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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Feb 16. 2024

선생님은 우리를 왜 가르쳐요?

교육에 대한 정의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학생들이 매년 던지는 질문이 있다. 주로 필요한 내용을 암기하거나, 학생들이 싫어하는 ‘글쓰기 과제’를 내주었을 때 자주 듣는 말이다. 선생님! 왜 공부를 해야 하나요?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질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시시각각 바뀐다. 일 년 전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어떠한 계기로 변화를 겪었다면, 일 년 전의 제자들과 지금의 제자들에게는 각각 달리 답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이 질문에는 확고부동한 답을 내리고자 열심히 고민하였다. 물론 고민을 거듭한 답도 특정 계기로 변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다만, 나는 곧바로 답을 하지 않는 불친절한 교사이므로 학생들에게 반문한다. 좋은 질문이야. 너는 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수업 중 입이 근질근질했던 몇몇 학생들이 잽싸게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질문을 덥석 물어버린다. 공부를 잘해야 나중에 커서 취직을 할 수 있잖아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공부하죠. 성공하기 위해서요. 심지어는 권력을 쥐기 위해서라는 답변도 듣게 된다. 당연한 말이다. 사람이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존재다. 공부의 열매가 돈, 자유, 취직, 권력이란 형태로 학생들에게 비쳤고, 그 열매의 달콤함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학생들이 언급한 공부의 열매를 나쁜 것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질문에 명확한 답변을 하기 위해 용어의 의미를 명료화할 필요가 있었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공부’의 뜻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다. 

    “대호야, 사전을 찾아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뿐 아니라 다른 장소나 교육기관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도 모두 공부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선생님이 자동차 정비사에게 전조등 교체하는 걸 배웠다면 그것도 공부, 그리고 너희들이 어떤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유튜브로 배운 것도 공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말하는 공부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을 배우고 익히는 걸 말하는 거야?”

    대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호가 말하는 공부의 범위는 ‘학교에서 교육받는 교과 내용’을 뜻하는 것이었다. 우선 대호에게 공부란 학교에서 국어, 수학 등의 과목을 배우고 익히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란 것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살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교육과정을 벗어나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익히는 것 또한 공부로 일컬어질 수 있다. 의정부에서 종로까지 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지하철 휴대전화 앱과 버스의 노선을 휴대전화로 찾아보고 걸리는 시간과 비용을 비교하여 나름의 답을 찾는 것도 공부가 아닐까. 생활 속에서 모종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자의 또는 타의로 이루어지는 학습 역시 공부다. 즉, 공부란 생각의 근육을 단련하는 행동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행동이며,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 답을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리한 답을 쉽게 알려주기엔 망설여지는 지점이 있었다.

    “선생님이 고민 끝에 정리한 답은 있지만, 이 물음에는 정답이 없어. 따라서 네가 공부를 하면서 답을 스스로 찾아가길 바란다. 지금 선생님의 답을 들어도 당장 와닿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선생님은 우리한테 왜 공부를 가르치는 거예요?”

    대호의 질문은 “선생님은 왜 교육을 하는 건가요?”로 바꿀 수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국가교육과정 정보센터 누리집에서 교육과정 총론을 찾아 읽어보면 답을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교육과정 총론에는 추구하는 인간상과 그것의 핵심역량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이는 교사의 교육 활동에 관한 근거이다. 하지만 나는 교육과정 총론보다 ‘교육’이란 낱말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교육학 서적에서는 교육을 기능적, 규범적, 조작적, 준거적 기준으로 각각 정의했다. 학생 대부분이 들었던 공부하는 이유는 거의 기능적 정의(functional definition)로 설명되는 교육에 해당한다. 기능적 정의란 교육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엇’이란 교육 자체가 담고 있는 가치(내재적 가치)가 아니라, 교육 활동 밖에 있는 가치(외재적 가치)를 말한다. 산업화 시대를 사는 정치가는 말한다. 교육은 산업화에 필요한 일꾼을 양성하는 수단이다. 중세 시대를 사는 성직자는 말한다. 교육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수단이다. 원시 시대를 사는 원시인은 말한다. 교육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산업화, 하나님의 뜻, 생존 등은 모두 교육 활동의 바깥에 있는 가치들이다. 기능적 정의를 따른다면 교육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리 정의할 수 있다.

    교육을 받는 주체인 학생들이 대부분 돈과 권력, 대학 입학으로 얻는 명예, 일자리 등을 교육의 목적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아이들이 미래에 보상받을 돈, 권력, 명예를 얻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까. 교육이 단순히 수요자의 요구사항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자본주의 속 여타의 서비스와 다를 바가 없는 걸까. 즉각적이고 실제적인 목적을 이루는 게 교육의 존재 이유라면 교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 할까. 만약 교육 자체가 교육 활동 외적인 것의 수단이란 의미만 지닐 때는 교육 활동의 독자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지는 않을까. 기능적 정의에 따라 교육이 돈과 명예, 권력이란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만 지닌다면, 목표한 바의 의미가 시대나 환경에 따라 퇴색될 때 당대에 성행한 교육 활동은 지나고 보니 옳지 못했던 목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일조한 조력 활동이 된다.

    나는 교육하는 과정 그 자체도 굉장히 의미 있는 과정이라 믿는다. 이러한 시각을 담고 있는 정의가 바로 교육에 대한 규범적 정의이다. 교육을 외재적 가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교육이란 말에 내재된 가치가 자아실현이라면 “교육은 자아실현의 과정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교육이 그 자체로 궁극적 지향점을 향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정의도 여러 측면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사람마다 달라서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교육의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나 이념을 부정하고, 주체에 대한 철학(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이 논리적으로 도전받는 시대에 각자의 상대적인 관점이 반영된 내재적 가치가 옳은지 그른지는 항상 논쟁거리가 된다.(1)  어쨌든 교육을 정의하는 주체는 사람이니 말이다. 따라서 각자가 내린 정의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정당화란 작업을 거쳐야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나는 교육이 가지는 기능적인 부분을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 기능적인 정의는 그것 나름대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만 하나의 정의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능적 정의 외에도 규범적 정의, 조작적 정의, 준거적 정의 등 여러 측면의 정의를 살펴보고, 교육이란 행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즉, 교육이 어떤 것을 성취하는 수단에만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대호에겐 어떤 식으로 말해야 이해할만한 답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너희들이 공부하는 이유를 존중한단다. 당연히 너희들이 결과적으로 말한 돈과 권력, 명예 같은 것들을 얻게끔 도와주려는 마음도 갖고 있지. 그런데 선생님이 교육 활동을 하는 의미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구나. 돈, 권력, 직업, 명예라는 목적을 너희들이 내리는 종착역이라고 생각해 보자.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어. 너희들이 목적을 이룬 셈이야. 그렇다면 기차가 목적지로 오게 해준 철길이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기차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경험 그 자체가 과연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 속에서 배웠던 여러 가지 정신적 가치들은 너희들이 원하는 가시적인 목적을 이루고도 그대로 너희들 삶에 남아서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기차가 목적지로 오게 해준 철길이 의미가 없는 것일까. 그리고 기차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경험 그 자체가 과연 의미가 없는 것일까?



(1) ‘이진경, 『철학과 굴뚝청소부』(2004), 그린비’를 읽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 ‘이성’을 가진 주체에 대한 믿음으로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문을 열었고, 주체가 진리를 인식하는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지만, 칸트가 무너진 주체를 재건합니다. 칸트 이후로 프로이트, 마르크스, 소쉬르나 비트겐슈타인 등 언어학자들에 의해 주체는 다시 무너지고 맙니다.

(2) 『쉽게 풀어쓴 교육학』(이병승, 우영효, 배제현 공저)의 chapter1-제1절-2 ‘교육에 대한 정의’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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