삼아 남길 정도로괜찮아졌다.
얼마 전 미취학 아동을 둔 부모들의 마음을 들쑤신 그 정책을 보고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라 좀 씁쓸했다. 요즘 아이들은 훨씬 총명하고 영특하지만, 어느 곳에서는 나처럼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학교를 힘들어하는 아이가 나올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내가 띨띨했던 이유가 일곱 살에 조기 입학했고,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였을까? 그래서 이해력이나 문해력이 부족했던 탓일까? 그래서 그런 일련의 흑역사를 만들어 낸 걸까? 그럼 나처럼 일찍 학교에 들어갔고 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 친구들은 이렇게 다 어리바리했을까?
물론 내 흑역사가 전적으로 조기 입학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른 조기입학생 중에는 똘똘하게 학교생활을 잘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내가 그다음 해에 입학했었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보니 알겠다. 적어도 열 살 전까지는 아이들 사이에 한 달 차이도 꽤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차이를 감당하는 게 학교고, 아이가 핸디캡을 이겨내게 도와주는 게 가정에서 할 일이지만, 이제야 잘 돌아가고 있는 정책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나는 아이들이 학교 가는 걸 즐거워하고 선생님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나와 같은 흑역사로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자다가도 이불킥을 하는 아이들이 더는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고령화 문제를 해소하고 취학 전 교육격차를 줄이기 위해 한국 정부가 2025년부터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현재 만 6세에서 만 5세로 낮출 것을 검토하기로 하자 학부모들이 크게 반대하고 나섰다. 학부모들은 이 정책으로 아이들이 입학과 취업 때 더 과도한 경쟁에 놓이게 될 거라고 주장한다.
调整入学年龄是一个复杂的系统工程,最根本的遵循是必须尊重孩子的成长规律。
입학 연령을 조정하는 것은 복잡한 시스템적인 문제로 무엇보다 아이들의 성장과 발달상황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